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실 6

[Chapter 2 : 고착] - 2

by Chris Paik 백결

[6/15]


얼굴에는 마음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얼굴만 봐도 그 사람의 감정 상태를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시내를 거니는 수많은 사람 중 대충 깎아 형태만 겨우 잡힌 석고 조각상보다 더 무뚝뚝한 표정으로 숨만 껄떡거리는 사람이 있다면, 높은 확률로 나다. 언젠가부터 호흡에 몰두하는 괴상한 취미 아닌 취미가 생겨버렸다. 하늘에 흩뿌려진 산소를 내가 먹어버림으로써 억지로 공동체 의식을 느끼려는 짓거리였지만, 고작 해봐야 깊게 숨을 들이마시는 자연스러운 행위에 대한 쓸데없는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 뿐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게 유익했다.


거리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아침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거리에 나온 사람들의 이목을 단번에 잡아버렸다. 나는 그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갔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혈투를 벌이는 두 노인의 교양 없는 말다툼은 점점 커졌다. 듣자 하니 할머니의 고양이가 할아버지의 꽃밭을 망쳤다는 사소한 일이 그 원인이었다. 난 그들이 싸우는 꼴을 보고는 이참에 평소 축적해온 스트레스를 한 번에 풀려는 속내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다. 잔뜩 해어진 누런 면티를 걸친 털보 할아버지의 언행은 그리 따뜻하지 않았다.


사건을 일으킨 고양이는 화단에 다소곳이 앉아 쩍쩍 하품을 하며 앉아있었고, 그 조그마한 주둥이는 흙범벅이 되어있었다. 고양이는 구경꾼들을 한 번 둘러보더니 이내 일어나 기지개를 켜고 담장을 넘어가 버렸다. 난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나는 말싸움에 혈안이 되어있는 할머니가 언제쯤 자기 고양이가 사라진 걸 눈치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아마 미치고 팔짝 뛰며 동네방네를 전부 뒤지겠지. 만약 그녀가 그런 걸 신경 쓰지 않는 사람이라면 하는 수 없겠지만, 지금까지 경험에 빗대어 보면 대체로 나이 든 할머니들은 약한 것들을 사랑하고 보호하며 지나치게 감정적인 탓에 쉽게 욱하는 특징이 있다. 아, 그것은 선입견이었다. 그것은 내 본능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누가 그런지, 특별한 대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갑자기 기분이 이상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 말을 걸었다.


“저 할머니의 고양이가 담장 너머로 가버렸어요.”


“저도 압니다.”


“할머니가 언제 알게 될까요?”


“5분 정도 걸릴 겁니다.”


“내기하실래요? 저는 3분으로 하겠습니다.” 그가 모자를 고쳐 쓰며 말했다. “3펜스씩 거는 걸로 할까요.”


“예?”


“3펜스 있으세요?” 그가 물었다.


“지금 가진 돈이 한 푼도 없습니다.”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그런데 저 할머니 흥분한 모습을 보자니 고양이가 사라진 걸 저녁이 되어서야 알게 될 것 같군요.” 내가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할머니는 자기 고양이에는 관심도 없었으며, 자기 고양이가 그런 게 아니라며 할아버지에게 쌍욕을 퍼붓고는 집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3펜스를 걸고 내기를 제안한 남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세인트 케이든 연회로 향하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입구로 들어섰을 땐 웅장한 건물에 압도된다고 느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했다. 한 시간 정도 걸어왔기에 나는 지쳐있었다. 그래도 들뜬 몸은 한 시간의 도보를 거뜬히 버텨냈다. 세인트 케이든 궁의 내부에서는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을 일찍부터 받아주었고, 나도 그곳에서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지친 몸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서는 화려하게 차려입은 시종들이 손님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했고, 거대한 문을 따라 들어간 궁의 내부는 정말 아름다웠다. 높은 천장과 밝은 조명들이 웅장함을 자아냈고, 밖으로 비치는 궁 외부의 공원들은 나의 마음을 움직일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저, 지금까지 이런 것들을 본 기억이 없어서였을까,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지는 모든 것이 신세계였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온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손님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곳으로 들어갔다. 고급스러운 참나무 바닥이 부드러운 왁스로 닦여 반짝거렸다. 식탁보들이 줄지어 있는 식탁에는 거대한 접시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접시는 크고 번들거렸다. 눈부신 샹들리에 아래로 수많은 사람이 바글거렸다. 남자들은 까맣고 반짝이는 턱시도를, 여성들은 실크와 새틴으로 만들어진 드레스를 입고, 목과 손목, 귀에 치장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와 진주를 과시했다. 화려하고 단정한 사람들 사이에서 기껏 고른 내 흰 셔츠가 저렴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유독 나를 많이 쳐다보았는데 나는 그 눈빛 속에 든 의미를 대충 유추할 수 있었다. 나는 그들을 애써 무시했다.


무거운 빨간 벨벳 커튼이 바람을 타고 흔들릴 때마다 비치는 풍경은 어딘가 익숙했다.


