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도 높은 사랑

#17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이유가 존재하는가?

by 무정



사랑이라는 감정에는 이유가 존재하는가?




나는 항상 내가 느끼는 감정을 규명하기 위하여 고민을 하는 편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단순한 선호인가, 사랑인가? 사랑이라면, 왜 이 사람에게 이런 감정을 느끼는가? 이 사람의 어떤 특질이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했다면 왜 그것이 나에게 매력적이었을까.






사실, 사랑이라는 감정을 규명하는 것은 좋지 않은 시도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데 이유를 찾으면 그 감정은 조건부 감정이 되어버리고, 그 말은 즉, 조건이 사라지면 감정도 식는다는 뜻일 테니까.






감정이 식어도 서로가 공유했던 시간의 총량이 많으면 극복 가능한가? 그건 누군가를 정말 오래 만나봐야 알 거 같다.






조건부적인 사랑의 감정은 시간의 총량으로 극복할 수 있는가? 어쩔 수 없이 또는 책임감으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의지로써의 극복이 아니라, 정말로 상대를 사랑하게 되어서 더 이상 조건이 중요하지 않게 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이 또한, 사람의 성향에 따라서 시간의 총량이 중요한 사람에게는 조건이 실효되는 것이 문제 되지 않지만 시간의 총량이 두텁게 구축되어 있어도, 그것이 정이라는 이름으로 관계를 돈독히 해주지 못하는 특정 성향은 변수가 되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예를 들면, 외로움을 많이 타지 않고 독립적이라서 함께 한 시간이 많아도 감정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서로 의지하지 않는 상태를 유지하게 되었을 때 말이다. 만약 본인은 그러한데, 상대는 그렇지 않다면 그 또한 비극일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느끼는 바로는,




처음에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이 조건적이었다면, 그것은 상대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은 것이라는 점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보다 더 나은 상대를 원한다.





생물학적 특성상 생존과 번식에 유리해지기 위해서 자신의 단점은 보완하고 생존력을 높일 수 있는 상대를 선호하는 것이다. 외모, 지력, 경제력, 판단력, 통찰력, 유머, 다정함 등 생존과 번식을 넘어서서 함께 할 때 정말로 사랑받고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것 또한 중요하다.






그런데 이 본능을 자극하는 요소도 정말 다양하고, 그 요소마다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도 판이하게 다른 거 같다.





누군가는 외모가 중요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게는 재력이, 누군가에게는 지력이, 누군가에게는 유머가 중요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본능적인 필요를 충족해 주는 대상에게 품는 사랑은 진실되었다고 할 수 있는가. 본능에 기인한 감정이면 무조건 순수하고 진실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건 또 아닌 거 같다.






상대를 떠올렸을 때 상대의 조건이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어떤 회사에 다니고, 월에 얼마 정도를 벌고, 외모는 어떠하고, 함께 시간을 보낼 때 내적인 필요를 충족해 줄 수 있는 사람인지. 그런데 아주 간혹 그러한 조건이 떠오르지 않는 상대도 있다.







전자는, 내가 상대로부터 받게 될 것을 생각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내가 상대에게 베풀고 싶은 경우이다. 받는 사랑이 아니라 주는 사랑. 상대의 조건이 어떠하든 어떤 단점을 가지고 있든 나의 어떤 부분을 포기해서라도, 희생해서라도 상대를 위하고 싶은 관계. 나는 그게 순도 높은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만나게 된 사람은 꽤 괜찮은 사람이다. 대기업에 다니고, 나이차이도 얼마 나지 않고, 매너도 있고, 학력도 좋다. 섬세하고 차분한 성향 또한 본래 내가 선호했던 성향이며, 남는 시간을 전부 자기 계발에 투자하는 나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내 관심사에 동참해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외적으로도 귀여운 사람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 부합한다.







나는 방금 이 사람을 선호하는 이유를 정말 많이 댔다. 글만 보면 정말 괜찮은 만남인 거 같지만, 딱 하나 걸리는 점이 있다면 회사에서 회식자리가 잦아서 술을 주에 4회 이상은 마신다는 점이다.






