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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반지 Jan 10. 2024

저녁에 지는 태양

Paradigm Shift

하루가 잘 돌아가면 잘 돌아간 이유가 있고 안 돌아가면 안 돌아간 이유가 있다.


밤 열 시경 잠들어서 새벽 다섯 시면 눈 뜨고는 일어나자마자 오픈카톡방 몇 곳에 굿모닝 인사를 남기다 보니 최근 가장 많이 듣는 나에 대한 한줄평이 ‘새나라의 어린이’다. 일도 안 하는데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냐는 질문에 줄곧 ‘나이 드니까 아침잠이 없어져서’라고 열렬하게 답하고 있지만, 실상 요즘 초등학생들도 안 한다는 10시 취침을 강행하는 이유는 호르몬 때문이다.


난소가 활동을 하려면 호르몬이 충분이 공급되어야 하고 체내 호르몬 분비가 정점을 이루는 시간대가 밤 10시 ~ 새벽 2시라는 말을 어디서 주워 들었기 때문에 새나라의 어린이 일과를 자초하고 있는 것이다. 은근한 심리로 생각을 더듬어보자면 인구가 줄어 나라가 멸망하게 생겼다며 애 낳으라고 부르짖는 시대에, 애 낳기 위해서 술 한 잔 할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거하게 뻗어서 인사불성이 돼있을 시간에 극구 일어나 아침을 시작한다는 건 실로 애국자 중에 애국자다. 게다가 노래도 부르지 않았는가. ‘새나라의 어린이는 일찍 일어납니다.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라고. 저출산 시대에 애 낳기 위해 바른생활 취침 시간을 지키고, 새나라의 어린이가 되면 나라도 좋아진다는데 이보다 더 대한민국을 강국으로 만드는 사람이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잠꾸러기 없는 나라 우리나라 ‘좋은 나라’

아니 근데 말이야, 잠꾸러기가 없다는 전제조건이 충족되면 좋은 나라가 되는 게 맞나?

이걸로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다면 내가 임신하려고 난임병원에 다니고 하루하루 나이 먹는 걸 아쉬워하며 지는 해를 바라볼 이유가 없어야 하지 않나 하는 지난한 생각을 하곤 한다. 좋은 나라가 될 수 있는 필수조건이 어디 잠꾸러기 없는 거 하나뿐인가. 잠꾸러기가 없어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라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해버리면 잠꾸러기가 아닌 나는 왜 이 좋은 나라의 행복한 분위기를 누리지 못하고 있는지 억울해진다.


이는 아까 내가 말 안 한 게 있는데, 나는 10대 20대 시절에도 10시, 늦어도 11시를 넘겨서 잠을 자본 일이 별로 없다. 물론 진탕 술 마신 날은 예외지만 대체적으로 오후 예닐곱 시 일과를 마친 날은 저녁 먹고 나면 식곤증이 쏟아져서 바로 잠들어버리곤 했다. 술도 술자리 권하던 시대에 회사 인간들이 강권하니까 먹었지 오로지 일을 위해 마신 술이라면 국가와 사회 발전을 위해 기꺼이 쏟아 넣은 술이라 해도 차고 넘칠 말이 아니다.


열흘 전 해넘이라고 하는 한 해 마지막 날 수평선 너머로 가라앉는 태양이 장렬하게 짐으로써 드디어 년도가 바뀌었다.

해가 지는 걸 보기 위해 인파가 몰리면 매우 북적댈 것이라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로, 섣달 그믐날을 피해 마지막 날로부터 며칠 전 서쪽 해안 한 구석에 솟아 있는 원산도라는 섬에서 해넘이를 관찰했다. 이튿날 대설이 내릴 거라는 대대적인 보도가 있었던 유난스러운 날이라 이를 입증이라도 하듯 해넘이는 아주 흐리멍덩했다. 희뿌연 공간에 구름이 자리를 잠시 비워준 틈에만 붉은 띠를 만드는 언뜻언뜻 보이는 일몰이 주황색과 분홍색을 합쳐놓은 듯한 오묘한 색상을 뿜어내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배경 색은 회색 빛에 옅은 주황이 섞인 명도가 극히 낮은 바탕이었고, 미처 다 채우지 못한 구름 사이를 비집고 간신히 태양빛을 맞이하는 하늘과 바다 위에만 예쁜 색상의 주홍빛을 볼 수 있었다. 같은 해 한여름 사십 도에 육박하는 고온을 제치고 밤이 찾아오기 직전 마주했던 선유도의 선셋과는 차원이 달랐다. 태양이 나를 거의 수평 위치에서 비추고 있을 때는 공기와 나 사이 어느 작은 틈새조차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을 만큼 빨갰고 해수면이며 조형물, 건물들까지 어느 것 하나도 최대치로 높여 놓은 주황빛 열정을 피할 수 없었다. 그에 비하면 작년 한 해를 마무리한 태양은 구름에 많이 양보를 해줬는지 해넘이라는 명성에 비해 인간들에게 준 영향이 비실비실 하기 짝이 없었다.


