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과제3 : 잊을 수 없는 음식]
패딩 껍질 속 달팽이처럼, 잔뜩 움츠려 책상에 붙어 겨울 내 동면에 들었던 남고의 추운 고1 겨울 방학 특강. 아.. 엎드려 자는데 슬리퍼 발 시려.
방학 일수 21일, 방학특강 일수 14일. 21-14=7 실 방학 일수 7일.
한 ‘시끄럽고 열정적인 빡빡이’ 녀석이 대뜸 복도를 지나는 나에게 인천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를 타고 종단을 하자고 했다. 그 녀석 뒤로, 창문으로 맹렬히 달려드는 눈이 보인다. 옆에 있던 ‘체력 좋고 낭만 있는 빡빡이’ 녀석은 한술 더 떠, 무전여행으로 돈 없이 종단을 하자고 했다. 미친 빡빡이가 둘이나 있다. 마음속 달팽이는 패딩 껍질에서 고개를 슬쩍 내밀어 본다. 미친 빡빡이는 셋이 됐다.
/얼음 물/
당일 날, “너 이대로 가면 진짜 길바닥에서 얼어 죽는다 “는 아버지와 된탕 싸우고, 만류하는 어머니를 지나 인천으로 향했다. 애초에 처음 국토종주 얘기를 꺼냈던 시끄럽고 열정적인 빡빡이는 부모님이 못 가게 하셔서 안 왔다. 당일 날 말해줬다. 참 효자 녀석이다. 낭만 있는 빡빡이는 아버지의 낭만 있는 지프차에 자전거를 싣고 나타났다.
두꺼운 패딩에, 배낭에, 귀마개에, 방한모에, 장갑까지. 배낭 안에는 전투식량 12개, 물, 초콜릿, 속옷, 그리고 배낭 위에 몸통 만한 침낭.. 겁 없는 17세 빡빡이 둘은 페달을 굴리기 시작했다. 건강한 대한민국의 남아라면, 20살이 되면 노력하지 않아도 나라에서 자연스레 지원해 주는 행군 비슷한 값진 경험들을 굳이 나서서 미리 체험했다.
눈이 너무 쌓여, 내리막길에서도 페달을 밟지 않으면 자전거가 멈춰 섰다. 엄청난 눈보라로 앞은 안 보이고 왼쪽으로 흐르는, 아니 흘렀던 한강은 얼어있다. 12시간을 달려왔는데도, 하루치 목표 거리의 채 절반이 되지 않았다. 첫날은 서울 한복판에서 보내게 됐다. 서울 한복판 은 촌놈들의 생각보다 냉랭했다. 막무가내로 텐트를 치면 얼어 죽는다는 것을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편의점을 돌며 박스를 구걸하고, 아파트 쓰레기장에서 바닥의 냉기를 막아줄 스티로품을 모았다. 주변 공사장 중 그나마 3면이 막혀있고 지붕까지 있는 시멘트 건 물에 들어가, 바닥의 나사들과 냉기로부터 지켜줄 박스와 스티로품을 깐다. 그 위에 텐트를 박고, 하루 내내 겉은 눈을, 속은 땀으로 젖은 옷 그대로 잠을 청한다. 자기 전 물을 마시려고 뚜껑을 열고 들이켰는데, 중력의 물리법칙을 가뿐히 무시하고 물은 통 안에 틀어박혀 있다.
얼음, 물. 서울의 밤은 참 춥구나.
아침에 텐트 밖으로 웬 인기척이 느껴 나가 보니, 공사장 인부 아저씨들이 옆에서 불을 쬐고 계셨다. “여기서 잤냐?” “네” “불이나 좀 쬐고 가라~” “감사합니다”
불 좀 쬐고 나와, 우리는 낭만 있는 지프차에 자전거를 싣고 집에 돌아왔다.
/얼음물/
6개월이 지났다. 덥고 미끌미끌한 여름방학이다. 교실엔 테스토스테론 외엔 그 어떤 성분도 존재하지 않는다. 남고생들은 테스토테론을 내뿜으며, 동시에 마시고 있다. 여선생님들에게도 자비 없는 테론이는, 절로 선생님들이 입장과 동시에 미간을 찌푸리게 한다.
이번 방학에도 주어진 방학은 7일뿐이다. 이번엔 홀로 종단을 준비한다. 짐이 많이 홀쭉해졌다. 속옷, 양말은 한 벌, 작은 가방엔 물과 초콜릿 조금이 들어갈 정도의 공간뿐이다.
자전거가 쭉쭉 나간다. 인천, 서울, 강원도, 경상남도, 충청북도, 경상남도, 부산.
중간에 어디였는지 기억이 안 난다. 경상남도쯤이었나, 2시간 만에 처음 나온 식당에서 한숨 돌리며 혼자 김치찌개를 시켜 허겁지겁 싹싹 긁어먹고 계산을 하고 나가려는데, 학생이냐, 혼자 왔냐, 어디 가냐 물으시던 주인 할머니께서 잠깐 기다려 보라고 하시더니 손에 묵직한 것을 하나 쥐어주셨다.
얼음물.
차디 찬 얼음물을 손에 들고, 그 위쪽 가슴 언저리쯤이 따뜻해지는 걸 느꼈다. 여름이어서 그랬나. 여담으로, 그날 밤 숙소에서 영수증을 확인해 보니, 내가 시킨 7천 원짜리 김치찌개 + 밥 한 공기 추가 + 얼음물은 5천 원이 되어 있었다. 6개월 전엔, 빽빽하고 삐까번쩍한 서울 한가운데서 참 외롭게 돌아갔는데, 여기서는 2시간 만에 겨우 하나 나온 쓰러져가는 식당에서 부산까지 나아갈 힘을 얻는다.
이 외에도 리모델링 중인 찜질방 공사장에서 무료로 모기장을 빌려주시며 재워주신 사우나 사장님, 처음 뵙는데 학생이냐고 밥 사주시던 삼촌, 부산에서 서울행 기차를 타고 올라올 때, 자리가 없어 연결칸에 실은 자전거를 보고도, 본인의 어릴 적 생각이 난다며 눈 감아주신 역무원까지. 더 멀리, 넓게 나아갈수록 많은 사람을 봤다. 사람과의 경험을 얻었다.
세상은 넓다.
나는 작다.(키 얘기 아님)
참 상반되는 두 계절의 얼음물.
서울의 ‘얼음, 물’
시골의 ‘얼음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