나는 빈 의자에 앉아 천천히 심호흡했다. 잔잔한 클래식이 나오는 거대한 연회장. 사람들 웅성거리는 소리와 오케스트라의 합주가 뭉개져서 들렸다. 너무나 웅장했기에 되려 부담감이 들었다.


그 뒤로는 따분한 시간만 흘렀다.


“신사 숙녀 여러분, 와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오늘 실컷 즐기고 가주십시오!” 일곱 시가 되자, 어디선가 연회장으로 들어온 수염이 매력적인 남자의 큰 목소리가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그의 목소리는 넓은 연회장 내부에 전부 울려 퍼질 정도로 우렁찼다. 많은 사람이 환호하며 연회장은 상당히 시끄러워졌다. 물론 그 환호 소리는 곧 잦아들긴 했지만, 3분이라도 더 지속됐다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었다. 정장을 차려입은 시종들이 양팔 가득 커다란 쟁반을 올려놓고 줄지어 나와 식탁 위에 푸짐한 음식들을 올렸다. 처음 보는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들은 윤기가 흘렀다. 초콜릿과 시럽으로 범벅된 케이크의 맛은 상당했으나 너무 단 탓에, 자극이 익숙하지 않던 내겐 버거울 뿐이었다.


거대한 창밖은 어두워졌기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기억의 날’과 다를 것이 없는 하늘이었는데, 오늘따라 밤하늘과 그곳을 수놓는 별들이 그때와 다르게 아름다웠다. 눈에 띄는 색감으로 군데군데를 장식하는 구름은 예술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서로 담소를 나누며 음식을 즐겼지만, 나는 아는 사람이 없어 조용히 앉아 먹기만 했다. 소음에 익숙해지자 이 분위기 자체를 상당히 즐겼다. 굳이 이야기를 나눌 사람은 필요 없었다.


한참 분위기에 취해 혼자 낭만적인 시간을 누리고 있었다. 술만 마시면 얼굴이 후끈 달아오르고 빨개지는 걸 보고 내가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이란 걸 깨달은 지는 몇 분이 채 안 되었다. 때문에. 와인 잔에 담은 포도 주스로 그 기분을 흉내 내어볼 뿐이었다.


혼자 하나의 패턴을 반복했다. 제공된 스콘을 아주 조금 떠먹고, 포도 주스를 와인이라 생각하며 마신다. 그리고 우아한 연회장의 향기를 한껏 들이킨다. 그리고 생각한다. ‘내가 이곳에 있다.’


스콘을 떼어 입에 넣고, 포도 주스를 들이켜고, 냄새를 맡고, ‘내가 이곳에 있다.’…. 스콘을 떼어 입에 넣고, 포도 주스를 들이켜고….


“뭐 하세요?”


눈을 들자 어느 여자가 내 손에 있는 와인 잔을 가리키고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으나, 그녀는 내게 잔뜩 화가 난 듯 보였다.


“예?”


그녀는 말없이 다가와 내 손에 쥔 와인 잔을 확 낚아채 갔다. 얼떨떨한 내 앞에는 보란 듯이 포도 주스가 반쯤 차 있는 잔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맙소사, 내가 무의식적으로 가까이 있는 남의 잔을 든 모양이다.


“죄송합니다.”


잔을 내려놓았지만, 속으로는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보다 잔에 든 와인을 마셨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섰다. 벌써 저 잔을 몇 번이고 입에 가져다 대었는데.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 뒤였다. 그녀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계속 내 주변을 서성이며 한마디씩 뱉어내는 욕설을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연회에 함께 온 그녀의 친구들로 보이는 다른 여자 네 명이 추가로 몰려와 나를 쏘아붙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치욕스러웠다. 알 수 없는 충동이 들었으나. 그것은 옳은 충동이 아니었다. 키도 작고 덩치도 작아서 그때 그 금발 머리와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그들…!


“아이고!”


그때, 누군가 달려왔다.


“아이고! 레슬리 공…, 오랜만입니다!” 연회장의 황금빛 빛을 온몸으로 받아내며 우아하게 달려온 여인의 농염한 목소리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찌하여 이 친구들과 같이 있는 거죠?”


알 수 없는 신비한 아우라를 내뿜으며 등장한 그녀에게서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압도감을 느꼈다. 사람들은 이것을 매력이라 불렀던가? 마음이 차분해졌다. 나는 자세를 고쳐 앉고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무슨 일인데?” 급히 뛰어오느라 흩날리는 잔머리가 조그마한 얼굴을 가로지르는 장밋빛 그녀는 숨을 가다듬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더러운 언행으로 하찮은 인간성을 단박에 드러내 버린 여자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곧 그녀는 내게로 시선을 옮겼다.


“혹시 이 친구들이 불편하게 한 것인가요?”


나는 말이 없었다.


“…레슬리 공?” 그녀가 말을 이었다.


엥?


레슬리 공은 또 뭔가?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에다가 나는 남작도 아니었다. 나는 이 복잡한 상황을 이해하려고 했으나, 소란스러운 연회장 분위기에 휩쓸려 어지러운 머릿속을 끝내 정리하지 못했다.


