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 고착]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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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것은 없다, 이 세상 모든 것이 변화의 흐름 속에 있다. 봄의 꽃이 아름답게 만발하다가도 결국은 시들어가는 것처럼. 강렬했던 여름의 태양이 서서히 가을바람에 자리를 내어주는 것처럼. 겨울의 눈이 온 세상을 하얗게 덮었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녹아내리고 마는 것처럼.
사랑도, 슬픔도, 기쁨도 모두 잠시 머무는 순간의 감정일 뿐이던가. 우리가 그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 둘 수 없듯이, 모든 것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흘러간다. 그것이 설령 시간의 무한한 굴레라 할지라도, 언젠간 끊어지기 마련이니까. 특정한 날이 반복되던, 내겐 지옥과 같았던 9월의 시간.
피 냄새가 지독하여 머리가 저렸다. 내 앞에 있는 것들은 생명이 붙어있지 않은 ‘어떤 것들’에 불과했다. 이것들 또한 조금 전에는 사람이었지. 그러나 둘 다 총알이 몸에 박히고 나서는 인간성이라곤 조금도 남아있지 않은 물체가 되어버렸다. 여기서 인간성이란 숨 쉬고 느끼는 생명이 한낱 단단하고 물렁물렁한 사물과는 다름에서 나오는, 그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의 차이일 뿐이다.
군데군데 쑤시는 끔찍한 통증. 뜨겁게 가열되어버린 리볼버에선 연기가 났고, 바닥을 적신 것은 흙탕물인지 피인지도 구분할 수가 없었다. 오늘도 하루가 끝났구나, 나는 생각했다. 하루도 끝났고 이번 일도 끝난 것이었다.
한 명은 내가 쐈다. 살고자 했던 것이었지만,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사람을 죽여버린 살인자라는 틀에서 벗어나지는 못하겠지. 내가 무한한 시간의 굴레에 갇혔다는 것을 눈치채고 난 후부터 벌써 몇십 번째 똑같은 사람을 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그곳에 갇혀 이 지옥 같은 일만 반복해오던 것이었다. 이 여자가 뭐라고 내가 이곳에 있는 거지? 장발은 또 나를 이용한 건가? 다니엘 누나의 죽음.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모습과 일치한 신문 기사의 내용. 장발, 그가 다니엘이었던 것이었다.
무한히 반복되는 시간 속, 어딘가 잘못되었음을 느끼면서도 따로 이 시간을 나가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다. 셀 수도 없이 반복된 총성과 죽음. …어쩌면 더 긴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시간의 굴레에 갇혔다는 사실을 안 것은 금발 머리를 두 번째 쐈을 때부터였다. 그녀를 쏘면 지금까지 쌓인 기억들조차 돌아왔고 곧바로 똑같은 사건이 내게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다시 ‘기억의 날’로 돌아와 눈을 뜨면 지금까지의 기억이 깔끔하게 사라지고 어제와 오늘 있었던 일은 무한히 반복된다. 나는 그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또 잊어버리고 금발 머리의 머리를 쏘고 난 후에야 내 기억은 돌아온다.
나는 두 시신 중 하나의 시신 위에 권총을 살포시 올려놓았다. 아니, 사실 쓰레기를 버리듯 던졌다. 살포시 던진 것도 아니었다. 금발 머리의 어깨로 떨어진 리볼버는 바닥으로 튕겨 이상한 소리를 내며 굴렀다. 금발 머리의 죽음은 최대한 그녀의 자살로 보이게 만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채 박살 난 회중시계를 챙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체감시간으로 벌써 한 달째 하루하루가 똑같이 반복되고 있으니 별다른 특이점은 기대하지 않아도 좋다. 아니, 기대하면 안 됐다. 그것은 오히려 독이 되었으니까.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암울한 현실에 지쳐 다시 침대에 누워 기억과 의식을 잃고 쓰러지기를 기다렸다. 일기 따윈 쓰지 않았다. 다음에 눈을 뜨면 일기를 썼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그렇게 다시 어제로 돌아가 오늘을 살아야 한다.