마지막에 붙인 이 한 줄이 내가 이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처음부터 틀린 것이다. 나는 상대를 바라볼 때 조건을 먼저 봤고, 그 조건에 단 하나가 들어맞지 않자 더 이상 내 감정이 커지지 않았다. 만난 지 20일도 되지 않은 상대다.






술을 많이 마시는 게 상대를 향한 내 마음이 커지지 않는 요인이 된 이유는 유추했을 때, 나에게는 경제력과 외모, 학력이 별로 중요한 요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누군가를 만나서 결혼하지 않아도 나는 몇 억 이상을 모을 자신이 있고 부를 계속 키워나가며 세상에 기여할 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것이다. 그렇기에 돈, 학력과 관련된 요소는 내게 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조건으로 시작한 관계는 조건으로 깨진다. 조건을 건다는 것은 상대에게 받을 것을 기대한다는 것이고, 상대가 나에게 어떠한 것을 줄 수 없다고 여겨지면 마음이 빠르게 식기 때문이다.





반대로,




상대의 단점이 가시적으로 드러남에도 그것이 별로 중요하지 않게 느껴지는 사람이 있다. 나의 경우 몇 년, 몇 십 년 후까지 내다보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서 돈을 벌고 모을 때도, 관계를 맺어 나갈 때도 한참 후에 미래를 자동적으로 그리는 편이다.






그런데 조건을 먼저 따졌던 상대와의 미래는 집을 매매하고 아이를 낳고 단란하게 가정을 꾸려나가는 삶을 그려도 그것으로 만족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삶을 추구함으로써 내가 잃게 될 것들.






가령, 내 한평생을 받쳐서 추구하고 싶은 단 하나의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위하여 하루하루를 갈아 넣는 열정 같은 것, 데이트와 결혼을 배제하고 돈을 더 악착같이 모으고 굴려서 더 빠른 시기에 더 큰 부를 이루는 것과 같은 다른 인생 루트들이 아쉽게 느껴진다. 내키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나이차이도 많이 나고, 경제력이나 지력과는 거리가 멀며, 가진 것이라고는 피지컬 밖에 없는 상대와 그리는 미래는 위와는 아주 대조적으로 처참하다. 자기 관리를 잘못해 이른 나이에 병상 생활을 하는 모습, 그에게 아무런 경제적 기대를 하지 않고 홀로 헤쳐나가는 나의 모습, 야위고, 늙고, 아파서 이성적으로는 매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음에도 그를 사랑하게 될 나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런데 나는 왜 이게 그렇게 싫지 않은 것일까.






순도 높은 진실된 사랑이 이런 희생과 헌신만이 요구된다면 사실 상대의 조건은 애초에 볼 필요가 없다. 내 능력이 되는 선에서 감당할 수 있는, 정말 주고만 싶은 상대를 만나서 열심히 헌신하고 희생하면 되는 것 아닌가. 사랑은 고통을 수반하고, 그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가 없는가는 본인에게 달렸다.






결과와 과정만 놓고 보았을 때는 선뜻 어떤 사랑이 더 좋다고 말할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미래가 어떠하든, 과정이 어떠하든 조건적으로 상대를 사랑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 더 좋다. 왜냐하면 머리 아프게 계산할 필요 없이 그저 내 능력이 되는 선에서 상대에게 베풀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있는 힘껏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자든, 후자든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우주의 먼지 한 톨 같은 내 인생을 나는 조금 더 가치 있는 곳에 쓰고 싶다. 그저 내 욕구 충족을 위한 관계에 연연하는 것이 아니라 위대한 족적을 남기는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







결론은 본인의 경제적인 능력, 내적 결핍을 해소할 수 있는 능력, 지력과 같은 능력의 상호보완을 원하고 그것을 보완해 주는 상대에게 강한 끌림을 느낀다면 전자 같은 사랑이 더욱 현명할 것이고, 이미 본인 능력이 다른 누군가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견고하고 내면이 성숙하다면 머리 쓰는 관계보다는 후자 같이 감정이 끌리는 열정적인 사랑을 하였으면 하는 바람이다.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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