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보다 더 꿈속 같은 일이 있을까? 시 속의 남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들을 생각은 않고 일단 눈을 감은 채 로마 호텔에서 잠을 깨는 상상을 한다.
‘어떤 계절이 좋을까? 창문 사이로 따듯한 바람이 들어와야 하니까 늦봄이 좋겠어. 모닝콜도 필요 없는 곳이니까 아침 아홉시의 햇살이 열려진 여행 가방에서 이국의 물건들을 구경하는 걸 내가 또 물끄러미 보는 거야. 하얀 침대 시트가 사라락거리는 소리도 좋구나! 부드러운 슬리퍼를 끌고 거리를 내다보면 키 큰 나무들과 빨간 꽃들 사이에서 사람들이 나누는 인사와 그 알아듣지 못하는 낯선 말의 리듬과 억양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시의 제목만으로도 낭만적인 풍경이 한없이 커진다.
나를 묶고 있던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고 뭔가를 멈추었으면 싶을 때는 시 속의 남자처럼 다른 공간으로 갈 필요를 느끼게 된다. 시차가 생기고 장소가 바뀌면, 하루키의 말처럼 ‘정신적인 탈바꿈’이 가능하기도 하니까. 그리고 이런 예감과 전환점을 위한 여행이라면 마땅히 혼자 떠나는 여행이어야 할 것이다. 물론 아무리 멀리가도 바뀌지 않는 것은 나를 둘러싼 인연과 이 삶의 무게들이겠지만, 그럼에도 마땅히 떠나고 싶어지는 간절한 때가 있는 법이니까.
시인처럼 나에게 속삭이고 내 말에 귀를 기울이다 까닭 없이 통곡하는 시간을 보내는 일. 그곳에서 이렇게 지그시 나를 응시하는 일은 내 마음을 꼼꼼하게 읽는 일일 것이다. 누구의 자식, 누구의 부모, 누구의 친구와 애인, 그 밖의 많은 누군가의 무엇으로 사는 나 말고, 오로지 나 자신인 나는 시에서처럼 저토록 낯설 거라는 생각이 든다. 너무 낯설어서 나에게 미안하고 측은하고 가슴 아플 것도 같다. 또, 그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는 이런 아침이 언제 다시 찾아올지 모르기에 그 아침에 멈춰 있게 해 달라는 애원도 얼마든지 할 수 있을 듯하다. 그건 자유의 느낌이기도 하니까 더더욱 멈추고 싶은 순간이 아니겠는가.
아주 오랜만에 이 시를 다시 읽다가 시인에게 로마의 K호텔 같은 곳이 내게는 톨스토이역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아주 멀리, 감당할 수 있을 만큼 고독하게, 마감하지 못한 사랑도 감히 끝낼 수 있을 것 같은 그곳. 내 일상의 흔적과 닮지 않은 그곳. 나는 오래전부터 그곳을 톨스토이역이라고 정했고, 그 역에 내리는 단 한 사람이기를 바라고 있었노라고.
내 몸에서 생활의 냄새를 지우고 싶다면 누구든 마음속에 이런 곳 하나 품어도 좋으리... (이운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