지금까지 이 시간 속에서 벗어나기 위한 많은 시도를 해왔다. 의식을 잃기 전 최대한 많은 기록과 흔적을 남겨놓았지만, 다음에 기억을 잃고 눈을 뜨면 어디로 갔는지 찾은 적이 없다.
또한 쓰러지지 않기 위해 뜬눈으로 몇 날 밤을 버텨도 봤지만 피곤하고 과로한 몸은 어느새 잠시 눈꺼풀이 닫히면 의식을 잃었다. 그래서 그냥 이것들을 수긍하며 이 시간 속에서 살기로 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영원한 시간의 굴레였다. 세상이 어떻게 미쳐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두가 똑같은 일을 겪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삶은 부조리했다.
바꿀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마음가짐이었다. 그리하여 난 이 시간 속에서 버티기 위해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나는 더 이상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는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내 머리에 총을 쏘지 않는 한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늘 날짜를 외우며 셀 필요도 없었고, 예측하지 못한 커다란 사고에 놀랄 일도 없었다. 반복되는 이 모든 것들은 전부 알 수 없는 신의 시나리오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집으로 들어오니 익숙한 냄새가 풍겼다. 좋은 냄새가 아니었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독한 냄새는 아니었으나, 지금까지의 기억들이 녹아있는 냄새라는 것, 그 자체로 고약했다. 편안한 자세로 스스로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뜬다면 앤드루 경이 찾아와 내 누나의 사망 소식을 알려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내가 금발 머리를 쏘는 것까지 다시 반복되겠지.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이미 알고 있음에도 다른 변화를 줄 수 없었다.
시간이 반복될 때마다 하늘에 있는 구름의 모양과 내가 보는 앞에서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도 바뀐 것이 없었다. 금발 머리를 죽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난 어느 순간부터 구름에 이름을 지었다. 똑같은 시간 속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물론, 더 이상 색다른 하늘과 새로운 새들도 볼 수가 없다. 나는 미래도 없고 변함없는 고통만이 즐비한 이 굴레가 바로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지옥’일 것이라고 확신했다.
눈을 감아 잠에 빠져들기 전 여러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레이스와 금발 머리가 죽게 되는 사간이 무한히 반복되는 동안 나는 그것이 흐름대로 잘 흘러가게 하는 역할을 하는 셈이다.
결말이 정해져 있는 시나리오 속에서 죽을 때까지 그 소임을 수행하게 되겠지. 아니, 늙지도 않고 병들지도 않고, 심지어 금발 머리조차 끝내 날 죽이지 못했으니 영영 죽지도 않을 거다. 이 속에서 죽지 않는다는 것은 좋은 것이라 할 수가 없었다. 그것들은 나름 장점이라고 생각해온 것들인데 이 시간의 굴레에 대해 깊이 생각할수록 장점들은 전부 단점으로 바뀌었다. 깊은 한숨이 안 나올 수 없었다.
이윽고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잠들기도 전에 앤드루 경이 문을 두드렸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또 시작이군. 문을 열면 ‘다니엘, 안에 있는가?’라고 시작해서 킹스크로스역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에 관해 이야기하겠지. 어느새 익숙해져 버린 걸까. 이번엔 그냥 사과를 포기하고 앤드루 경을 무시할까? 아니면 다짜고짜 그 살인사건의 제삼자가 바로 나라고 털어놓을까? 킹스크로스역에서 장발을 만나면 발프 병원으로 가자고 하기 전에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기고 집으로 도망칠까? 아니다, 이번엔 장발을 만나면 발프 병원으로 따라가지 않고 반드시 그를 앤드루 경에게 데려가 사과를 무더기로 받고 끝을 내리라. 그것은 너무나 완벽한 계획이었다. 왜 진작 이렇게 하지 않은 거지? 어딘가 차질이…, 어?
