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 : 기억] - 4
[4/15]
어두움이 내려앉은 시간. 교주는 자신이 아끼는 신도와 함께 영안실로 향한다. 한산한 영안실 안, 두 남자 사이에 흐르는 공기가 무겁다. 그들은 종교 법률에 따라 새로 들어온 시신들을 깨끗하게 해야 했다.
교주가 지시하자 앙리는 시신 한 구가 안치된 냉동고 연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시신의 피부가 창백하다. 교주가 칼을 꺼내 들어 시신의 가슴을 절개하자 메말라버린 장기들이 드러난다. 교주는 새까맣게 죽어버린 장기 안에 라벤더와 세이지 꽃잎을 으깨어 짜낸 즙을 동맥에 집어넣는다. 향긋한 냄새가 공기를 정화한다.
“다음.” 교주가 지시한다.
앙리는 두 번째 냉동고를 연다. 교주가 가슴에 칼집을 내려고 시신을 만졌을 때, 그는 어딘가 이상함을 느낀다.
“죽은 거 맞아?”
“예.”
“살아있는 거 같은데.”
“몸에서 열이 나는 다른 이유가 있을 겁니다.” 앙리가 시신을 만져보며 말한다.
“숨을 쉰다고.” 교주가 시신을 내려 보며 말한다. “얘 누군데?”
앙리가 시신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본다. 살아있는 게 말도 안 될 정도로 썩고 낡은 시신이다. 시신 얼굴의 절반이 끔찍하게 녹아내려 누군지 식별이 안 됐지만, 앙리는 도리어 그 때문에 시신의 신원을 알 수 있다. 시신은 죽은 듯 보이지만 숨을 쉬며, 끝까지 닫히지 않은 왼쪽 눈꺼풀 틈새로 이쪽을 쳐다보는 눈동자를, 앙리는 보았다.
“발프 스트리트 뒷골목에 있던 노숙자였던 거 같은데요. 방금 들어온 시신입니다. 이름이… ‘좀비’더군요.” 앙리가 설명한다.
“아, 얘가 올리브인가? 멕시코인이라던데 진짜 이름이 올리브는 아닐 거 아냐.” 교주가 시신을 자세히 관찰하며 말한다. “실명을 알고 있나?”
“‘좀비’라는데요.”
“좀비? 이름이 ‘좀비’라고? 진심인가?”
“진짜 이름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곳도 피실험자를 구할 때 사전에 신상정보는 찾아보지 않는 듯합니다.”
“그곳은?”
“뤼디드요. 이 좀비가 오래전에 뤼디드 약물 실험에 사용된 적이 있다는데요. 거기서 좀비라고 불렀답니다.”
“다시 돌려주지 그래. 도망쳐 나왔던 것 같군. 그곳에서도 찾고 있었을 걸세. 저거 보게, 시신이 눈을 떴소.”
“안 그래도 며칠 전에 우편을 보냈었는데 안 받는답니다. 보시다시피 사람의 몰골이 아니고….” 앙리가 올리브를 쓰레기 보듯 내려다보며 말한다. “너무 오래됐군요.”
“폐기물이라는 거구만.”
교주는 올리브를 한참 동안 내려다본다.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일그러진 그의 안면이 기괴하다.
“얼굴이 괴사했는데…. 써니 실험이었나 보군. 딱 보면 알지. 써니를 만들었다며 대신 팔아 달라한 게 어제라는데, 연구는 꽤 오래전부터 한 모양이야.” 교주는 그런 뤼디드의 기술력을 비웃는다. “그래도 그때부터 성과는 있었던 것 같군, 하하.”
“뒤질 때까지 처맞고 죽은 시신을 갖고 왔다는데 아직 숨이 붙어있었군요.”
“이런 것을 죽이려고 몇 명이나 힘을 뺀 건가?”
“확인된 건 둘입니다. 노숙자가 어찌나 두들겨 팼던지 둘 다 얼굴이 완전히 뭉개져서 신원 확인에 차질을 빚었었죠.”
