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베이
어제 한 숨도 못 잤다.
어제 밤 12시가 넘어 새로 도미토리에 들어오신 한 분이 코를 심하게 고셨다. 명절 때마다 모이면 큰삼촌이 코를 크게 골기 때문에 꽤 큰 코골이 사운드에도 익숙한데, 그 이상이었다. 이어폰을 끼고 영상을 틀어도 사이사이 코 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들라치면 깨고, 깨고의 반복이었다. 커피를 많이 마신 탓인지 잠에도 잘 들지 못해 책을 챙겨 호스텔 공용공간으로 나갔다.
책을 조금 읽으니 눈이 뻑뻑하다. 잠이 조금씩 몰려와 다시 방으로 돌아갔는데, 돌아가자마자 다시 잠이 모두 달아났다. 오늘은 글렀다.
새벽 4시가 넘어서야 잠시 잠에 들었다. 그리고 5시 40분쯤 깼다. 소리는 더더욱 커져있었다. 누가 소리를 지르는 줄 알고 잠에서 깬 이 상황이 그냥 웃겼다. 이어폰을 끼고 영상을 보다가 다시 잠들었다. 7시쯤 다시 일어나서 더 이상은 잠들 수 없음을 직감하곤 세면도구를 챙겨 샤워실로 향했다. 눈도 일찍 떠진 김에 외출 준비 후 아침을 먹고 바로 어제 찍어두었던 금면산에 가기로 했다.
세수를 하고 물을 마시려 하는데 아침 일찍 친구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며칠 전 사둔 방울토마토를 몇 개 집어먹고 요거트 한 잔 마시며 친구와 통화를 했다. 통화를 마치고 화장을 하고 아침을 사러 나가니 벌써 9시다. 아침 먹고 치우고 이를 닦고 버스를 타기 위해 나섰다. 10시 30분쯤 버스를 탔다. 다행히 하늘이 흐리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1시간을 조금 넘게 달려 Jinmian shan 부근에 도착했다. 아침에 숙소에 있는 커피머신으로 아메리카노를 한 잔 내려 마셨지만 아직 정신이 몽롱하다. 가는 길에 세븐일레븐이 있길래 화장실도 갈 겸 들어가 오트라테 한 잔을 샀다. 그렇게 산으로 출발.
산 근처에 대학교와 기숙사가 있었다. 이미 이쯤 오자 산 냄새가 가득하다. 날은 습하지만 덥지는 않았다. 시야는 좋지 않겠지만 등산하기에는 딱 좋은 날이다. 기숙사를 따라 걷다가 뒷문 쪽으로 빠지니 산길이 나왔다.
누가 봐도 등산객처럼 입은 사람들이 모여있었다. 잘 찾아왔구나. 구글맵으로 맞는지 한 번 더 확인 후 바로 산에 올랐다. 샹산은 초입이 살짝 동네 야산 같은 느낌이었는데 여긴 본격적으로 산이라는 게 느껴진다. 산에서 맡을 수 있는 향기부터 다르다. 확실히 여기가 더 공기가 좋다. 날이 흐리지만 맑은 공기를 마시니 기분이 상쾌해졌다. 그렇게 한 걸음, 한 걸음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이 산, 보통 산이 아니다. 완전 돌산에, 일단 경사가 미쳤다. 처음부터 살짝 경사진 길에 이 정도면 괜찮겠다, 싶었는데 산에 오를수록 기울기가 점점 가팔라졌다. 대신 조금만 올라도 벌써 경치가 끝내준다. 정자에 고양이 한 마리가 팔자 좋게 늘어져있다. 눈이 마주치니 야옹,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도망가지는 않았다. 여기서 잠시 앉아 쉬었다. 그리고 다시 출발.
출발하려는데 고양이가 따라나선다. 그리고는 이내 경사진 돌을 보더니 멈춰 선다. 그래. 너는 위험해. 안녕! 마지막 인사를 하고 산을 올랐다. 여기부터는 돌을 잡고 올라야 해서 손을 써야 했다. 그렇게 바위를 타며(?) 등산을 하고 있는데 흩날리는 비가 내렸다. 다행히 쏟아지지도 않았고 빗방울이 굵지도 않아서 그냥 계속 올라갔다. 이후로 비는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대신 안개가 계속 껴있었다.
그리고 결국 올 것이 왔다. 로프 잡고 올라가는 코스. 그런데 이렇게 가파를 줄은 몰랐다. 다행히 돌이 미끄러운 돌이 아니고 비가 오지 않아 미끄러지지는 않았다. 밧줄을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레 올랐다. 앞서 가는 대만 친구와 등산을 하며 좀 친해졌다. 서로 혼자 와서 의지가 되었다. 정상에서 사진도 찍어주고.
그렇게 밧줄에 의지해 계속 오르다 보니 다시 쉴 수 있는 정자 하나가 또 나왔다. 여기에도 고양이가 터줏대감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번에는 두 마리. 장난도 치고 서로 그루밍도 해주는 걸 봐서 사이가 좋아 보였다. 귀엽다. 얘네도 사람을 피하지 않는다. 대만 친구가 손을 내미니 몸을 허락한다. 친구가 고양이를 살살 쓰다듬었다. 여기서 잠시 쉬다가 다시 정상으로 출발. 얼마 걸어가지 않았는데 돌로 가득한 정상이 나왔다. 가파른 만큼 소요시간도 짧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 더 앞으로 나가면,
이런 뷰를 만날 수 있다. 동영상은 대만 친구가 생각지도 못했는데 찍어줬다. 확실히 사진보다는 영상이 멋지다. 카메라로는 어차피 다 담지 못하지만.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날이 흐려 비가 오기라도 하면 큰일이라. 그런데 내려갈 때가 더 큰일이다. 오를 때와 다른 길로 내려왔는데, 더 가파른 길이었다. 내려올 땐 위험해서 사진을 많이 찍지 못했다.
