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배우자를 만나기 전 나에게는 두 번의 결혼 기회가 있었다. 23살과 33살 때. 세상이 변해도 결혼은 일차적으로 남자 쪽에 니즈가 먼저 있어야 하고, 그 욕구가 가계를 이끌어나갈 만큼의 경제력, 더 구체적으로는 살 공간 즉, 집이 마련되어야 남자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구애를 한다는 사실은 예전부터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전 국민이 빨간 티셔츠를 입고 필승 코리아를 외쳐대며 나날이 승전보를 올리며 온 나라를 광기로 물들이던 2002년 여름. 나는 여섯 살 차이 나는 (지금 생각해 보니 결혼에 사활을 걸고 있던) 한 남자를 만나고 있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는 내가 23살, 난생처음으로 결혼할 배우자를 찾고 있는 남자를 만났던 시절 이야기다.
본격적으로 얘기를 시작하기 전에 그 때까지 내 연애 히스토리를 써보자면 대략 이랬다.
별로 좋아하는 마음도 없었는데 대학 입학과 동시에 처음 마셔본 술자리에서 소주 한 잔에 정신을 잃고 낚이는 바람에 어쩌다 보니 커플이 되어 있던 동갑내기, 그 동갑내기를 두 달 만에 청산하고 내 못난 인간관계를 커버하고자 반 억지로 만났던 다섯 살 연상 늦깎이 같은 과 오빠.
첫 번째 커플인 동갑내기와는 좋아하는 마음이 없으니 내키지 않는 연애 생활을 했고, 두 번째로 만난 만학도와는 어디서 배워먹은 못된 버르장머린지 연인관계에 있는 나를 근질근질 놀려 먹으며 그때마다 분개하는 내 반응이 재밌다고 또 그 찌륵찌륵 사람 신경을 건드리는 진작에 처분했어야 할 놈을 만나고 있었다.
내가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어떻게 나를 놀려 먹었냐면, 맛있는 걸 먹으러 가자고 해서 나갔는데 "배고프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어. 빨리 가자."라고 하면, "에구 ㅉㅉ 또 비싼 거 먹으러 간다고 하루 종일 쫄쫄 굶고 나왔어 헤헤헤."이런 식이었다. 그러면 나는 너무 열받은 나머지 그 자리에서 집에 가버렸고 꽃다운 그 시절 화창한 봄날 데이트 하자고 잡아 놓은 하루를 완전히 망쳐 버리곤 했다.
어쩔 때는 머리를 톡톡 치다가 하지 말라고 팔로 가리면, 검지부터 약지까지 손가락 세 개를 모아 머리를 가리느라 팔로 미쳐 못 가린 배를 찌르고, 배를 팔로 가리면 머리를 찌르며, 배를 찔렀다 머리를 찔렀다 반복하는 엿 같은 장난을 치기도 했다.
나이가 다섯 살이나 많은데 이런 짓을 하며 신경질 내는 내 모습을 보고 재밌어하는 상대방에게 나잇살이나 처먹었으면 나이 값 좀 하라는 막말을 서슴없이 뱉어내는 막장 드라마를 거의 매일 찍었다. 그래서였는지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람은 존중하지 않는 인간 본성 상 그 다섯 살 연상 만학도와는 제대로 된 스킨십도 하지 않으며 꽃 같은 22세를 보냈다.
드디어 이제부터 말할 세 번째 남자가 등장한다.
앞서 말한 광기와 흥분으로 가득한 2002년 월드컵이 도래했고, 그 무렵 나는 또다시 여섯 살 많은 그러니까 그때 나이로 스물아홉 살 남자를 만났다.
사실 그때 처음 만난 건 아니고 대입 종합반을 다니며 입시 준비를할 때 그가 그때 당시 만학도의 신분으로 그 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아 왜인지 모르겠지만 연달아 만학도만 두 번 만난 셈인데 왜 그렇게 만학도들만 만났는지 이유를 대자면 수십 가지도 넘지만 여기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어쨌든 처음 알게 된 사이가 아니라 이미 몇 년 전부터 알고 지내던 그저 그런 오빠 동생 사이가 어느 날 내 헤어스타일이 바뀌면서부터 그가 내게 호감을 품기 시작했다. 시간이 훌쩍 지나 깨달았지만 당시 그가 내게 보여줬던 몇 가지 행동들이, 무슨 연애 책자나 블로그 같은 데서 보면 '남자가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만났을 때 보여주는 열 가지 행동' 뭐 그런 모습의 전형이었다. 그런데 나는 앞서 변변치 못한 두 번의 연애를 통해 별로 배운 것도 없고 연애라면 실질적으로 해본 바가 거의 없는 그런 상태였다.
그 결혼하고 싶은 여자를 만났을 때 하는 행동 중 한 가지 수칙이 '친한 친구들에게 여자 친구를 소개해준다'라는 게 있다. 여섯 살 연상 만학도는 그 공식에 부합하게 본격적인 연애가 시작될 무렵 얼마 지나지 않아 어린 시절 같은 동네에 살며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무리에 나를 데리고 나갔다. 그 외에도 비싼 레스토랑에 데려가면서 쫄쫄 굶고 왔냐며 놀려먹지 않았고, 비가 내리는 어느 날 대한민국에서 부동산 값이 가장 비싸다는 동네에 신혼집으로 살 아파트가 마련되어 있다며 그 장소에 데려가서 아파트 단지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 모든 과정을 손수 자가용을 운전해서 태우고 다니며 실행했다. 그러니까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어른스러운 연애를 해본 것이다.