“죽이는 건 쉬우니 걱정하지 말게나. 우리는 그저, 이걸 최대한으로 뽑아 먹고 버리면 되는 걸세.” 교주가 약간의 브랜디를 잔에 따른다. “아직 안 죽은 게 오히려 좋군. 의사에 대해서 아는 게 있을 거 아냐.”
교주가 손짓하자 앙리가 올리브를 수납함에서 꺼내어 바닥으로 끌어 내리고 부축하여 일으켜 세운다. 올리브는 힘없이 앙리에게 매달린다. 아니, 그보다 버틴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이다.
교주가 올리브와 눈을 마주친다. 얼굴 반쪽이 괴사 된 올리브의 왼쪽 눈만이 교주가 쓴 까마귀 가면의 눈구멍 너머로 비치는 날카롭고 주름진 눈을 노려본다. 그리고 이내 올리브는 컥컥거리면서 겨우 들고 있던 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린다.
“네가 왜 여기에 있는지 아는가?” 교주가 올리브에게 묻는다.
올리브는 대답이 없다.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네. 잘 듣게. 그레이스에게 르노라의 수술을 맡겼더니 한 시간 만에 식물인간으로 만들어버렸더군. 무능하기도 하지. 의사라는 게 자격이 없더군.” 교주가 읊조린다. “그레이스가 누군지는 잘 알 테니 설명은 생략하겠소.”
올리브는 남아있는 왼쪽 눈으로 주변을 살핀다. 깔끔하게 정리된 교주의 목제 책상 위에는 알 수 없는 책과 서류가 가득하다. 손떼 묻은 만년필 촉엔 잉크가 흐르고 있다.
“르노라는 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워졌고 하반신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괴사했다지. 자네처럼 말일세. 그 약은 진통제 효과가 있던 것도 아니었어.” 교주의 얼굴이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죽었소.”
올리브는 반응하지 못했지만, 교주의 말을 전부 듣고 있었다. 그레이스에 대한 배신감과, 그 배신감을 흐리는 그간 쌓인 복잡한 감정들이 올라와 그의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올리브는 교주의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날 너무 나쁘게만 보지는 말아 달란 말일세. 하긴, 자네가 이해가 아예 안 되는 건 아닐세. 납치돼서 이리저리 굴려지다 도망쳐 나오니 사회도 끔찍하지….” 교주가 말했다. “주거 공간이 그리 쾌적한 편은 아니던 걸로 기억하오.”
“납치요?” 앙리가 확실하지 않은 사실에 의문을 가졌다.
“음? 아니오? 뤼디드 약물 실험이면 끌려간 거지 뭐. 아하, 바로 이렇게.”
그러면서 교주는 주먹으로 올리브의 얼굴을 마구 때린다. 올리브는 눈을 부릅뜨고 그들을 보고 있으면서도 비명 한 번 내지르지 않는다.
“주먹으론 안 죽는다니까요.”
“아프면 말하겠지. 죽이는 건 알아서 할 걸세.”
“보시다시피…,” 앙리가 올리브의 머리채를 잡고 고개를 치켜올린다. “얼굴이 괴사해서 말을 못 합니다. 구강구조는 말할 것도 없고 목구멍이 바로 보이는군요.”
앙리가 올리브를 바닥에 던지다시피 내려놓으며 말했다. 자세히 보니 정말로 올리브는 입과 혀가 없고 목구멍이 곧바로 보인다. 피부 없이 내부가 곧바로 보이는 오른쪽 눈구멍엔 징그러운 종기들이 우글댄다. 어느 정도 골격을 유지하고 있는 턱뼈는 그의 하관을 채우지 못한 채 외롭게 동떨어져 있다. 더러운 동물의 것으로 보이는 몇 개의 털 가닥이 마모된 그의 오른쪽 어금니 주변에 핏자국과 함께 달라붙어 있다. 교주는 그런 올리브를 보고 역겹다고 느끼면서도, 한편으론 동질감을 느낀다. 그의 아내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꼴이 이러니 가면을 쓰고 다녔겠지. 그래서 말을 못 한다고?” 교주가 재차 묻는다.
앙리는 그렇다고 답한다.
