타이베이
역시 내가 타이베이에 오면 비가 온다.
이렇게 길게 날이 우중충 한 적은 처음인 것 같다. 어딜 가든 하루 정도는 해가 쨍한 날이 있었는데 타이베이는 아직까지 한 번도 쨍쨍한 해를 만난 적이 없다. 그리고 결국 오늘 비가 왔다.
비 오는 날 비 피할 곳 많은 도시에 있다는 건 다행이지만 오늘은 아무 곳도 가고 싶지 않은 날이었다. 아침엔 그래도 비가 오지 않아 책과 노트북을 챙겨 숙소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공원에 갔다. 국립 도서관도 함께 있는 곳이라 도서관에 들어가 책을 읽을까 했지만 날이 흐린 대신 공기가 좋아 공원 벤치에서 책을 읽었다.
처음 정한 자리는 모기와 파리가 많아 다리가 근질거렸다. 조금 있다가 자리를 옮겼다. 공원에 도착하자 잠깐 비가 내렸지만 곧 그쳤는데, 그래도 또 비가 올까 봐 비를 막아줄 천장이 있는 곳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야외지만 선풍기도 달려있다. 그리 더운 날이 아니라 선풍기 바람까지 쐬니 조금 쌀쌀했다.
타이베이만큼 날씨 변덕이 죽 끓듯 끓는 곳도 없을 것이다. 하루 만에 사계절을 다 느낄 수 있는 곳이다. 1분 전만 해도 더웠다가 갑자기 쌩하니 바람이 불면 서늘했다가, 바람이 멈추니 선선했다가 꽃샘추위도 아니고 다시 바람이 더 세게 부니 춥다. 챙겨나간 바람막이를 입으니 덥고, 벗으니 춥다.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옷차림이 각양각색이다. 민소매를 입은 사람부터 아래위를 꽁꽁 싸맨 사람까지.
공원에서 책을 읽다가 배도 슬슬 고프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 계신 곳에서 노래방(?) 기계를 틀고 노래를 시작하시길래 숙소로 돌아왔다. 바로 앞에 도서관이 있는데, 도서관 주변에서는 무조건 정숙해야 하는 줄 아는 나에게는 살짝 문화충격이었다. 하긴. 공원인데 못할 것도 없긴 하다.
숙소 들어오는 길에 길거리에서 파는 스시와 이미 대만 여행객들에게 유명한 85도씨 소금커피 한 잔을 샀다. 소금커피를 사는 데 점원이 영어를 아예 못해서 당도며 얼음양 등등 중국어로 물어보는 질문에 그냥 막 대답했다. 그랬더니 무설탕 커피가 되어 돌아왔다. 다행히 크림은 올라가 있어 숙소에 있는 설탕을 넣어 마셨다. 맛은 그냥 달고 짭짤한 크림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같이 마시는 맛. 커피에 휘핑이나 크림이 올라간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두 번 마실건 아니었다. 한 번은 마실 만했다.
그렇게 점심을 먹고 커피를 마신 뒤 오늘 읽은 책에서 좋았던 구절 필사를 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생텍쥐페리의 인간의 대지인데, 인간의 대지와 남방 우편기가 같이 수록되어 있다. 인간의 대지는 다 읽었고 지금은 남방 우편기를 읽는 중. 인간의 대지는 생각보다 어렵고 난해했다. 당연히 중간중간 좋은 구절은 있었지만 파트마다 내용이 이어지는 것이 아니다 보니 다소 산만하게 느껴졌다. 아마 내 수준이 이를 이해할 정도가 되지 못해서 그렇겠지만. 나중에 다시 한번 읽어야 할 듯하다. 남방 우편기도 어렵긴 하지만 인간의 대지보다는 잘 읽히는 것 같다.
책을 읽고 필사를 하다가 커피를 마셨는데도 축축 처져 침대에 누웠다. 내 기분과 의욕은 모두 날씨와 연동되어 있는 것 같다. 해가 나야 뭐든 하고 싶어 진다. 뤼다오에서 만난 캐롤에게 5월의 타이베이 날씨를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녀가 말했던 대로 해를 잘 보지 못하고 있다. 타이베이는 5월이 우기라고. 그렇게 미웠던 (애증의) 뤼다오인데 또 그 절경과 좋았던 날씨를 떠올리니 다시 한번 가고 싶어 진다. 내 마음도 타이베이 날씨처럼 변덕이 심하다.
타이베이에서 제일 좋았던 장소는 샹산이다. 그래서 등산할 만한 산이 또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눈에 들어온 Jinmian Shan. 한국어로 하면 금면산 金面山. 로프를 잡고 암벽을 등반해야 하는 곳인데, 이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였다. 내일 날이 좋다면 아침에 이곳에 가 등산을 하고 싶은데, 해가 나는 건 고사하고 비만 안 오면 다행이겠다.
불금인데 다른 사람들은 다들 무얼 하려나. 숙소 주변 밤 산책이나 한 번 하고 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