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끊어도 끊어도
내가 화양리 오피스텔에 다시 나간 것은 여섯 번째 모임이었다. 그동안 자카르타에 계신 부모님이 편찮다고 해서 다녀오느라 이런저런 학교 일들을 모두 스톱시킨 상태였다. 모임이 시작되기 전에 기회를 만들어 양추자에게 엄지 척을 해 보이고 있을 때 B가 안으로 들어왔다. 나는 꽤 놀랐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B의 표정 위로 흐르는 병증이 예사롭지 않았다. 평소와는 달리 의자에 앉은 뒤에도 골이 난 것처럼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H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턱으로 B를 가리키면서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입 모양을 만들었다. H는 전화기를 들어 보인 다음 ‘끊어도 끊어도 대꾸가 없으니까’라고 문자를 보내왔다. 내가 알겠다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양추자는 난데없이 이번 대통령 선거 결과가 거의 예술이라며 감상을 늘어놓았는데 그런 양추자의 수다가 듣기 싫어 제압하고 싶어 하는 B의 표정이 대조되어 한 편의 코미디극을 관람하는 느낌이었다.
마지막으로 빛나가 먹을 것을 잔뜩 사 들고 들어왔다. 발제를 맡은 H가 피피티로 발표를 끝내자 질문이 쏟아졌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한다는 게 무슨 뜻인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까다로운 질문에 대해 H는 차근차근 대처해 나갔다. 결론을 내리기보다 질문을 되돌려 주는 방법을 통해 공격당할 가능성을 적절하게 차단해 가고 있는데 양추자는 거기서 생긴 틈을 놓치지 않고 반복해 질문했으며 자신이 이해될 때까지 줄기차게 덤벼들었다. 나는 토론에 끼어들기는커녕 조마조마하게 H와 빛나와 학과장 등의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빛나는 턱을 고인 채 상체를 거의 엎드리다시피 하면서 스트레스를 온몸으로 표현하였고 B 역시 기가 막힌 솜씨로 양추자의 말을 잘랐다. 둘 다 누군가를 향한 간절한 호소였다. 양추자는 양추자대로 자신의 호기심을 푸느라 이글이글 끓었다. 다 연소하지 않으면 결코 수그러들지 않을 불꽃이어서 마침내 소방관을 대신해 학과장이 끼어들었다.
“그만! 해!”
이번에는 우호적인 감정으로 나무라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양추자의 심장을 양추자의 몸에서 후벼 파는 소리였다. 빛나가 잘 들을 수 있고 빛나가 만족할 수 있게끔 정확한 타이밍에 타격이 가해졌다. H와 나는 눈빛을 교환하는 동시에 이 모임의 핵이면서 중심부라 할 수 있는 데를 바라보았다. 이미 절정에 도달한 빛나의 표정은 숨길 수 없는 쾌감으로 인해 환하게 피어나 있었고 물오른 물고기처럼 활력이 넘쳤다. 고개 숙인 양추자를 바라보는 빛나의 눈빛은 그윽함과 안타까움이 교차했으며 따뜻한 만족감이 흘렀다. 나는 그때 어린 딸을 목에 태운 아버지의 형상을 보았다. 딸을 목말 태우기 위해 몸을 수그린 것은 아버지였지만 아버지의 채찍을 재빨리 빼앗아 가로챈 것은 딸이었다. 빛나는 형제자매들을 향해 채찍을 마음껏 휘두르는 엄한 맏이가 되어 이렇게 소리쳤다.
“그래, 지나치게 나서서 말을 많이 하는 것은 병이야. 그건 자제해야 한다고.”
양추자는 뚝 끊어져 버린 고무줄처럼 위축되어 있었다. 학과장의 폭력이 그녀의 몸을 정확히 강타해 균열을 낸 데다 상처 부위에 빛나의 채찍을 직접 맞다 보니 넋이 나가 버린 것 같았다. 그러는 사이 학과장은 묘한 눈빛으로 좌중을 쓰다듬었다. 확실히 빛나는 이전보다 훨씬 진화한 상태였다. B가 끼어들어 양추자의 자유분방함을 원색적으로 비난하면서 말을 줄였어야 한다고 하자 빛나는 과감하게 태도를 바꾸고는 “말이라는 게 청바지 사이즈처럼 마음대로 줄이고 늘리고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라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태의 주도권을 노리고 나선 것이었다. 나는 H와 눈을 맞추며 혀를 내둘렀다. 그동안 빛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많은 작업을 하고 얼마나 많은 품을 팔았을 것인지 상상해 보는 것은 오로지 나의 판타지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나 한 입으로 두말하는 그녀를 직접 보고 나니 제압당한 것은 양추자가 아니라 나머지 10명 전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