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상구

8. 이중 잣대

by 남상순



모임이 시작되었지만 평정심을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빛나의 두통이 약 먹을 단계로 접어들기도 전에 B가 양추자의 발언을 일찌감치 제압해 버린 것이다. 양추자는 말을 끊으면 그대로 끊길 뿐 별 미련을 가지지 않았고 B의 태도에 대해서도 일체의 관심을 표방하지 않다가 B가 횡설수설을 끝내고 나면 모르는 척 시치미를 떼며 다시금 발언을 시작했다. 아무도 자기 말에 대꾸를 하지 않으면 기꺼이 “H형은 어떻게 생각해요?”라며 질문을 던지는 식이었다. H는 언제나 그랬듯 물러나서 받아들이는 자세를 철저히 견지했다. 자살이 이야기 코드로 등장하면서 양추자는 더욱 흥분했다. 오늘은 나를 향해서도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자살은 늘 있었는데 그 의미가 언제나 같은 것은 아니었잖아요. 언니는 어떻게 생각하세요?”라고 물었다. 평소에 자살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기울여오지 않았던 나는 멀뚱하게 있다가 말도 안 되게 버벅거리는 식으로 당하고 말았다. 그러고 났더니 내면에서 뭔가 치받치는 게 있었다. 내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자격지심과 지나치게 남을 의식하지 않았나 하는 비겁함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나를 괴롭혔다. 이후 심장박동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은 상태로 시간이 흘러갔다.

쉬는 시간에 빛나와 B는 두통약을 사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열두 제자들이 늘어진 자세로 차를 마시거나 옆 사람과 대화를 나눌 때였다. 학과장이 양추자를 향해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감성이 풍부할 뿐 아니라 예술적인 소양으로 가득 차 있고 비평적인 안목도 특출하다는 것이었다. 뭘 먹고살기에 자기로 하여금 원초적인 감성을 자꾸만 환기시키느냐고 하기도 했다.

“그런 네가 왜 빨리 등단을 안 하는지 이해가 안 가. 설마 논문 안 쓰고 딴짓하고 있는 건 아니지?”

“무슨 딴짓요?”

맹한 표정의 양추자는 지금 소설 쓰기에 몰두하고 있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가릴 건 가리자는 영악한 계산에 의한 게 아니라 ‘딴짓’의 의미가 달랐기 때문으로 보였다. 양추자가 자신이 생각하는 딴짓을 보호하기 위해 히죽히죽 무슨 딴짓이냐고 계속 물어보는 사이 빛나와 B가 돌아와 아이스크림을 돌렸다.

“자, 제일 비싸고 예쁜 것은 너 줄게.”

빛나가 양추자에게 아이스크림을 골라서 건네자 B가 얼굴을 찡그리더니 와락 빼앗아 자기 것과 바꾸었다. 그러고는 “내 돈 주고 산 거다.”라고 변명했다.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 학과장이 이런저런 농담 끝에 양추자더러 “아이스크림 먹고 추워서 말을 더 많이 하는 거 아니야?”라고 했고 양추자는 예의 그 신바람에 내몰린 목소리로 “제가 그렇게 말이 많아요?” 하면서 빛나와 학과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빛나는 삼 초가량 뜸을 들이더니 “아니야, 할 만한 말만 하는 건데 뭐.” 했다. 뿐만 아니라 “괜찮으니 넌 네 길을 계속 가도록 해.”라며 응원하기까지 했다. 억지로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순간 내 궁금증의 각도도 살짝 미끄러졌다. 나는 빛나가 한층 진화된 것인지 아니면 양추자가 이전의 나와는 다른 의미를 지닌 먹잇감인지 궁금해졌다. 이전의 빛나는 자기 손에 직접 피를 묻혔을 뿐 아니라 모두가 보는 앞에서 사냥감을 삼키고 피를 닦으며 시치미를 떼었다면 이번에는 두통을 호소하는 것을 빼면 제법 여유가 느껴졌다. 오히려 이전의 빛나를 흉내 내면서 신경증을 드러내는 것은 B였다.

물론 양추자와 나도 하늘과 땅 차이였다. 나는 비평에 관한 한 내가 얼마나 무능한지 조금은 알고 있었으며 열두 제자에 포함된 것을 행운이라 여기는 축이었다. 학과장의 그늘이 아니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열두 제자에서 열두 번째 서열로라도 여기서 버티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반면에 양추자는 어디 가서 무엇을 하든 잘될 것 같았고 잘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존재였다. 양추자는 자기 세상을 이야기하고, 빛나는 양추자에게 네 길을 계속 가라고 한다. 그것은 양추자의 세상과 빛나의 세상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며 두 사람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 열두 제자 모임은 빛나가 지배하는 세상이지만 빛나가 주도하고 있는 것은 혈투이지 문학은 아니었다. 양추자는 문학은 자신의 몫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H가 내가 넘어질 경우를 대비해 미리 건넸던 귓속말을 양추자에게 전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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