“뤼디드는 도움 되는 면이 없는 건 여전하군. 결과적으로 어제 거래에서도 가방을 뺏겼다며?” 교주가 한숨을 내쉬며 말한다.
“기습당했답니다.” 앙리가 말한다. “그것은 분명 사람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교주는 말없이 올리브를 쳐다본다. 바닥에 엎어진 올리브는 팔다리가 비틀어진 채 쓰러진다.
“다시 넣어놔. 몇 주 방치하면 죽겠지.” 교주가 손짓한다. “돈도 안 들고 말이야.”
앙리는 올리브를 냉동고 안에 다시 쑤셔 넣는다. 아덴타는 냉동고 안에서도 온몸이 뜨거운 올리브를 흥미롭게 바라본다.
“잡을 수 있을까요?” 앙리가 냉동고를 살짝 밀어 닫으며 걱정스럽게 말한다.
“누구? 의사?”
“예.”
교주는 식상하게 웃으며 걱정하지 말라는 표정을 짓는다. 이미 그는 믿는 구석이 있다.
“아, 그건 걱정하지 말게. 베시가 이미 움직였소.” 교주가 말한다.
그날은 교주가 온종일 날을 세우고 있던 탓에 예정되어있던 예배도 드리지 못했고, 시신도 깨끗이 하지 못하였다. 평소와는 다르게, 그날은 복잡하고 어지러울 뿐인 신문의 내용이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피워놓은 향에선 처음 맡아보는 비릿한 냄새가 났다. 그것은 향에서 나올 수 없는 축축한 냄새였다. 교주는 불안에 사로잡혀있었다. 며칠 전에 본 르노라의 얼굴엔 핏기가 없었다. 중태에 빠진 르노라가 병원으로 실려 가는 모습. 그것이 마지막이었을 줄 누가 알았을까. 르노라의 끔찍한 죽음. 수술 전에 담당의가 과다 투여한 독한 마약성 진통제가 그 원인이었다. 르노라가 수술실에 들어가지 않았더라면 죽지 않았을까? 의사가 알 수 없는 진통제를 무책임하게 투여하지만 않았어도 죽지 않았을까? 아니 애초에 의사라는 놈이 자격이 있긴 할 걸까? 의사는 사람을 죽인 책임을 물었는가?
며칠 후 열린 재판, 판사의 입에서 생명이 위태한 환자의 죽음은 의사의 책임을 묻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는 말이 나온 순간부터 책임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게 되었다. 단순한 사고였던 거라고. 하지만 교주는 그렇게 믿지 않았다. 사망 직전 르노라의 신체 상태가 심각하게 훼손된 것은 독성 진통제 때문이었다. 교주는 신도의 보고로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아버렸을 때, 한 가지 생각을 했다. ‘아무도 묻지 않는 책임은 정체불명의 진통제를 막무가내로 남발한 담당의가 져야 한다; 이것은 틀린 말이 아니다.’
교주의 부름에 베시는 손을 닦으며 기도실에서 나와 어깨에 가죽 코트를 걸친 채로 다가왔다. 베시의 팔에는 여러 거친 상처들로 그녀의 과거 행적이 기록되어 있었다. 마른 몸매였지만 그녀의 근육만큼은 남자 한두 명쯤은 거뜬히 때려눕힐 수 있을 만큼 다부져 보였다. 그녀의 살인은 기괴하면서도 늘 확실했다. 강한 정신력과 뛰어난 운동신경으로, 흑향기의 장로 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녀였다. 교주는 베시를 보자마자 그녀를 불러 세우고는 권총 한 자루를 쥐여주며 말했다.
“성공하면 수당을 지급하겠네.”
돈 얘기에 어김없이 베시의 귀가 솔깃해졌다.
“교주님 이런 총알 아직도 쓰는 건 여전하네.”
베시가 확인한 총알은 표면을 날카롭게 파 바깥으로 휘어, 적중 시 더 고통스러운 상처를 남길 수 있게 개조된 총알이었다.
“위상은 똑똑히 드러내야 하지 않겠는가?”
“얼마 줄 건데?”
“150파운드.”
수당은 베시를 움직이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다.