거의 90도 가까이 되는 것 같다. 다행히 저 발 밟는 곳(?)이 있고, 로프가 단단히 고정되어 있어서 무사히 내려올 수 있었다. 다리가 후들거린다. 내일 무릎이 남아날지 걱정이다. 아무튼 그렇게 하산을 하고 대만 친구에게 밥을 먹으러 가겠냐 물으니 오케이라 답한다. 걸어서 20분 거리에 타이베이 관람차로 유명한 미려화 백화점이 있다고 해서 거기를 가기로 했다. 목적지는 푸드코트.
내가 고른 메뉴는 대만식 한상 차림. 가격은 160위안. 저 족발 같은 게 먹고 싶어 시켰다. 쌀이 먹고 싶어 면 종류는 쳐다보지도 않았다. 맛은 간장 소스 베이스라 무난히 맛있었다. 역시 사람이 땀을 좀 빼고 밥을 먹어야 한다. 모두 남김없이 해치웠다. 친구는 돈가스 정식을 시켰다. 카레라이스를 함께 주던데 밥 양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대만도 밥심으로 사나 보다.
밥을 다 먹고 친구가 마시고 있는 음료가 궁금해 물어보니 아몬드 우유란다. 나도 한잔 사 먹어야지. 친구가 알려준 곳에서 한 잔 샀다. 가격은 90위안. 밥이 160위안인데 음료가 90위안이라니. 비싸다. 그래도 이때 아님 언제 먹어보겠나 싶어서 한 모금 쭉 빨았다. 달달한 것이 맛있다. 그렇게 음료까지 싹 비웠다. 배가 부르니 몸이 늘어진다. 대만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라인 아이디와 서로 찍어준 사진을 교환했다. 오늘 하루 이 친구가 없었으면 어쨌을까 싶다. 아마 재미와 보람이 반으로 줄어들었을 것이다. 여행지마다 짧지만 좋은 인연들이 있어 참 다행이다.
그렇게 늦은 점심을 끝내고 친구와 헤어졌다. 둘 다 짧고 굵은(?) 등산에 지친 탓이다. 나도 어제 잠도 잘 자지 못해 컨디션이 그리 좋지는 않아 바로 숙소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버스로 조금 떨어진 곳에 스린야시장이 있는 것 아닌가. 에잇. 괜히 여기까지 온 게 아까워서 버스를 타고 스린야시장에 다녀왔다. 그런데, 역시 나는 야시장 타입은 아니다. 특히나 혼자 왔을 때는 더더욱. 줄 서서 뭔가를 사는 것도 싫고, 너무 많은 선택지가 널려있는 것도 싫다. 그냥 한 바퀴 쓱 둘러보는데 이미 체력은 한계까지 다다랐다. 그냥 누워 쉬고 싶다. 벤치를 찾아 걸었다. 겨우 발견한 벤치에 앉았더니 정말로 눕고 싶어졌다. 안 되겠다. 다시 숙소로.
숙소로 가는 직행 버스가 없다. 한 번은 무조건 갈아타야 한다. 대신 환승역이 시먼역이라 좋았다. Le Phare에 들러 망고 우유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3일 내내 출근도장을 찍은 Le Phare. 망고우유는 밑에 코코넛이 들어가 씹는 맛이 있고 중간에 우유를 부어 고소하며 위에 망고주스와 망고 과육을 올려 우유와 섞인 맛이 일품인 음료다. 가격 80위안. 이건 하나도 아깝지 않다. 내게 대만에서 제일 맛있는 건 아무래도 세븐일레븐 옌마이나티에(오트라테)와 Le Phare의 망고 우유인 것 같다.
잠깐 당 충전을 해서인지 기운이 난다. 토요일 오후 5시에서 6시 사이의 시먼딩은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어제의 시먼딩과 너무 다른 분위기다.
어젯밤 산책을 하러 돌아다니다가 망고 우유가 먹고 싶어 버스를 타고 시먼에 왔었다. 밤 10시경. 관광객만 가득하고 이미 문을 닫은 점포도 많았다. 대만 젊은이들은 다들 어디 가서 노는 거지? 우리나라는 10시부터 시작인데. 대만 사람들은 유흥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당연히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오늘 만난 대만 친구에게도 물어보니 맥주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어제와는 180도 다른 시먼딩이 신기해서 한 바퀴 걸어보았다. 어제는 대부분이 관광객이었는데 오늘은 대만 사람들이 훨씬 많은 것 같다. 다행이다. 대만 젊은이들도 논다.
눈이 뻑뻑해서 거울을 보니 어제 잠도 잘 못 자고 아침 일찍부터 렌즈를 껴서 그런지 눈이 빨갛다. 망고 우유를 마셨더니 배가 불러 저녁 생각도 없다. 그렇게 숙소 가는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하필이면 앉을자리도 없어 진짜 녹초가 된 기분이다. 버스에서 내려 숙소로 오자마자 렌즈부터 뺐다. 눈에 바람이 통하는 기분.
다행히 방에 들어오니 어제 크게 코를 고셨던 분은 체크아웃을 하신 듯하다. 그런데 이번엔 그 자리에 여고생인 듯 보이는 친구가 들어온다. 아래층 친구랑 친구사이인 듯.
아, 제발. 오늘은 무사히 잘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