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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반지 Jul 21. 2023

3화. 그녀의 모임 주선

일렬로 놓인 브라운관 컴퓨터가 뿜어내는 열기는 전산실 내부를 후끈 달아오르게 했다. 10여 명의 여자 아이들이 한 줄로 앉아 ‘인터넷’이라는 것을 하고 있었으며 그 세계는 채팅과 게임이 주를 이뤘다. 서 너 군데 업체로 대표되는 PC통신 사업체들은 저마다 채팅방을 운영하며 공간적 거리가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실시간 연결해 준다. 누군가 방을 열고 제목을 달면 그 제목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참여해 대화를 나누는 식이다.


90년대 후반 학교 간 미팅은 이런 식으로 이루어졌다.

방 이름이 ‘8099 천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남자’라고 쓰여있다면, 1980년생 99학번 천사대학교 국문과 학생들이 개설한 미팅 요청 방이다. 이런 방에 들어가서 비슷한 형식으로 프로필을 밝히면 채팅을 통해 일정을 잡고 만남을 성사시키는 것이다. 주로 남자 4명 여자 4명이 미팅 현장에 나가는 건 말하지 않아도 아는 국룰이었다.


후끈하게 달아 오른 건 전산실 내부 온도만은 아니었다. 앞줄 컴퓨터에 10명, 뒷줄 컴퓨터에 5~6명 정도 여학생들이 앉아 열심히 자판을 두드리며 과미팅을 주선하고 있다. 학교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연령대가 안 맞거나 출전자들 사는 곳이 멀거나 하는 경우 대화방을 그냥 나오면 된다. 방명을 보고 들어가서 대화 상대를 포함한 미팅 참가자들이 괜찮은 인간인지 몇 마디 떠보고 마음에 들면 날짜를 잡고 별로면 잡지 않는다. 너무 순진무구해 보여서도 안되며 외모에 대한 PR도 적절히 할 줄 알아야 한다. 만나기 전부터 기대감을 주려면 세련된 말투와 채팅 은어를 사용해야 하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지금 보면 구닥다리 같은 방식이지만 알음알음 선배나 지인 소개로 연결해 오던 방식에 비하면 놀라울 정도로 시공간 제약을 넓혔다.


옆에 옆 자리에서 하이에나처럼 미팅 상대를 찾던 윤형이가 나지막하게 외쳤다. “됐다!”

단발머리에 청바지를 즐겨 입는 성숙한 외모의 윤형이는 자기가 들어가 있던 대화방 남자들과 미팅을 성사시켰다며 좋아했다.

당시 윤형이가 했던 대화 내용을 옮겨본다.


방제목 : OO대학교 경영학부 99학번 남자 강남 거주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저희 ㅁㅁ대학교 99학번 여자입니다.”

“아 네. 실례지만 몇 명이세요?”

“저희 네 명이예요.”

“저희는 방명에 쓴 것처럼 전부 99학번이고 애들이 다 대치동, 개포동, 잠원동에 살아요.”

(허걱)

“그럼 말 놔도 돼요? 우리도 99인데.”

“그래도 되는데, 난 80년생 아냐. 나만 79고 다른 애들은 다 80이야. 나 재수했어.”

“그렇구나 그래도 말 놔도 되지?”

“응 되지. 근데 너희 무슨 과야?“

”우리 과 다 달라. 교양 수업에서 만났어. 지금도 교양 수업 시간이야.“

”수업 안들어?“

”어 인터넷 시간인데 실습하고 있어.“

”그렇구나 너희 예뻐? 우리는 진짜 괜찮아.“

(헉)

”몇 명만 모집해서 나갈거야. 예쁜 애들만 데려갈게. “

”너희 4명이라고 했지?“

”응.“

”우리는 항상 우리만 나가. 4명“

”그래 언제 볼까?“

”이번주 목요일이나 다음 주 화요일.“

”애들하고 상의해 보고 알려줄게. 핸드폰번호 어떻게 돼? “

”011-xxx-xxxx”


4명이 절친이고 항상 그들끼리 미팅에 나가며 정말 확실한 정예 멤버란다. 자기네 쪽은 확실해서 믿을만하니 여자 쪽만 괜찮은 애들로 데리고 나오라고 못을 박았다. 거만하다. 얼마나 확실하길래.