와인 잔을 든 여자들은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는 여전히 어안이 벙벙했다. 기억을 잃으니까 새로이 듣는 모든 말들이 의문투성이다.


그녀는 내 옆에 앉았다.


“레슬리 공?” 그녀가 나를 부르며 말했다.


“저 말입니까?”


“네.”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다급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여쭤볼 게 있어서요.”


나는 그녀가 다시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네?”


“당신 레슬리 공 아니잖아요.”


알 수 없는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녀는 버릇없는 자기 제자들을 쫓아내기 위해 대충 둘러댔다고 했다. 그리고 레슬리는 본인이 어렸을 때 키웠던 개 이름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그녀는 자신을 로즈메리 에필리아, 조향사라고 소개했다.


“조향사에게 시종이 있나요?.”


“아, 아까 그 친구들은 시종이 아니라 제 제자들이랍니다. 인성교육을 배제했더니 저러네요.”


로즈와 오랫동안 눈이 마주쳤다.


“다니엘입니다.”


“얼굴이 너무 빨개요.”


“예?”


나는 내 얼굴에 손을 살짝 갖다 대었다. 정말로 얼굴이 뜨거웠고 심장이 빨리 뛰었다. 아까 그 여자의 잔을 실수로 마셨을 때, 그 잔에 들어있던 진짜 와인을 들이켰다는 것이 생각났다.


“제 몸이 와인을 거부하네요. 아까 마셨나 봐요.”


“아, 진짜요? 와인을 못 마시세요?” 로즈가 탄식했다. “안타깝네요. 몸이 술을 받아주지 못하다니.”


그리고 그녀는 살짝 웃었다. 그녀는 자긴 술 없인 못 사는 애주가라고 밝혔다.


로즈는 금빛 반묶음 머리가 잘 어울렸다. 도도하고 상냥한 그녀의 이미지와 상반되면서도 어울리는 교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녀 또한 나름 코번트리 백작과 친분이 있기에 연회에 초대된 것이라고 말했다. 직위가 높은 그의 집무실 양키 캔들의 향을 직접 조향했던 경력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젊은 나이에 제자들까지 거느리는 로즈가 혼자 나와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 같았다. 지금까지 연회장에서 나와 로즈를 지나치며 인사를 건넨 사람만 다섯 명이 넘었다.


나는 그 이후로 로즈와 담소를 나눴다. 말동무가 많았을 그녀였지만 웬일인지 나와 대화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듯했다.


“아직도 얼굴이 빨개요.”


“독한 술이었나 봅니다.”


“지금 제공되는 것들은 대게 입가심용일 텐데요.”


그리고 민망한 침묵.


저 멀리서 희고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남자, 코번트리 백작이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는 와인 두 잔을 들고 우리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코번트리 백작은 황금빛 풍미를 한껏 품고 있었다. 그의 콧수염은 굽은 모양으로 그의 입가에 미소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로즈는 걸어오는 코번트리 백작을 보면서 넓은 정원과 화려한 실내 장식으로 반짝이는 그의 세인트 케이든 궁전은 런던 사교계의 중심지라는 설명을 했다. 백작은 이곳에서 자주 사교 모임을 개최하여 문화와 예술에 관한 토론을 즐긴다는 것이었다.


“안녕들 하신가. 오랜만일세, 로즈.” 그는 밝게 웃으며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로즈도 그의 인사에 미소로 받아쳤다.


“오랜만일세, 다니엘.” 코번트리 백작이 내게 인사했다.


“예.”


“자네의 그 모습도 나쁘지 않군.” 코번트리 백작이 반갑다는 말투로 흥얼거렸다. “이 잔을 들게. 최고급 와인으로 준비했소.”


코번트리 백작이 들고 온 와인 한 잔을 건넸다. 나는 그가 내 이름을 알고 있다는 사실(진짜 내 이름이 아니긴 하지만)에 기뻤다. 청량한 보랏빛 액체가 작은 잔 속에서 고요하게 출렁댔다. 내게는 그저 얼굴을 빨갛게 만드는 액체였지만.


“저는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엥, 그럴 리가. 자네는 이 동네 최고의 주량을 자랑하던 애주가이지 않았소?”


“아, 그랬습니까?”


연회장의 들뜬 분위기는 코번트리 백작이 건넨 술을 거부하기엔 너무 시끄러웠다. 준비한 술을 거절하면 백작이 서운해할 것이 뻔했기에 난 내가 애주가였다는 말을 믿고 술을 마시기 위해 잔을 입에 갖다 대는 시늉을 하며 심한 내적 갈등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때 코번트리 백작의 등장으로 인파가 모여들었다. 나는 북적이는 사람들에 치여 넘어질까 봐 중심을 잡으려고 온 신경을 기울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무나 나를 세게 밀어주기를 바랐다. 왼손에 세 손가락으로 겨우 잡은 와인 잔 준비. 숨을 크게 들이마셔 몸집을 최대한 부풀리고 허리를 굽혀 등을 부풀렸다. 끝내 인파 속에서 누군가와 부딪힌 그때, 나는 자연스럽게 와인 잔을 바닥으로 던졌다. 아, 누군가 날 밀치는 바람에 와인 잔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빠른 순발력으로 피해서 와인이 옷에 묻지는 않았지만, 와인 잔은 보기 좋게 박살 났고, 최고급 와인은 전부 바닥에 엎질러져 버렸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로즈는 경악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코번트리 백작은 탄식했다. 시종들이 몰려왔다. 사람들의 시선이 전부 이곳으로 쏠려, 난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코번트리 백작은 화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몇 초간 석고상처럼 그의 표정이 굳어버려 무슨 감정을 느끼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잠시 후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기계적인 웃음이었으나, 난 그와 똑같이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가 다시 와인을 권하기 전에 자리를 피해 도망쳤다.