아니, 방금 노크 소리는 앤드루 경이 아니다! 앤드루 경은 내가 기억을 잃은 후에만 찾아오기에 그가 날 찾아올 때면 난 그를 기억하지 못해야 정상이다. 몇 번이고 그를 다시 만나도 사건은 항상 똑같이 벌어져야 했다. 나는 여전히 앤드루 경을 기억하는 상태였다. 이것이 의미하는 건 단 하나.
나는 설마 하는 마음에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현관문으로 달려갔다. 지겹도록 반복됐던 이 시간에서 나올 수 있다는 희망이 앞섰다.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바닥에 웬 우편물이 있었다.
그것은 어느 연회의 초대장이었다.
코번트리 백작의 생일을 맞아 당신을 연회에 초대합니다.
1927년 10월 1일 목요일 오후 6시
런던 세인트 케이든 궁전 1층 연회장
-코번트리. E. T. 백작-
10월 1일. 10월 1일. 10월 1일…. 처음으로 맞이하는 10월이구나. 멈춰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문을 두드린 게 앤드루 경이 아니었다. 끊겨버린 굴레.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코번트리 백작의 생일파티는 무수히 반복되었고, 앞으로도 반복될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간을 맞이할 수 있는 하늘이 주신 기회였다. 망할 이 시간에서 나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시간이 지체되면 다시 의식을 잃을 것 같았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어딘가 불편했다. 초대장이 왜 여기로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코번트리 백작에 대해서 아는 건 하나도 없었다. 그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도 백작이라는 귀족에게 초대된 나라는 서민, 수십 번씩 같은 사람을 죽여 온 내가 화려한 연회에 초대되었다는 사실은 나를 기쁘게 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새로운 하루가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이. 수많은 시간 동안 감정을 잘 느끼지 않았던 내 마음속에 새로운 감정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시나리오에 차질이 생겼다. 굴레가 끊겼다. 새로운 시나리오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시곗바늘은 오전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
시간은 흐르고 흘러 초대장을 받은 날부터 며칠이 지났지만, 다행히 지금까지 다시 의식을 잃지는 않았다. 잠들면 그대로 의식을 잃는 것일까 두려워서 악으로 버티며 몇 날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하루 종일 세상이 어두웠다. 나는 아침이면 집으로 새어드는 햇빛이 눈 부셔 커튼을 꾹 닫고 생활했다. 커튼을 닫지 않으면 눈이 따가웠고, 앞이 잘 보이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어둠 속이 편해 나는 저녁이 되기를 기다렸다. 아침에 적응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은 나도 모르게 잠들고 말았다. 과로에 얼마나 찌들었을까, 벽에 기댄 채 버티다가 그대로 필름이 끊겨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의식을 잃지 않았다. 그대로 아침이 밝았다. 잠에서 깬 나는 처음으로 상쾌함을 느껴보았다. 문을 열고 거리로 나왔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이 풍요로운 거리는 장장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기피 해 온 아침과 같은 햇살이 맞는가. 오늘은 유난히 따뜻한 날이었다. 이 도시에도 아침이란 게 있었어. 드디어 나도 아침의 햇살이라는 것을 커튼 없이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무언가 허전했다. 거리에서 피비린내가 나지 않는 것에 어색함을 느끼는 것이었다. 비둘기들이 훨훨 날아다니고 거리에는 각자 자신만의 색을 가진 사람들이 북적였다. 검붉은색인 줄만 알았던 햇빛은 거리를 푸르고 샛노랗게 색칠했다. 사람들을 태우고 이동하는 교통 마차가 울퉁불퉁한 돌 도로에 덜컹거리고 여기저기서 하얗고 까만 개들이 저마다 뛰어다녔다. 길거리 연주자들의 색소폰은 꽤 괜찮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실 때 내 폐 속으로 들어오는 상쾌한 공기들은 내가 무한한 상상 속의 동화 속으로 와있는 것 같이 느끼게 했다. 수십 번씩 고통받아온 거리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기억을 전부 잃고 정신을 차린 뒤로 아침은 처음이었다. 아침을 경험해보지 못하였다. 오늘의 이 상쾌함은 내게 큰 의미였다. 이것은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커다란 상징이고, 기억을 전부 잃은 후로 처음 맞이하는 나의 아침이었다. 고로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삶은 오랜 시간 어둠으로 쌓여있었다.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조차 품기 어려운, 긴 터널과도 같은 고난의 연속. 그리고 어느 날, 나는 아침 햇살을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세상이 처음으로 내게 손을 내밀어준 것 같았다. 따스하고 부드러운 햇살이 얼굴을 감싸 안았다.