베시가 의사를 잡으러 이미 움직였다는 사실 하나로 교주는 마음이 놓인다. 지금까지 그런 일은 늘 베시에게 맡겨왔으니까. 앙리는 그런 교주의 말을 그저 따를 뿐이었다.
*
우린 숨죽였다. 장발이 내 허리를 아래로 꺾어버린 탓에 주변을 볼 수가 없었지만, 점점 커지는 발소리는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
〚뛰어!〛
비명이 들렸다. 그것은 짧고 굵은 여자의 비명이었다. 장발은 내 손목을 잡고 뛰었다. 그 때문에 불어닥친 불쾌한 바람이 옷 안으로 들어가 맨살을 스쳤다. 난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정돈된 금발 머리에 까마귀 가면을 쓴 한 여자를 보고 말았다. 그녀는 장발에게 머리를 얻어맞은 후였으나 두 발로 멀쩡하게 땅을 딛고 서 있었다. 그녀는 자기 머리를 매만지며 가면을 고쳐 썼다. 그리고는, 코트 안쪽에서 권총을 꺼내 나를 겨냥하고는 곧바로 쏴버렸다.
한밤중 거리에 커다란 총성이 울려 퍼졌다. 심장이 철렁거렸다. 도망치는 내내 숨이 가빠졌다. 장발이 내 팔을 당겨 날 벽 안쪽으로 끌어와 총에 맞지는 않았다. 그 여자는 여전히 총을 겨눈 채 내게 다가왔다. 그녀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우린 계속 달렸다. 필사적으로 죽음으로부터 도망쳤다. 이리저리 꺾인 골목길이라 오랫동안 총의 사정거리 안에 노출되지는 않았지만 날 쫓아오며 조금이라도 틈이 보이면 총을 쏘는 그 여자는 끝까지 나를 죽이려 들었다.
도망치는 내내 연신 총소리가 울렸다. 총알은 발사될 때마다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건물 외벽에 박혔다.
장발은 날 킹스크로스역으로 데려가고 있었다. 난 그의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네 발째였을까. 끝내 그녀는 기어코 내 어깨를 맞추는 데 성공했다. 옷이 찢어지고 피가 흘렀다. 건물 외벽 사이 그 작은 틈새로 쏜 총알이 무서운 소리를 내며 내 왼쪽 어깨에 박힌 것이다. 아니, 사실 어깨에 총알이 박혔는지는 확인이 어려웠다. 하지만 총에 맞은 어깨에서 뜨거운 열이 올라왔다.
미친 듯이 도망치다 보니 큰 거리로 나왔다. 나는 서둘러 킹스크로스역 안으로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니 여자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혹여나 총에 맞을까, 벽에 붙어 기다시피 도망쳤다. 탑승구는 길게 이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사이 기둥들은 널찍이 서로 떨어져 있었다. 총구를 피할 수 있는 것들은 점차 줄어가고, 후들거리는 다리에 어느새 불규칙해진 호흡으로 무너졌을 때, 나는 결국 바닥에 엎어져 도망치기를 포기했다. 벽을 지탱하려다 실패해서 오히려 벽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히며 엎어졌다. 장발은 어디 간 거지? 어느 순간 장발은 보이지 않았다. 다른 길로 도망쳤나. 언제부터 날 버린 거지?
이곳의 바닥에선 매캐한 흙먼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어느새 다가온 금발 머리 여자가 날 마구 때렸다. 그녀는 분을 풀었다. 그녀가 손날을 세워 옆구리를 찔렀을 때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에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이젠 머리고 몸이고 다리고 날 마구 찔러대는 그녀에게는 살기와 광기가 동시에 느껴졌다. 저항하느라 힘은 빠질 대로 빠져버렸고, 심하게 얻어맞은 탓에 몸을 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우리 구면이지? 나 기억나?” 금발 머리 여자가 흥얼거렸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었지. 길게 얘긴 안 할게.”
나는 아무런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오늘이 아니면 아무런 기억도 없기에, 지금의 나는 보는 모든 것들이 초면이었다. 하지만 금발 머리는 이미 날 몇 년 전부터 알고 있는 듯했다.