클래식이 흘러나오는 연회장에서 혼자 식탁에 앉아있을 때였다. 오이 샌드위치는 오이가 들어간 것 치곤 맛이 괜찮았다. 창밖에 있는 밤하늘을 보자 그레이스와 조지가 떠올랐다. 같이 보낸 즐거운 기억은 없었지만 그래도 함께한 시간은 있었다고, 그 고통스러운 시간이 다시 생각났다. 치유가 필요했다. 연회장에 오면서 나는 거리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보았다. 아이들은 총 네 명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부러워했다. 아이들은 뛰어놀고 있었으니까. 개 한 마리도 있었다. 다섯이 어울리는 모습은 그림의 풍경과 같았다. 아이들에게 눈을 떼지 못하면서도 난 내 과거를 떠올렸다. 기억을 잃고 깨어나자마자 만난 사람은 경찰이었다. 그리고 처음 들은 이야기는 살인사건. 그렇게 내 눈앞에서만 세 명이 죽고 결국은 총으로 누군가를 쏴야 했다. 아이들과 대비되는 모습에, 난 눈물을 흘렸다. 연회는 분명 아름답겠지, 이전과는 다른 아름다운 일이 펼쳐지리라, 기대를 잔뜩 품은 채 이 연회에 온 것이었다.


눈을 조금 돌리자 어떤 사람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녀도 나와 같이 오이 샌드위치를 먹던 중이었다. 그녀는 나를 보자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고, 내 쪽으로 다가와 내 옆에 앉았다.


“하하, 우리 똑같아요.”


“예?”


“한 손에는 오이 샌드위치.” 그녀가 말했다. “말고 주변엔 아무도 없네요.”


“그렇군요.” 나는 투박하게 답했다.


그녀는 본인을 서리라고 부르라고 했다. 새까만 단발머리가 인상적이었다. 이 근방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머리 스타일은 아니었기에 신비로운 느낌을 물씬 풍기는 듯했다.


“우리가 똑같아요? 부인은 무엇을 하고 있었죠?”


“이것을 음미했죠.”


“그럼 똑같지 않네요. 저는 악몽을 되새기고 있었습니다.”


“아, 안 돼. 그런 건 하지 말아요.” 서리 부인이 불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괜찮습니다. 이거 말고는 머릿속에 든 게 없어서 그럽니다.”


서리 부인은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머릿속에 든 게 없다는 말을 멍청하다고 오해한 듯했다.


“남들처럼 아름다운 추억에 젖어보고 싶다는 뜻입니다. 이를테면 뛰어노는 아이들.”


“악몽을 되새기지 말라는 게 아니라, 옛날 일을 회상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좋았든, 싫었든.”


“부인은 그런 게 없으신가요?” 내가 물었다. “이때까지 기억이 통째로 지워지지는 않으셨을 텐데요.”


그녀는 내 질문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전부 잊었어요.” 서리 부인이 답했다. “자의였어요.”


“이해가 안 되네요.” 내가 말했다. “저는 자의가 아니었습니다.”


“당신에게 아주 행복했던 시절이 있었다고 해봅시다. 좋은 친구, 화목한 가족, 따뜻한 연인, 완벽한 환경…. 그렇지만 전부 옛날이야기죠. 지금은 지나가 버린.”


“있다고 치죠.”


“눈을 감으세요.”


서리 부인은 일단 눈을 감으라고 재촉했다. 그리고는, 옛날 일을 추억해 보라고 했다. 난 그녀의 말을 따랐다. 물론 추억할 과거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연회장으로 오면서 보았던 동네 아이들이 새파랗게 어린 나와 내 친구들이라고 상상했다. 나를 포함한 네 명의 어린아이. 머릿속엔 하나의 그림이 그려졌다.


“기분이 어때요?” 그녀가 물었다.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내가 답했다. “그런데 지금 삶보단 훨씬 나은 것 같네요. 적어도 리볼버 총구가 이마에 향하진 않았을 테니까요.”


“그때로 돌아가고 싶나요?” 그녀가 또 물었다.


“그런 것 같아요.” 내가 답했다.


“그런데 돌아갈 수 있나요?” 서리 부인의 세 번째 질문은 이전보다 차가웠다.


“예?”


“그때로 돌아갈 수 있나요?”


“아뇨.”


“지금 회상을 그만두면 당신에게 남는 게 있나요?”


“아뇨.”


