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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운진 Oct 25. 2023

[로마 아침 K호텔에서]

―여행 가방에 넣고 싶은 시 7


로마 아침 K호텔에서

-고형렬  



        

잠이 깨지 않았으면 좋겠어 했어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면 했지

저 풀들이나 호텔 뒷길 공기처럼

주옥같은 시편도 새빨간 튤립꽃도

나에겐 너무 먼 곳에 있을 뿐이야

모닝콜도 듣고 싶지 않았어

아침이 차량 소음처럼 지나갔으면 했지

미궁처럼 길 모르는 도심 속을 말이지

손끝이 깨어나지 않았으면 했지

어떤 기억도 몸을 찾아오지 말길 원했어

갑자기 하고 싶은 것들이 사라졌지

하고, 나는 나에게 속삭였어

깜짝 놀란 나는 내 말에 귀를 기울였지

침대 시트에 얼굴을 묻은 채

그때 찢어진 가지와 가지가 보였어

까닭없이 내 몸은 통곡하고 싶어했지

달이 창에 거꾸로 걸려 있는

햇살이 시끄러운 성채 그 안쪽에서

모든 고통을 다 받아내지 못할지라도

거울 속의 낯선 한 남자여

다시 이 아침을 찾아올 수 없겠기에

나는 지금 거울 앞에 서 있다

로마 호텔, 그 아침에 멈춰 있다   


       

-『나는 에르덴조 사원에 없다』, 창비, 2010.    

 



    로마,

    아침,

    호텔,이라니...

    이 보다 더 꿈속 같은 일이 있을까? 시 속의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생각은 않고 일단 눈을 감은 채 로마 호텔에서 잠을 깨는 상상을 한다.     


    ‘어떤 계절이 좋을까? 창문 사이로 따듯한 바람이 들어와야 하니까 늦봄이 좋겠어. 모닝콜도 필요 없는 곳이니까 아침 아홉시의 햇살이 열려진 여행 가방에서 이국의 물건들을 구경하는 걸 내가 또 물끄러미 보는 거야. 하얀 침대 시트가 사라락거리는 소리도 좋구나! 부드러운 슬리퍼를 끌고 거리를 내다보면 키 큰 나무들과 빨간 꽃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인사와 그 알아듣지 못하는 낯선 말의 리듬과 억양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시의 제목만으로도 낭만적인 풍경이 한없이 커진다.     


    나를 묶고 있던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고 뭔가를 멈추었으면 싶을 때는 시 속의 남자처럼 다른 공간으로 갈 필요를 느끼게 된다. 시차가 생기고 장소가 바뀌면, 하루키의 말처럼 ‘정신적인 탈바꿈’이 가능하기도 하니까. 그리고 이런 예감과 전환점을 위한 여행이라면 마땅히 혼자 떠나는 여행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아무리 멀리가도 바뀌지 않는 것은 나를 둘러싼 인연과 이 삶의 무게들이겠지만, 그럼에도 마땅히 떠나고 싶어지는 간절한 때가 있는 법이니까.   

  

    시인처럼 나에게 속삭이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다 까닭 없이 통곡하는 시간을 보내는 일. 그곳에서 이렇게 지그시 나를 응시하는 일은 내 마음을 꼼꼼하게 읽는 일일 것이다. 누구의 자식, 누구의 부모, 누구의 친구와 애인, 그 밖의 많은 누군가의 무엇으로 사는 나 말고, 오로지 나 자신인 나는 시에서처럼 저토록 낯설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낯설어서 나에게 미안하고 측은하고 가슴 아플 것도 같다. 또, 그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이런 아침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기에 그 아침에 멈춰 있게 해 달라는 애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듯하다. 그건 자유의 느낌이기도 하니까 더더욱 멈추고 싶은 순간이 아니겠는가.   

  

    아주 오랜만에 이 시를 다시 읽다가 시인에게 로마의 K호텔 같은 곳이 내게는 톨스토이역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멀리,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고독하게, 마감하지 못한 사랑도 감히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그곳. 내 일상의 흔적과 닮지 않은 그곳. 나는 오래전부터 그곳을 톨스토이역이라고 정했고, 그 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기를 바라고 있었노라고.      

    내 몸에서 생활의 냄새를 지우고 싶다면 누구든 마음속에 이런 곳 하나 품어도 좋으리...  (이운진)




톨스토이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 되어    

-이운진


          

아스타포보

히어리가 피기에는 차가운 땅     


2월을 보내면 또 2월이 오고

겨울이 끝나면 또 겨울이 시작되는

나의 계절보다 따뜻한 그곳에서

    

이 세상의 주소를 갖지 않은 새들처럼

나스타샤나 안나가 되어 살아볼까    

 

나답지 못했거나 너무 나다워서 아팠던 기억들 지우며

내가 사라진 뒤에도 계속될 거룩한 일들

첫 열매를 맺은 나무, 빵 굽는 냄새

늦은 저녁 햇빛에 실려 가는 구름이나 보면서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하려고 찾던 온갖 말들의 사전을 찢어도 좋으리

     

왜 한 사람은 한 사람만을 죽도록 사랑하는지

왜 한 사람은 사랑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배신하는지

왜 한 사람은 손목을 긋고

왜 한 사람은 몇 번이고 새로운 고백을 하는지    

 

바람은 바람에게 말을 전하고

밤은 밤에게 비밀을 알려주어도

소문이 되지 않는 머나먼 그곳  

   

나의 시보다도 위대하고

내가 복종했던 시대보다도 더 위대한

무심한 풍경 속으로 들어가

     

아무것도 깨닫지 않고

어디로도 돌아가지 않으련다   

  

아스타포보

마지막 정거장

나, 이제 막 자유를 연습하기 시작했으므로



(*아스타포보 : 톨스토이역의 옛 이름. 톨스토이가 죽음을 맞은 곳이다.)


                        톨스토이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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