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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고스 Jul 23. 2023

재난을 대하는 태도

'의도치 않은' 불의의 사고 소식을 접할 때 사람은 (무관심한 자들을 제외하면) 세 부류로 나뉘는 것 같다.


첫째로 '순수한 슬픔'을 머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남의 일이지만 나도 피해를 입은 것과 같은 느낌을 스스로 받으며 몰입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순수한 슬픔은 그 힘이 커서, 자발적인 봉사활동이나 기부로 주변 사람들의 마음도 감동시키고 따뜻함을 전해준다. 결코 쓸데없고 혼란스러운 잡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문제는 두 번째 유형인데, 이 자들은 슬픔을 분노로 치환하여 자기 언행의 정당성을 확보한다. 당사자도 아니지만 마치 실제 피해자들을 든든한 방패막 삼은 듯 행동한다. 이 때다 싶어 피해자를 이용하여 본인의 '정의고 도덕적인' 이미지를 주변에 각인시키려 한다.


"정부는 사전에 미연에 이 재난을 예상하여 방지하지 않고 무얼 했냐."

"지자체는 뭘 했냐, 왜 못 막았냐, 공무원들 뭐 했냐, 우리 억울한 피해자들 어떡하냐!"


더 무서운 건, 본인이 그런 계산적인 의도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좀처럼 인지하지 못한다. '명분'이 '속마음'을 잡아먹고 있는 꼴이다. 그 어떤 다른 의도도 없이 순수하게 피해자들을 위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남들 앞에 겉치레하여 꾸민 모습을 보이려 하지 말고 조용히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는 격언이 있다. 정말 '슬프다면' 온전한 슬픔을 보여줄 줄 알아야 한다. 정말 슬픔에 잠긴 사람은 아무 액션도 하지 못한 채 흐느낀다. 슬픔을 이용하여 되려 계산적인 야욕을 챙겨서는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나라에 재난만 발생했다 하면 꼭 하나씩 숟가락 얹어 크건 작건 본인의 입지를 굳히려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서 제일 쉬운 게 남 탓이다. 자기 자신은 슬픔의 껍데기로 무장한 채 남들을 헐뜯기 바쁘다. 


세 번째는 안타까움을 동력 삼아 사안을 건설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번화가에서 묻지마 살인이 발생했다 하면 "저게 사람이냐. 사형시켜라"라든가 "왜 저런 인간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냐. 법 집행을 어떻게 하는 거냐. 국가는 저런 사람 하나 관리 제대로 못하고 뭐 했냐."라는 생각과 말 밖에는 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구체적으로 어떤 시스템에 어떤 문제가 있어 어떤 원인을 제공했는지에 관심을 가지고 알아보는 사람이 있다. 무작정 화가 나니까 사형을 외치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처벌 정도가 가장 적정한지, 관련한 판례는 어떻게 되는지, 부작용은 없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진정 문제의 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목소리가 더 사회에 도움이 되는 목소리인가? 안타깝게도 굉장히 많은 군중이 누구라도 할 법한 생산성 없는 분노만 외치는 것 같다. 위에 든 살인범 예시로 들자면, 판사라고 해서 그 자를 사형시키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법을 어떻게 판사 마음대로 할 수 있을까? 그 마음에 부합하지 않는 판례를 순간의 감정으로 뒤엎는 것이 더욱 법치주의에 어긋나는 일일 테다.


여하튼 재난이나 불행, 범죄를 마주하는 우리의 태도를 정말 신중히 고민해봐야 한다. 나의 그 진실된 마음의 소리를 캐치해야 한다. 사실 내 마음은 그저 슬픔을 이용해 화를 배설하고 싶었던 것은 아닌지. 진정으로 그 문제의 해결을 위하고 재발을 막고 싶은지. 아니면 이 사건을 이용해 주변에 이미지 관리 하고 싶지는 않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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