“더 이상 말할 게 없죠?” 서리 부인이 오이 샌드위치를 내려놓았다. “저는 추억이 없냐고요? 그건 아니지만 추억은 따뜻함만을 전해줄 것 같이 다가와 쓰라린 아픔과 그리움을 전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떠나요.”


“옛날을 그리워해봤자 남는 게 없다는 걸 알게 되셨군요.”


“그뿐인가요. 오히려 서글픈 그리움과 가시지 않는 미련뿐이에요.” 서리 부인이 대답했다. “오히려 독이 된다고요.”


“안 좋은 기억뿐이었습니까?”


서리 부인이 샌드위치를 마지막으로 베어 물었다.


“아뇨, 그때는 좋았죠.”


“예?”


“안 좋은 기억뿐인 건 아니라고요. 그것을 회상하며 의미 없게 시간을 흘리는 모습에 환멸을 느꼈던 거죠.”


“하긴 추억 자체가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 속에서 행복을 찾는데, 실재하지 않는 것일 뿐이고, 되려 더 비참해질 뿐이죠. 그때 그 시절이 다시 돌아올 것이라 굳게 믿고는 잔뜩 부풀려진 기대 속에서 실실 웃는 거죠.” 서리 부인이 점점 차가워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하염없이 기다리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고서야 돌아오지 않음을 깨달아요. 그리고는, 더 이상 그것의 의미를 땅끝까지 추락시켜 버리거나 마음을 위로해 줄 것들을 찾아 헤맵니다. 대게 그런 것들은 좋게 쳐봐야 술이나 담배죠. 지금까지 제가 만난 사람들은 전부 그랬고요. 제가 잘 알아요.”


“신조가 분명하시군요.”


“행복하고 싶으시다면, 뒤를 보지 말고 앞으로 가는 게 어떤가요. 추억은 마음속 감정을 건드리며 행복을 준다고 포장되어있어요.”


그녀도 ‘추억’의 의미를 밑바닥까지 추락시킨 사람인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크게 상처받았거나. 어쩌면 이렇게 마무리된 것이 그녀가 말한 후자의 상황보다 훨씬 나았으리라.


하지만 서리 부인은 그런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는 내내 어울리지 않는 미소를 지었다. 어쩌면 서리 부인에게 추억이란 것이 부정적인 개념인 것은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잊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 괴롭다면, 딱 2년만 버티는 거예요. 달라진 환경에 적응하여 추억을 회상해도 슬프지 않을 때가 되면, 그때 다시 기억을 조심스레 꺼내 마음껏 취해요. 슬픔에 잠겨 눈물 흘릴 일이 없죠.” 서리 부인이 말했다. “대신 그림의 떡이라는 사실을 머리에 박아 두셔야 해요. 일종의 망상이죠.”


“왜 하필 2년이죠?”


“무작정 때를 기다린다면 그건 너무 무지막지하잖아요. 2년이면 충분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어요. 하지만 저는 현실을 알고 현재와 미래를 사는 편이죠.”


서리 부인에게선 상냥한 얼굴로 부정적인 이야기를 한다는 이질감과 그런데도 어딘가 친근한 느낌이 공존했다. 서리 부인은 말과 생각이 과격한 부분은 있어도, 내면 자체는 부드러운 사람인 듯했다.


“다니엘이라고 합니다.”


이곳은 다니엘의 신원으로 온 것이기 때문에 나를 다니엘이라고 소개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언제까지 이름을 속여야 할지 몰라 답답함이 몰려왔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사는군요.”


서리 부인은 뒤이어 자신은 현재 스톤헨지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난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은 흘러 연회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갔다. 나는 코번트리 백작의 부름에 야외 발코니로 나갔다. 그곳에선 그가 밖을 내려다보며 점잖게 서 있었다. 적당히 어두운 밤하늘과 적당히 서늘한 바람은 딱 좋았다. 그가 나를 한 번 보더니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 잘 지냈는가? 오랜만에 보니 좋군.”


코번트리 백작은 쇼트브레드를 한 접시 채로 들고 와 커다란 난간 위에 올려두었다. 그의 말과 태도에 유추해보건대, 난 기억을 잃기 전 그와 분명히 알고 지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의 기억상실 사실을 알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나른한 목소리로 내게 연회를 잘 즐기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나에 대해 무언가 아는 게 있어 보였다.


“백작님, 혹시 저희가 전에 어떤 사이였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게 무슨 말이오? 아주 각별한 사이였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인가?”


“그게 아니라 사실 예전이 잘 기억나지 않아서 말입니다.”


“하하, 그것참 서운하군.”(코번트리 백작의 방금 웃음은 좀 어색했다)


그의 반응은 예상한 대로였다.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소. …오래되긴 했지. 예전부터 나는 자네 시계방의 단골손님이었소. 8년쯤 되었으려나.” 코번트리 백작이 쇼트브레드를 내려놓았다. “귀족이 서민의 시계방을 찾아간다는 것 자체가 특이한 경우였지. 시선은 그리 좋지 않았으나, 난 계속 자네 시계방을 찾았네. 자네 실력이 최고였거든.”


“8년 전이요?”