주위를 둘러봤다. 도움이 될 만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역을 배회하던 많은 경비조차 어째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리볼버를 흔들며 태연한 표정, 아니 어쩌면 살인에 대해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총구를 내 이마에 가져다 댔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웬 미친 사이비 집단이랑 얽힐 때부터 빠져나왔어야 했다. 아니, 애초에 다니엘을 찾으려 하면 안 되었나? 차가운 무언가가 이마에 맞닿는 것을 느꼈다. 죽는구나. 마음의 준비 따윈 안 했다. 아니, 할 시간도 없이 모든 과정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어차피 잃을 게 없는데 죽어봤자 크게 의미가 있긴 한가,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아무것도 들지 않은 텅텅 빈 대갈통으로 생고생하며 살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지금 죽어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마음이 바뀌었다. 지금은 죽기 싫었다. 그러자 현실을 자각했다. 내가 죽기 싫으면 어째? 총을 가지고 있는 건 사이코패스 여자인데? 머리가 아파졌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러나 동요는 없었다.
그때 금발 머리는 오른쪽 검지를 방아쇠에 살포시 올렸다. 이번엔 조금 흔들린 총구와 달깍거리는 소리도 함께 느껴졌다. 눈을 감고 그녀가 총을 발사하기를 기다렸다.
무언가 맞는 소리가 났다. 총소리였나?
아직 죽지 않았다. 불발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총소리가 아니었다. 웬 돌멩이가 위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더니 조용한 소리와 함께 깨져버렸다. 난 고개를 들었다. 여자의 시선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그녀는 자기 머리를 매만지며 고통에 신음했다. 어디선가 날아와 여자의 머리를 맞춘 그것은 돌멩이가 아니라 스테인리스강으로 뒤덮여있는 회중시계였다. 소리가 컸던 것을 보니 어지간히 제대로 맞은 모양이었다.
그때 누군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어깨를 내세우고 금발 머리를 몸으로 들이받는…, 그레이스…? 그레이스의 난입에 금발 머리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충격으로 금발 머리는 휘청거렸다.
다시 한번 큰 총성.
방아쇠 위에 올려져 있던 그녀의 손가락 때문에 총알 한 발이 커다란 소리를 내며 엉뚱한 곳으로 발사되었다. 금발 머리가 중심을 잃고 휘청이며 쏜 덕에 총알은 나를 빗나갔지만, 발사됨과 동시에 내 얼굴 바로 옆을 지나서 뒤쪽 벽에 박히며 큰 소리를 냈다. 그 충격은 너무나 컸다. 총알이 벽에 박히는 순간, 깨질 듯한 이명과 함께 나의 왼쪽 귀가 들리지 않았다. 그와 동시에, 시야가 흐려지며 방향감각이 점점 상실되어갔다. 나는 이미 벽에 기대어 엎어진 상태에서, 다시 한번 옆으로 엎어졌다. 얼굴과 목 부근 근육이 격렬하게 수축하며 엄청난 고통을 수반했다. 옆으로 엎어지며 바닥에 부딪히는 과정에서 팔꿈치에 작은 조약돌이 찔렸다. 전기에 감전된 것 같은 찌릿한 느낌이 들었다. 숨이 잘 안 쉬어졌다. 숨을 고르며 정신을 차리려고 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청각이 되돌아왔으나, 가장 먼저 귀에 들어온 것은 소름 끼치는 금발 머리의 웃음소리였다. 그레이스와 금발 머리는 서로의 팔을 붙잡고 격렬한 몸싸움을 하고 있었다. 금발 머리는 오른손에 든 총으로 그레이스를 조준하려 했고, 그레이스는 금발 머리의 오른쪽 손목을 움켜잡고 위로 들어 올리며 저항했다. 그레이스는 죽지 않으려 버르적거렸다. 바닥에 그려지는 두 여자의 그림자가 어지러웠다. 둘의 몸싸움은 비등한 것 같았으나, 신나서 실실 웃는 금발 머리와는 다르게 그레이스는 죽도록 힘을 짜냈다. 난 그레이스를 도와줄 수가 없었다.