이 정도로 대화를 마치고 이후부터는 전화나 문자로 약속을 잡는다. 요즘 일어나는 강력 사건들을 보면 심각한 범죄가 일어날 법도 한 방법이다. 한 번 본 적도 없지, 증빙은 불가하고 말만 믿어야 하며 주선자 핸드폰 번호 하나만 챙겨 약속 장소로 나간다. 주선자를 제외하고 나오는 다른 이들에 대한 사전 정보는 알 수가 없다. 반드시 단체로 나가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주선하는 미팅이 왜 사라졌는지 알만도 하다. PC통신이라는 도구가 사라지기도 했지만 방법 자체가 위험하다 보니 점차 선호하지 않게 되면서 자취를 감추지 않았나 싶다.


그럼 나는 이런 미팅을 주선했을까?

한 명이 미팅을 잡으면 3명을 데리고 나갔으니 한 번 따라 나가면 나도 한 번쯤 주선해야 한다. 그래야 상도가 있다. 항상 따라나가기만 하는 애는 어느 순간 데리고 나가기 싫어질 수 있다.


나는 딱 한 번 주선했다. 대화방에 들어가서 간단한 질문을 주고받는 것까지는 가능했는데 이 아이들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이런 방식에 누구나 확신 없긴 마찬가지다. 본인도 본 적 없는 사람을 주선하는 것 아닌가. 그럼에도 모임을 잘 꾸려서 나가는 애가 있는 반면 나는 미적거리곤 했다. 어찌어찌 주선을 하긴 했는데 행여나 만남 후에 컴플레인이 나오지 않을까 조마조마했다. 확신 없는 상황에서 타인에게 신뢰를 주는 건 영 불가능했다. 그래도 괜찮은 건데. 재미로 나가고 재미로 만나는 것 아닌가. 다른 아이들은 이런 이유로 별로 부담 없이 주선하고 쉽게 쉽게 만났던 것 같다. 이번에 아니면 다음에 잘 나가면 되지, 와 같은 마음일 것이다.


참여시키는 것도 쉽지 않았다. 3명의 아이들에게 내용을 전달하고 일정 맞추는 과정은 꽤 난해했다. 무엇보다도 내가 미팅을 잡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게 어려웠다.

“이번에 악마대학교 전산학과 미팅 잡았어. 같이 나가자.”

이러면

“실버반지가 악마대학교 미팅 잡았대. 학교가 쫌 별론데 그래도 나가보자.”

이런 대화가 오고 가면 뒤로 숨고 싶었다. 말해놓고도 조마조마했다. 소심해서 그런 마음을 대놓고 친구들에게 말하지도 못했다. 다들 좋은 친구들이었는데. 울산에서 올라온 진영이, 부산에서 서울로 유학온 혜선이, 옆 고등학교에 다녔다는 걸 대학교 와서 알게 된 미진이 모두 내가 먼저 마음을 열면 괜찮다고 다독여줄 아이들이었는데.


미팅에 나간다는 건 기대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그 기대감이 부담스러웠다. 기대를 하고 나갔는데 별로이면 실망할 것이고 실망하면 불만을 쏟아낼 것이다. 일어나지도 않은 일련의 과정을 꼬리에 꼬리를 물며 상상했다. 참으로 쓸데없는 짓이다.


지금 와서 생각하는 그때의 나는 이렇게 말하면 됐을 것이다.

(미팅 후)

진영 : “악마대학교 애들 진짜 별로였다 ㅋㅋ”

혜선 : “맞아 진짜 애들 다 별로야”

미진 : ”그래도 난 A라는 애 괜찮았어”

나 : “외모는 별로였는데 매너는 좋았잖아. 특히 B는 호프집에서 진짜 풍선 살지 몰랐다. 그 삐에로 분장한 아줌마 풍선으로 푸들 하나 만들어놓고 이만 원이나 받다니. 아마 B는 우리가 있어서 사기 싫은데 어쩔 수 없이 샀을 거야. 진짜 착하더라. 나름 기억에 남는 일 있었으니까 됐어.“


학교와 얼굴을 가지고 미팅남 괜찮음 유무를 판단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스무 살 여자 아이들이면 이러면서 이상형을 만들어간다. 이를 대하는 나의 자세가 소심해져서 대응을 못하는 식이었다. 그냥 단체 미팅에 나갔고 끝나고 후기를 나누며 수다를 떨었다.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내 생각도 교환하면 된다.


이것이 어려울 이유가 있을까? 글쎄.. 어려워 보이지 않는 이 일이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실버반지야 네 생각도 말해봐”

라고 묻는 순간 난 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이 꽉 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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