“지금도 내 집무실에 자네에게서 산 회중시계가 많이 보관되어 있네. 오랜 시간 동안 잘 썼소. 뭐, 그렇게 우리는 친해졌지. 한때는 둘도 없는 친구였네.” 코번트리 백작이 말했다.


백작은 곧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손목시계를 꺼냈다. 그는 매우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시계를 다뤘다. 마치 잘못 만지면 터져버릴 것 같이.


“자네가 처음으로 만든 손목시계일세. 이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해오고 있었네.”


“아, 그 정도입니까?”


“자네가 만든 시계인데 한번 착용해 보게나. 안타깝게도 작동은 하지 않는다네.”


그의 손에는 나의 첫 작품이라 하는 작은 손목시계가 들려있었다. 굳건히 멈춘 시곗바늘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죽으로 만들어진 시곗줄은 군데군데 벗겨져서 낡은 티를 냈고, 빛나는 금속으로 만든 다이얼은 방금 닦았는지 반질반질 윤이 흘렀다. 그래도 작은 유리에는 약간의 흠집이 난 자국이 보였다. 그는 거듭 손수건으로 반짝이는 유리를 닦으며 내부를 자세히 보여주었다. 시계는 정교했다.


“착용해 보겠나?”


“예.”


코번트리 백작이 그 시계를 내 손목에 갖다 대려고 했을 때, 어디선가 다급하게 달려온 시종 한 명이 소리쳐 그를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가 얼마나 컸던지 나는 깜짝 놀라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코번트리 백작도 놀라 하마터면 시계를 떨어뜨릴 뻔했지만, 그는 노련한 순발력으로 다시 시계를 낚아챘다. 백작이 짧은 비명을 질렀다. 놓친 시계를 다시 잡는 과정에서 시계의 어딘가 날카로운 부분에 긁혔는지, 백작의 왼쪽 손등에서 피가 조금 튀었다. 그는 인상을 찌푸리며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쌌다.


이내 우리 둘의 이목이 그 시종에게 집중됐다.


“백작님! 정원에서 사람이 죽었습니다!”


코번트리 백작은 다급하게 정원으로 뛰어갔다. 나는 그들을 뒤쫓았다.

정원에는 시종 한 명이 처참하게 죽어있었고 다른 시종 대여섯 명이 그 주위에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오? 살인인가?”


“시신에 외상은 전혀 없어 보입니다. 지금까지는 심장질환으로 보고 있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나머지 시종들이 또 다른 시신은 없는지 정원 전부를 순찰하고 있습니다.”


“사무장은 어디서 뭘 하는 게지?”


“연회장에서 테러의 기미가 보인다며 조사를 나섰습니다. 관리인도 함께요.” 시종들이 일제히 답했다.


“일단 병원으로 보내고 부검부터 해보게.” 코번트리 백작이 지시했다.


모두가 정신없던 와중, 몇몇 시종들은 나를 보고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난 눈치를 봐야 했다. 뒤편에서는 외부인의 정원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코번트리 백작도 그 사이에서 어색한 기류를 눈치채고는 나를 끌고 연회장 안으로 다시 뛰어 들어왔다.


“연회를 계속하실 겁니까?” 내가 물었다.


“여기 온 많은 사람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소.”


“사람이 죽었는데요?”


“나도 아네.” 그는 서둘러 나를 연회장 깊숙한 곳으로 데려가 많은 인파 속에 섞어 넣었다. “방금 일은 부디 잊어주시게. 내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조용히 연회를 즐기고 가주시게. 괜히 입소문을 타서 연회 분위기가 망쳐지는 게 싫네. 이건 내 생일 파티고 자넨 그저 초대받은 손님일세. 파티를 망쳐서야 하겠는가.”


코번트리 백작은 다시 바깥으로 뛰어갔다. 사람이 죽었는데 연회를 계속하려는 모습이 그가 지금까지 비쳐왔던 친절한 모습과 대비되며 다른 사람 같다는 느낌이 들게 하였다. 이 많은 사람이 알게 되면 어떻게 될까. 그의 손에 이끌려 연회장으로 들어가면서 봤던, 시신을 옮기는 시종들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나타난 로즈가 아무것도 모른 채 나를 연회장 한가운데로 데려갔다. 나는 그녀에게 사람이 죽었다고 차마 말을 할 수 없었고, 사건의 뒤처리는 코번트리 백작과 시종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내 역할은 그의 말대로 이 사실이 다른 손님들에게 전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아니지, 여기서 내 역할은 없다. 오지랖 부리지 말고 연회나 즐기다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시종 한 명이 죽었다는 것을 본 손님은 나뿐이니까, 내가 말하지 않으면 모두가 모를 것이었다.


로즈가 나를 데려간 곳에서는 처음 보는 남자가 기타를 연주하며 흥얼거리고 있었다.


“누구예요?”


“그냥 좀 자유분방한…” 로즈가 답했다.


나는 곧 이 와중에도 그가 열심히 부르고 있는 노래에 귀를 기울였다.


“자기 말로는 예술가라는데.”


“예상은 했습니다.”