금발 머리는 자기 손목을 꺾었다. 뼈 꺾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모습은 기괴했다. 그리고 총구는 그레이스의 복부를 향해있었다. 그 순간 시간이 멈추는 듯했다. 죽음을 직감한 그레이스의 표정이 세밀하게 눈에 들어왔다. 살인의 순간이었다. 이윽고 마지막으로 총성이 울리고 모든 게 조용해졌다. 굳어버린 두 다리로 딱딱하게 서 있던 그레이스는 이내 바닥에 쓰러졌다. 잠시 뒤 그레이스의 복부에선 정체 모를 액체가 흘러나왔다. 그것은 피였던가. 붉은 것 같기도 했고, 검은 것 같기도 했다. 확실한 건, 비정상적으로 많이 흘렀다는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서 배를 잡곤 숨을 헐떡였다. 배에서 자꾸 나오는 피를 스스로 지혈해 보았지만, 점점 가빠지는 숨을 몰아쉴 뿐이었다. 그레이스가 움찔댈 때마다 구석에 쌓인 낙엽이 버석거렸다.
나는 바닥에서 숨을 헐떡이며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왜 아무것도 못 해!〛 장발의 목소리였다.
나는 있는 힘을 쥐어 짜내어 위를 올려다보았다. 장발이 내 바로 위에서 소름 끼치는 긴 머리카락을 아래로 내리며 날 내려다보았다.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잠긴 목으로 날 밀어붙였다.
〚네가 지키랬잖아!〛
장발은 지금까지 어디서 무얼 한 거지? 도망친 것이었다면, 왜 다시 돌아온 거지? 알 수 없는 울렁거림에 당장 토를 할 것만 같았다. 장발은 그레이스의 시신을 부여잡고 엉엉 울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자신의 누나가 죽었다느니 하는 울분을 토해냈다. 그는 울부짖는 것 외에 다른 어떠한 행동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은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들로 감싸였고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어지러운 감정들을 절제할 수가 없었다. 몇 초 후 장발이 소리쳤다.
〚죽었잖아!〛
눈을 다시 한번 감았다 뜨자, 장발은 역시 보이지 않았다. 죽어버린 그레이스를 뒤로하고 나를 죽이러 금발 머리가 흥얼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것은 환각이 아니었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총의 탄창을 확인하는 소리였다.
금발 머리는 흥얼거리다가 갑자기 욕을 퍼부으며 내 앞에 쭈그려 앉았다. 남은 총알이 없다고 징징거렸다.
그녀는 내 바로 앞에 쪼그려 앉고는 내 머리채를 쥐고 고개를 강제로 들어 올렸다. 나는 힘없이 얼굴을 내밀었다. 텅 빈 리볼버를 바닥에 툭 하고 내려놓았다. 그녀는 주먹을 쥐었다. 가죽장갑의 뻑뻑한 소리가 났다. 이곳저곳에 박힌 금속 가시들이 달빛에 비쳐 눈부시게 빛났다. 저 주먹에 얼굴을 맞으면 어떻게 될까? 아마 장갑에 박힌 가시에 코뼈가 뚫리거나, 주먹이 너무 강하다면 두개골이 박살 나겠지. 도망은 갈 수조차 없었다. 그녀에게 맞서지도 못하는 상황에,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조차 불가능에 가까웠다.
장발은 내 옆에 조각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가만히 있었다. 그의 잔상이 흔들렸다. 그는 이제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금발 머리는 갑자기 기도를 올렸다. 그것은 영어로 된 기도가 아니었다. 이윽고, 금발 머리는 내 얼굴을 노려보았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과녁을 주시하는 궁수처럼 내 얼굴이 아니라 내 머리를 노려보는 것이었다. 금발 머리가 주먹을 내지르려 팔을 뒤로 뻗었다.
제발! 더 이상 기회가 없었다. 제발 죽어라! 아, 불발…!
