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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반지 Feb 14. 2024

4화. 그녀의 수련회

과거 중고등학교에 만연해 있던 학생 인권을 업신여기던 행태는 일일이 열거하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팽배해 있었지만, 제거해야 할 것 1순위를 꼽으라면 단연 수련회다. 돈 내고 형편없는 방바닥에서 잠을 자고, 물에 계란 풀어놓은 초라한 국에 밥을 먹고, 무엇을 상상하든 그보다 위험한 것이 없을 듯한 훈련을 받고, 대답 소리가 작거나 츄리닝 앞지퍼를 안 잠갔다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단체 오리걸음을 하고, 이유 없이 얻어맞고 욕을 들어 먹는 그 행사 말이다.


90년대에 인당 3만 원 정도 참가비를 내고 경기도 어디 있는 운동장과 강당, 급식실을 낀 4층짜리 학생 회관 같은 데서 2박 3일을 지내다 오는데, 사전 정보도 없이 일방 통보로 회비를 착출 하니 아무것도 모른 채 봉투에 참가금을 정성스레 담아 학교 갖다 내라고 전해주던 곱디고운 엄마 손을 생각하면 지금도 어안이 벙벙해지는 행사다. 생활비 쓰기도 빠듯하던 시절 돈 마련해서 쥐어 주던 학부모들은 가서 애들이 뭘 겪고 오는지 상상도 못 할 일이 벌어졌던 그 아동학대 현장을 로봇으로 애완동물을 만들고 내 목소리까지 흉내 내는 기술이 발달하도록 세상이 바뀌었는지 눈 가리고 귀 닫고 지내다가 결국 큰 사건을 치고야 말았다. 구시대 산물을 여전히 청산하지 못하고 자행하던 11년 어느 고등학교 학생들이 수련회 훈련을 받다 바다에서 사망하는 가슴 찢어지는 사고가 발생한 생각하면, 2000년이 한참 지나고 나서도 행사가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아무튼 여학생을 비롯하여 키가 아직 다 자라지 않아 15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는 아주 작은 사이즈의 동급생들까지 모레 바닥에서 좌로 굴러 우로 굴러를 하고 외줄에 걸려 있는 통나무 위를 횡단하는 아찔한 유격 훈련 후에 13킬로미터를 심지어 뛰어서 행군하고 회관으로 도착한 중2 어느 날이었다.


낮에 개고생을 시켜놓고 저녁에 정신줄 풀어주는 게 관행이었는지, 석식 급식 후 70년대 사이키 조명이 돌아가는 지하 공간으로 집합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또 뭐 때문에 모이라 마라 하냐며 낮에 흙밭에서 뒹굴어 먼지가 풀풀 날리는 체육복을 입고 씻지도 않은 상태로 땀냄새 풍겨가며 전교생이 모인 지하실에서 고막 터질 데시벨로 디스코풍 팝송을 틀어놓고 마음껏 흔들어대라고 공지했다.


서른 중반이 훌쩍 넘도록 시집 못 간 깐깐한 담임이 교실에서 볼 때는 과히 상상하기도 힘든 동작으로 가슴을 흔들어대고, 몇몇 노는 여자애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입술에 버건디 레드 색깔을 칠해 어두운 공간에 조명이 왔다갈 때마다 걔 입술만 보이는 채로 머리를 이리저리 쳐대곤 했다. 벌써부터 남자 잘 만나 가정을 꾸려 살겠다는 야욕이 있는 아이들은 은근슬쩍 잘 생긴 남학생이 있는 반 쪽으로 기어가기 시작했고, 그 외 대다수 애들은 평소같이 점심을 먹거나 음악실에 손잡고 가던 무리들과 어울려 박수를 치거나 신나게 왼발 찍고 오른발을 찍으며 박자를 맞춰가며 서 있었다. 


촌스러운 조명 아래 넋 나간 시간을 보내기 한 시간 전쯤 바로 위층에 있는 강당에 모여 반 별로 앉아 옆사람과 손바닥을 치는 레크리에이션 후에 대미를 장식한다며 어깨동무를 하고 해바라기의 '사랑으로'를 열창하고 온 후였다. 건전한 노래도 재미없고 앞에 나가서 춤을 추겠다며 교실에서 뒷자리만 앉을 것 같은 애들 몇 명이 룰라의 '날개 잃은 천사'에 맞춰 옆골반을 쳐대는 어설픈 몸동작을 본 후 눈 버렸다고 생각하던 차에 키 번호로 바로 내 뒤에 있는 친구가 같이 추자며 팔을 잡고 끌고 왔다.


어쩐지 어색하고 남들이 볼까 두려워 몸도 흔들지 못하고 있던 참에 끌어당김까지 당하자 몸 둘 바를 몰라 한 손 가득 붙잡힌 오른팔을 쓰윽 내뺐다.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은색 미러볼 조명 밑에서 다른 애들이 정신 나간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안 가장자리에 서서 심지어 벽에 붙을 정도로 몸을 움츠린 상태로 춤추고 있는 전교생을 바라봤다. 


어떻게 하면 팔과 다리가 따로 놀고 고개를 좌우로 움직일 수 있는지 물리적 어려움을 자세히 관찰하며 나도 한 발만 뻗으면 그 무리에 뒤섞일 수 있는 거리에서 갈까 말까 망설이고 서 있었다. 시간은 가만있는 사람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사이키 조명과 60년 대풍 디스코를 틀어놓고 안 그래도 낮동안 이상한 훈련으로 지저분해진 몸뚱이에 땀이 줄줄 흐르는 애들에게 이성의 끈을 놓도록 허용한 시간은 단 40분이었다.


가서 팔이라도 뻗어 흔들고 싶은 욕망은 간절했으나 안타깝게도 내향형이란 지독한 옷에 둘러싸인 어린 소녀는 결국 벽 쪽에서 하염없이 바라보며 가끔씩 무릎만 굽혀다 펴보면서 아쉬운 시간을 흘렸다.


참으로 답답하기 짝이 없는 내 중학생 시절은 내돈내산으로 간 수련회에서도 맘껏 즐기지 못했다. 요새 어느 학교 행사에서 아이들을 모래 바닥에 굴리고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소지품 검사를 해서 물건을 강탈하는 행위를 하면 뉴스에 나올 일이지만 그때는 아무런 제재 없이 자행됐다. 이런 인권 무시 행태는 빼고 밤에 360도 돌아가는 조명 켜주는 댄스의 밤 같은 거만 살려주면 꽤 괜찮은 행사일지도 모른다. 지금 댄스 타임 같은 거 만들어주면 아무 눈치 안 보고 출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때는 왜 그리 조용하고 말 없는 아이로만 비쳤는지 참 아까운 과거를 회상해 본다. 아마 사이키 밑에서 정신 못 차리고 머리를 흔들어대던 교사나 학생들에게 그때의 나를 기억하냐고 물으면 대부분 기억에 없거나 과묵한 아이 얌전한 아이 정도로 떠올릴 것이다. 그게 그 시절 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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