결국 심야는 오는 법인 걸까요

아프지만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아름다웠던 그 얼굴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불기둥 아래에서 마주한 태양조차

밤이 되어 사라지고 없습니다

앞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이곳에

남은 것은 제 몸 하나 빼고 없습니다


로즈가 그의 노래에 박수를 보냈고, 나도 눈치를 보며 손뼉을 쳤다.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는 가사는 잘 모르겠어도 음률 하나만큼은 상당히 매력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느끼하네요.” 로즈에게 속삭였다.


“낯간지러운 사랑과 이별한 거죠.”


로즈도 내게만 들릴 정도로 속삭였다. 그리고 키득거렸다.

자신의 이름을 빈트라고 소개한 그 싱어송라이터는 긍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의 옷차림은 개성이 넘쳤다. 전통적인 서민의 복장과는 다르게, 빈트 씨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창조한 듯 보였다. 화려한 실크 셔츠에 벨벳 조끼를 입은 그의 모습에서 난 알 수 없는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는 행복한 모습이었다. 은연중에 나 자신과 비교되는 것이었다. 빈트 씨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고는 다른 곡을 또 부르려다가 시종들에 의해 도망치듯 쫓겨났다.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저마다 웃음을 터뜨렸다.


“무단출입이었어.” 로즈가 어깨를 부여잡고 작게 웃었다.


우리는 식탁에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눈앞에는 음식들이 가득했지만 이미 너무 많이 먹은 탓에 더 이상 먹고 싶지는 않았다. 로즈는 어색하지 않은 분위기를 잘 띄워냈다. 누군가와 옹기종기 모여 있으니 알 수 없는 유대감이 형성된 것 같았다. 사실상 처음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아무런 대가나 목표가 없는 순수한 친밀감이라고나 할까.


로즈는 자세를 고쳐 앉고 후식으로 나온 진저브레드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저 멀리서 오이 샌드위치를 베어 무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어떻게 샌드위치에 오이를 넣어 먹을 수가 있죠?” 로즈가 목소리를 죽이고 말했다.


“그러게요, 오이는 먹을 게 못 되는데.”


나는 그녀의 말에 동조했다. 왠지 서리 부인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로즈가 키득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다니엘 씨는 여기에 어떻게 오셨어요?”


“모릅니다.”


말 한마디로 순식간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나는 급하게 초대장을 받고 왔다고 덧붙였지만, 그것은 오히려 역효과를 내었다. 나는 무안한 마음에 까망베르 치즈를 더 가져오겠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즈는 괜찮으니까 다시 앉으라고 했다.


무언가 머릿속에 가득 찬다면 헛것이 보인다지. 연회장 중앙으로 가는 길에 흰 아우라가 흘렀다. 침울한 시각효과. 보기만 해도 텁텁한 이것은 뭔가가… 비정상적이었다. 바닥이 갑자기 뿌연 연기로 가득 찼다. 알 수 없는 가스는 연회장 중앙으로 점점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그때에야 비로소 나는 점점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곧 사람들도 연회장에 옅게 드리우는 연기를 발견했다.


그 짧은 순간, 두 발의 총성.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바람을 가로지르는 총소리에 심한 이명과 함께 귀가 잠시 멎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큰 소리였다.


한 번의 총성이 또 울렸다. 누가 어디서 누구를 쏘는 것인지 조금도 파악되지 않은 채, 놀란 사람들은 식탁 밑으로 숨거나 황급히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클래식과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던 연회장 내부는 몇 번의 총성으로 비명과 황급한 발소리만이 들리는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는 데에는 조금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이런 곳에서마저 비극이 또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총소리가 한번 날 때마다 커다란 샹들리에는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고, 그렇게 세 개의 샹들리에가 박살 나자 잠시 잠잠해진 듯싶었다.


날카롭게 바람을 가르는 소리 뒤로 총알이 바닥에 박혔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꺼진 샹들리에와 흩날리는 먼지들로 인해 시야 또한 가려졌다. 나는 대피하기보단 인파 속에서 놓친 로즈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녀를 찾기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윽고, 마지막 두 번의 총성이 추가로 들렸고, 난장판이 된 상황 속에서 로즈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한 발은 벽에 박혀 날카롭고 둔탁한 소리가 났다. 그다음은 사람이 맞는 소리였다. 비명이 짧게 들렸다.


누군가의 이름을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속에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섞여 있었다. 불안과 슬픔 따위. 그러나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를 그만두었다. 인파에 치이고 치이다 로즈를 발견했다. 나는 로즈에게 달려갔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바닥은 피로 흥건했다. 로즈가 비명을 지르자 난 곧바로 그녀를 살폈다. 총상은 보이지 않았다.