그녀에게 총을 쏘았으나 불발이었다. 금발 머리가 총알이 없다는 이유로 바닥에 던져둔 총을 그녀 몰래 주웠을 뿐이었다. 그리고 팔을 들어 그녀의 머리를 겨눈 것이었다. 망설임 없이 쏘았다. 하지만 탄은 나가지 않았다. 실린더 돌아가는 소리가 민망하게 들린 후 정적이 흘렀다.
금발 머리는 폭소를 터뜨렸다. 그녀는 무안하냐면서, 죽는 척이라고 해야 하냐고 조롱했다.
난 다시 한 발 더 쐈다. 그러나 이번에도, 실린더만 민망하게 돌아갈 뿐이었다. 금발 머리는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총엔 장전된 총알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겠지.
난 총을 내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꽉 쥐었다. 금발 머리는 다시 팔을 뒤로 뻗었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내 턱을 쥐어 잡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총소리가 났다. 난 심한 이명에 몸부림쳤다. 이번엔 불발이 아니었다. 금발 머리는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지만, 그 주먹은 끝내 내게 닿지 못했다. 그녀는 비명도 없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아무리 남은 총알이 없다고 한들, 내 손이 닿는 곳에 총을 내려놓은 것은 금발 머리의 큰 실수였다. 그녀의 머리를 뚫은 것은 올리브가 준 총알이었다. 그녀 몰래 등 뒤에서 금발 머리의 리볼버와 호환되는 45구경 탄을 장전할 때도,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 채로 열심히 떠들어대다가 그렇게 죽었다. 잘 죽였다. 잘 죽였어. 못 죽였으면 내가 죽었을 거야….
금발 머리를 조준하고 그녀가 죽을 걸 알고 손가락에 힘을 주었으면서도 총성이 울리는 그 순간, 두려움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녀가 죽자 몸에 힘이 풀리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순간에 덜컥 겁이 나기도 했으나, 뜨겁게 달궈진 리볼버의 총구에서 피어나는 하얀 연기는 어째서인지 나를 안심시켰다. 겨우 힘을 준 왼팔은 총알이 발사되자마자 뼈가 부러지는듯했다. 금발 머리는 그렇게 죽었다. 내 몸 위로 엎어진 시신을 치워버렸다. 그것은 꽤 무거웠다.
동시에 나는 또 다른 무언가를 보았다. 금발 머리를 몇 번이고 계속해서 죽이는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환상 속의 그녀는 총에 맞아 숨을 거두고도 어느새 다시 리볼버를 앞에 두고 당당한 모습이었다.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의 굴레. 그러나 이것은 환상에 불과했다. 나는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쑤시는 어깨를 붙잡고 일어나 검은 피를 흘리며 죽어있는 금발 머리 앞에 묵묵히 섰다. 장발은 그새 또 도망쳤는지 사라져 나 혼자 남아있었다.
눈앞에서 사람 둘이 죽는 것을 모두 보고 충격에 빠져 슬픔에 잠겼지만, 어느새 더 이상 흐르지 않는 눈물은 이성을 되찾게 도와주었다. 금발 머리는 잘 죽였어.
이렇게 쉽고 허무하게 끝나는 것이었다. 감정과 복잡했던 마음이 전부 파도처럼 떠내려가는 것이 느껴졌고 눈앞에는 처참하게 죽어있는 두 여자뿐이었다. 장발은 다시 사라졌다. 난 그레이스를 살리고자 했던 장발이 그녀가 죽고 일이 끝나니 끝내 도망쳤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더 깊이 생각하기엔 머리가 깨질 것만 같았으니까. 그가 나를 찾아온 이유도 단순했구나. 하지만 이것만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은 환각이었지만, 현실로 착각할 정도로 생생했다. 그레이스의 시신을 끌어안고 자기 누나를 애타게 부르는 장발의 모습. 그것은 절대 내 망상에서 나온 환각이 아니었으리라. 자신의 누나를 살리겠다고 나를 이렇게 고생시킨 것이었을까. …아니다, 그레이스는 장발을 알아보지 못했다. 역시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주위를 둘러봤다. 금발 머리의 죽음 이후 머릿속의 감정들이 마구 꼬이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금발 머리의 시신 위에 총을 툭 던져두었다. 그리고는, 그레이스가 던졌던 박살 난 회중시계를 집어 주머니에 고이 넣었다. 집으로 걸어오는 길은 쓸쓸했다. 조용하고 어두웠다.