그 순간, 나는 인생에서 처음으로 진정한 평온과 행복이 무엇인지를 느꼈다. 내 눈에 비친 세상은 더 이상 어둡고 쓸쓸한 곳이 아니었다. 이곳엔 색채가 있었고, 생명이 있었으며, 희망이 있었다.
이 아침의 햇살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나는 이제야 비로소 정말 일상다운 일상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느꼈다. 어둠을 지나온 나의 삶이 있었기에, 이 햇살의 따스함이 더욱 강렬하게 다가왔다. 마음은 이제 자유로웠다. 어쩌면, 진정한 행복은 이렇게 어둠을 겪은 뒤에야 그 가치를 알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날은 연회 당일이었다. 10월 아침이 밝았다.
벽에 붙어있는 작은 문을 열자 작은 옷방이 나왔다. 옷은 그리 많지 않았다. 초라한 옷들을 보고 있자니 장발 생각이 났다. 늘어진 천과 어두운 무언가로 얼룩진 옷뿐이었다. 그 얼룩은 마치 피가 튄 무늬 같았다. 내가 입을만한 건 오른쪽 벽에 걸려있는 흰색 셔츠와 까만 바지뿐이었다. 그마저도 케케묵은 천 쪼가리들이라 연회에 입고 가기에는 너무 추레했으나,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바지를 입고 주머니에 손을 넣자 잔뜩 구겨진 종이가 만져졌다. 적어도 몇 개월은 그 바지 주머니 속에서 방치된 것만 같은 상태였다. 종이의 가장자리는 이미 손상될 대로 손상되었으나, 그 내용은 꽤 흥미로웠다. 나는 손으로 꾹꾹 편 종이를 읽어 내려갔다.
다니엘, 잘 지내고 있어? 소식을 전혀 전해 들을 수 없어, 어떻게 사는지 도통 알 수가 없네. 여기는 좀 어수선해. 며칠 전에 공장주가 죽어서 공장이 이제 문을 닫거든. 그 사실 말고는 공개된 게 없어. 좀 충격적이지만 어쩌겠어.
내일이면 드디어 만날 수 있어 좋다. 돈은 내가 열심히 벌어놨어. 오랜만에 보려니 하는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야. 오늘 저녁에 바로 도버로 출발할게. 안녕.
1924년 3월 17일. 이사벨.
어느 여자의 편지였다. 편지는 ‘기억의 날’ 3년 전인 1924년에 쓰인 것이었다. 발신자는 다니엘, 즉 장발인데 이게 왜 여기에 있는지가 의문이었다. 이곳에는 너무나 많은 그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다니엘은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도망쳐서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걸까?
나는 이사벨의 편지에서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속이 더부룩했다. 세월의 무게를 한꺼번에 느낀 듯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왜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지러웠고, 나는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연회의 초대장은 내가 아닌 장발에게 온 것이었다. 이 연회에 내가 대신 가도 그리 문제가 되진 않을 것이었다.
이사벨의 편지는 고이 접어 작업실 서랍에 넣었다. 지저분한 머리카락은 단정하게 묶었고, 먼지 쌓인 신발을 닦았다. 내가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나를 꾸몄더니 전과 같지 않은 새사람이 되어있었다. 다니엘의 옷은 다행히 나와 꼭 맞았다.
앞으로 있을 모든 것들이 기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