난 굳어버린 로즈를 데리고 식탁 밑으로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연회장은 비명으로 가득 찼다. 로즈의 눈을 바라보았다. 초점 없는 눈에는 생기까지 없었다. 그저 허탈한 표정으로 상황이 나아지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모든 일은 첫 번째 발포 소리가 들린 뒤 삼십 초 안에 일어났다. 연회장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더 이상 총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잠잠해진 분위기에서 대조되는 비명이 선명했다. 불안해졌다. 식탁 밑으로 하얀 가스가 계속해서 들어왔다. 따가웠다. 눈에서 눈물이 나오고 목 깊숙한 곳이 타들어 갔다. 우리는 숨을 참아가며 버텼다. 이러다 질식하는 게 아닌가? 그렇다고 무작정 나갔다간 총을 맞을 수도 있다. 눈앞이 하얘지는 게 연기 때문인지 의식을 잃어가는 중이라 그런 건지 분간되지 않을 즈음, 누군가 식탁보를 들췄다. 백작이었다.


“얼른 나오게! 사람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야 하오!”


연신 기침해대는 로즈와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궁 외부는 내부보다 어수선했다. 무장한 채 출동한 수많은 경찰이 세인트 케이든 궁을 포위했고, 시종들은 연회장에 남은 시민들을 데리고 빠져나오는 코번트리 백작을 엄호했다.


코번트리 백작이 궁전을 빠져나오면서 경찰에게 자초지종을 늘어놓았다. 나는 백작을 뒤로하고 놀란 가슴을 붙잡은 채 로즈와 함께 넓은 공터로 나갔다. 테러의 앞뒤를 수사하고 범인을 검거하기 위해 무장한 수색대가 연회장으로 일제히 진입했고, 나는 로즈와 함께 다리에 힘이 풀리듯이 벤치에 주저앉았다. 거친 호흡이 가다듬어지지 않았다.


상황은 점차 잠잠해지는 듯했다. 난 코로 숨을 쉬다, 입으로 숨을 쉬는 것을 반복했다. 목이 따가웠다. 연기를 마신 게 문제였으리라.


난 로즈의 상태를 살폈다. 로즈는 숨을 잘 쉬지 못했다. 혹시 도움을 받을 만한 사람이 없는 것일까? 주위를 살폈다. 가장 먼저 코번트리 백작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격수가 있소. 어디서 쐈는지는 모르지만 대여섯 발쯤 쏜 것 같소! 사람 한 명이 맞은 것 같고, 나머지 인명피해는 없을 것이오.”


“저 가스는 뭐죠?” 연회장을 빠져나가는 길에 기자들이 달라붙었다.


“나도 모르오!” 백작은 괴성을 내질렀다.


로즈는 숨을 헐떡이며 손을 벌벌 떨고 있었고 충격으로 떨어뜨린 고개를 차마 들지 못했다. 그녀는 가다듬지 못하는 호흡에 남은 체력을 쏟아붓고 있었다.


난 로즈를 옆에 눕히고 계속해서 상태를 살폈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후 연회장 내부에서 사람들이 총에 맞은 시신 한 구를 들것으로 실어 검은 구급차에 넣었다. 시신을 덮은 검은 천이 바람에 휘날렸다. 그 틈에 난 시신의 얼굴을 보았다. 왼쪽 가슴팍에 붉은 붕대를 감은 서리 부인이었다. 정말로 피부에 서리가 내린 듯 하얗게 변모해버린 그 모습을 보며 난 현실을 부정하기 시작했다. 분명 행복한 것이 아니었던가.


벌써 이 연회에서는 두 명의 사람이 죽었다. 또다시 심한 어지럼증이 몰려왔다. 이번에는 머리가 찢어질 것만 같은 두통도 함께였다. 어두컴컴해진 연회장과 그곳을 둘러싼 수많은 경찰과 사이렌 소리, 그리고 주변에서 웅성대는 사람들이 너무나 시끄러웠다. 머리가 어지럽다 못해 아팠다.


로즈를 신경 쓸 때면 모든 소리가 흐릿하고 작게 들렸다. 내부에서 하얀 가스가 계속해서 밖으로 배출되고 있는 궁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다. 많은 인원이 테러범을 잡기 위해 궁 내부로 들어섰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도 범인을 찾지 못한 듯했다.


소란스러운 침묵 속에서 들것을 든 구급대원들이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이쪽이 안 괜찮습니다.” 난 로즈를 가리켰다.


“본인은 총상이나 호흡기에 문제가 있지는 않으십니까?”


“예.”


그들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로즈를 들것에 싣고 구급 포드에 실었다. 병원으로 가는 포드의 뒷모습을 끝까지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혼자 조용히 일어나 집으로 향해 걸어갔다.


이제 내가 무얼 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다 내린 결론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 거리의 크고 작은 병원은 모두 만석이었다. 가스를 마신 사람들의 고통 어린 호소에 길거리도 절규와 비명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집에 도착한 난 화장실에서 찬물을 받고 머리를 통째로 넣은 뒤 빼는 걸 반복했다. 코끝이 얼얼했다. 여전히 숨은 잘 쉬어지지 않았다. 난 세면대를 붙잡고 숨을 헐떡였다. 얼굴은 누구한테 맞은 듯 새빨개져 있었다. 오늘 일은 정말로 잊히지 않을 것 같았다. 코번트리 백작의 생일연회는 내게 행복한 추억으로 남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그날 밤은 잠을 잘 수 없었다.

keyword
이전 05화소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