그 뒤로 난 집에 틀어박혀서는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감정적으로는 점차 둔해지고 생각은 많아졌다. 그래, 나랑은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던 거지. 그저 재수 없게 휘말리게 된 것뿐이었어.
죽지 못해 살아왔으나, 여전히 세상은 모든 것이 빠르고 각박하기만 하다.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주머니 깊숙한 곳에서 심하게 깨져버린 회중시계가 잡혔다. 이 시계가 아니었으면 나는 그때 곧바로 죽었겠지. 나는 곧 그 시계를 내 작업 책상, 시계에 딱 맞는 도면 위에 올려두었다. 나는 그레이스를 살리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지만, 그레이스는 어째서 목숨을 걸고 나를 살리려고 했을까.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있던 것일까. 아, 그냥 이 모든 건 나랑은 상관없고, 그저 재수 옴 붙은 사고를 당했다고 생각하는 편이 나으려나.
조명을 켜자 무언가를 잃고 큰 상실감에 빠져버린 모습의 사내가 창문에 비쳐 보였다. 그가 바로 나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언젠가 내 옆에서 그날의 악몽을 읊어줄 것 같은 것이 그 모습을 보고만 있어도 지금까지의 짧고 굵었던 기억이 계속해서 떠올랐다.
머리를 풀어 목까지 늘어뜨린 내 모습은 이곳에서 ‘기억의 날’의 나와 같았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나는 오늘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눈치 없는 시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흐르고 있었다.
나는 며칠간 한 끼도 먹지 않았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린 상태라는 걸 나 스스로 인지하게 되었다. 차라리 눈을 감고 의식을 완전히 놓는 것이 나았다. 그렇게 의식을 잃고 그 뒤로 기억이 하나도 없다.
*
삶은 아주 짧은 순간에 끝난다. 약간의 기억조차 남지 않을 만큼 순식간에. 그 순간에 나는 어둠 속에서 가만히 숨을 쉬고 있었다. 무언가 거대한 게 끊겨버린 것만 같다고 느낄 때쯤,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어지러웠다. 어느 순간 갑자기 쿵 하며 떨어지는 느낌이 들자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머리는 아팠지만, 몸은 개운한 것을 보니 꽤 오랫동안 잔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니 해가 저물고 있는 늦은 저녁과 밤 그 사이였다. 나는 바닥을 딛고 일어났다. 먼지가 조금 쌓인 나무 바닥은 차가웠다. 맨발이었던 탓에,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작은 나사에 상처가 났다. 쓰라렸다.
오늘따라 왠지 모르게 어색한 느낌이 나는 책상 위에는 작은 회중시계에 들어가는 부품들이 잔뜩 널브러져 있었는데. 그것의 개수를 세던 중 앤드루 경이라는 사람이 나를 찾아왔다. 나를 다니엘로 알고 있던 그는, 며칠 전 나의 누나가 살해당했고 그녀를 살해한 범인은 그곳에서 자살한 것으로 추정한다고 전했다. 그에게 나는 다니엘이 아니고 어떠한 형제자매도 없다고 부인했다. 다른 이의 누나의 죽음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나는 슬프지 않았다. 아니, 슬플 수 없었다.
서늘한 향기가 짙은 오후에는 적적함만이 공기에 스며들어 그 한기를 곳곳에 전했다.
[신문 기사 / 1927년 9월 23일 자]
「‘킹스크로스 살인사건, 두 명 사망. 킹스크로스역 일부 봉쇄….’
어제 새벽, 킹스크로스 기차역에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인적이 드문 기차역 뒷길에서 일어난 이 살인사건은 두 명 모두 현장에서 발견된 작은 웨블리 리볼버 한 자루로 사망하였다. 각각 복부, 머리에 총상이 있었으며,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살해하고 자신도 그 자리에서 자결한 것으로 추정된다.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기 위해 런던 광역 경찰청 측에선 역을 장기간 봉쇄하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