처음으로 그의 친구 모임에 나갔던 날, 부동산 가격이 전국 최고점을 찍는다는 곳에 사는 사람들이어서였는지, 아님 친구의 여자친구가 왔다고 하니 친해지고 싶은 마음에 표출한 언어가 다소 부적절했는지, 공교롭게도 처음 만난 사람으로부터 첫 대화에 나는 재산에 관한 질문을 받았다. 어디 사는가, 무슨 구인가, 그곳이라면 (부자들 사는 동네인) OO동인가, 돈을 많이 벌어야 하지 않겠는가 대략 이런 질문들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 거기서 나는 큰 실수를 하고야 말았다.
사실 저런 질문은 초면인 사람에게 해서는 안될 질문이기도 하지만, 자리가 자리인 만큼 사람을 대하는 기술이 좀 더 능숙했다면 그런 사람도 있겠거니 하며 적절히 핸들링하는 솜씨도 있어야 했다.
앞서 여러 편의 내향형과 관련된 글을 통해 내 성향에 대해 전달했지만, 어렸을 때 나는 특히 그랬다; 하고자 하는 일을 못 이룬 적이 없으니 자부심은 강하나, 이루기만 했을 뿐 성숙하진 못하니 실력은 없고, 없는 실력에 남들과 달라야 한다는 배척심만 앞서니 외로움은 가득하고 자존감은 바닥이었다.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동물 같은 성격이었다.
그러다 그날 처음 본 여섯 살 연상 만학도의 친구가 나에게 "자식~ (돈이 많으면) 자식한테 물려줘야지."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그 자리에서 그게 아니라며 거의 싸울 뻔했다.
부차적인 이유를 떠나서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 간엔 이미 예전부터 친밀한 사이였고, 나는 그 자리에 처음 나간 관계였다. 그러니 나를 좀 낮춰야 하는 자리임에도 무소불위 스물셋 나이에 참을 수 없으면 들이받아 버리는 삐딱한 내향형이 표출되어 버린 것이다. 자리는 금세 싸해졌고 한동안 그 분위기가 가시질 않았다.
풍파라면 겪어볼 만큼 겪었고, 인간관계라는 건 그 어떤 과학자의 세상을 뒤흔든 논리를 갖다 댄다 해도 딱 들어맞는 이론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미묘하고 복잡하고 난해한 것임을 알게 된 후 깨달았다. 여섯 살 연상 만학도의 그 친구도 어쩌면 친구의 여자친구가 왔다고 하니 친해지고 싶어 한 말이 자기 관심사에서 내용을 구성했을 뿐 악한 마음을 가지고 한 말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걸.
몇 달 지난 후 나는 여섯 살 연상 만학도에게 대차게 까였다. 위에 말한 초면에 싸울 뻔한 그 일 때문은 아니고, 다른 몇 가지 이유가 축적되면서 결혼할 여자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워낙 끝이 안 좋았기에 여섯 살 연상 만학도와의 연애 과정은 되돌아보지도 곱씹어보지도 않았는데, 얼마 전 부모님 댁에서 짐 정리를 하다 오래전 사진들 속에 그가 나를 찍어준 사진들이 나오며 그때 기억이 소환됐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게 친구들 모임에서 싸울 뻔한 일이었다. 친구의 여자친구라는 이유로 아무런 조건 없이 친해지려고 다가온 누군가를 내 발로 차버린 격이었는데, 인간관계에 목말라하는 요즘 그런 행동이 얼마나 나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되는 언행이었는지 깊이 깨달았다. 그래서 지금은 그 남자에게 미안하다. 나랑 사귀었던 여섯 살 연상 만학도가 아니라, 그때 나에게 재산과 관련된 질문을 해서 싸울 뻔한 그 당사자에게 말이다.
어떤 사람과의 관계를 정리할 때 내가 불편해하고 현재 평행선을 그리고 있는 포인트가 뭔지 딱 집어 말할 수 있게 스스로 정리하고, 그것에 대해 상대방과 충분히 대화를 나누어보고, 그에게도 생각을 정돈할 수 있게 시간을 주고, 그래도 안되면 그때 관계를 정리 해도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이 남아있다.
과연 상대방이 나에게 해준 것이 단 하나도 없는가? 물질적인 것만이 아니라 내가 힘들어할 때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었고, 나 아플 때 미약하게라도 옆에서 부축해 주었고, 부모님께 안부 전화 드리라고 말 한마디 해줬을 것이다. 그런 것도 상대방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그러니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화낼 것 없다. 내가 해준 만큼 상대방은 내가 추구하는 니즈를 충족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다 보니 싸움질을 하는 건데, 그 이전에 상대방으로부터 내가 받은 것을 먼저 인정해 주고 충분히 고마움을 표현하고 그리고 이별해도 안 늦는다. 그래야 나에게도 발전이 있다.
가장 창창했던 시절 철철 넘치는 자신감과 자부심을 적절히 조절하는 방법을 몰라 일어났던 치기 어린 행동에 당황했을 그분을 생각하며, 이제라도 깨달은 내 과거 흑역사를 고백한다. 다듬어지지 않은 내향형이 잘못 표출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이 글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