태양이 바다 뒤로 넘어가는 걸 가만히 보고 있자니 싱숭생숭했다. 난임에서 한국나이는 중요하지 않으며 만 나이가 중요하다는 주치의 말을 지극히 순종한 탓에,

12월 31일에서 1월 1일 넘어가는 날은 나이 한 살 더 먹는 날이 아니라는 생각을 머릿속에 박아 넣었다. 내 나이는 생일이 있는 9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이며, 생일 달을 기준으로 내 삶의 회계연도가 시작하는 것이라고 주입을 시켰다. 그러니 1월 1일이 된다고 우울해하지 말자.


별의별 생각을 다하며 연말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태양이 그토록 위대한 행성인걸 알지만 그렇다고 그놈이 보이고 안 보이고에 따라 기분이 좌우되는 게 할 짓인가 싶다. 하루 해가 저물면 오늘이 또 가는구나, 한 해가 저물면 또 내년이구나 싶은 날이 벌써 몇 년째란 말인가. 나이를 이런 식으로 먹다간 즐거운 날이 하루도 없겠군.


우리 독자들이 잊지 않았다면 앞서 주변에서 하는 나에 대한 평가는 ‘새나라의 어린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왕 대한민국 강국을 만들려면 제대로 만들어보자.

잠꾸러기 없는 나라 전제 조건을 한껏 충족시켜 보자는 뜻이다.


보통 하루 일과는 기상해서 아침해가 뜨고 난 후 회사나 학교에 가는 시간부터 시작된다고 여긴다. 대개 이 시간은 ‘잠자고 일어난 후’라는 시간대라고 본다. 이게 아니라면 어디서 밤새워 놀았단 말인가? 청담동인가 어디 지나갈 때 금요일 밤부터 발이 부르트도록 방방 뛰며 놀던 젊은이들이 토요일 오전 10시에도 음악이 꽝꽝 울리는 홀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여전히 밤에 하던 춤사위와 고성을 과시하고 있는 걸 본 적이 있다. 뭐 그런 것이 아니라면 하루의 시작은 대개 오전 7시 정도라는 게 정설이다.


패러다임을 바꿔보자. 호르몬 때문에 잠꾸러기 없는 강국을 만들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이왕지사 새나라 어린이가 되기로 한 거 잠자는 시간을 하루의 시작으로 보는 거다. 10시에 잠들려면 밤 아홉 시부터는 잠 잘 시동을 걸어야 꾸벅꾸벅 졸다가 픽 쓰러지니 오후 9시가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이다. 잠을 잘 자야 다음 날 활동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잠자는 시간부터 하루를 여는 밤으로 보자는 뜻이다. 디지털시계를 봐도 자정을 0시라고 칭하는데 하루 시작을 오전 7시라고 외치면 0시부터 7시는 시작 시간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버리는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꽤 길다. 아예 잠자리에 드는 시간부터 고려해서 전날 밤 9시가 일과를 시작하는 시간이라고 정해버리자. 그러면 호르몬 분비를 챙기는 것도 의미가 있어지고 미적거리지 않고 이불속에서 기어 나오는 것도 타당해진다. 왜냐면 하루 시작은 이미 했으며 기상을 제 때 해야 남은 시간에 밥을 먹던 글을 쓰던 주사를 맞던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논리다.


내 하루의 시작은 잠자는 것부터다. 꽤나 멋진 발상의 전환이다.

호르몬님이 잘 출동하고 계신지 이 몸이 측정할 수는 없어도 이렇게 살면 난임치료에 자그마하게라도 도움이 되겠지 싶다.

아가들아, 내 예비 자녀들아, 내 너희를 위해 바인딩 리셉터(Binding Receptor -  생체 시스템을 일으키는 신호를 지닌 단백질 등이 이곳에 결합함으로써 신체 내 각종 작용들이 시작된다.)에 붙여줄 호르몬을 적시에 생산하고자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른 기이한 발상을 하는 노력까지 기울이고 있으니 무럭무럭 건강하게 자라다오. 엄마는 너희 믿는다.


근데 날 밝았을 때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위해 잠자는 시간도 의미 있도록 밤 잠을 하루의 시작으로 본다는 게 되게 맞는 말이지 않나?

잠을 소홀히 하고 공부하고 일하면 몸이 축날 텐데.




시험관 신선 6차를 하는 중 든 앙증맞은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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