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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반지 Jul 14. 2023

2화. 그녀의 유년 시절

집에서 골목을 빠져나가는 길은 100미터가 채 안 되는 거리임에도 유치원생 아이에게는 길게 느껴졌다. 이 길을 걸어 나가면 곧장 대로변으로 연결된다. 큰길을 따라 반 정류장 정도 또 걸으면 동네에서 가장 규모가 큰 슈퍼마켓이 나온다. 야채, 과자, 쌀, 고기, 생선 등 식품은 물론이고 부탄가스, 휴지, 전기콘센트, 고무통, 플라스틱 도시락 등 공산품도 판매하는 곳이다. 골목 어귀 구멍가게와 비교가 안 되는 규모다. 사탕, 과자 같은 소소한 군것질거리는 골목 가게에서 사 먹어도 엄마가 생필품을 사러 나갈 때는 그 대형 슈퍼마켓으로 가시곤 했다. 그 슈퍼는 오픈할 때도 구매 금액에 상관없이 방문한 모든 손님에게 세숫대야를 나눠주는 행사도 했다. 2층 건물 1층 전체를 사용하고 있는 슈퍼 이름은 ‘가고파 슈퍼마켓’이다.


하루는 그 슈퍼에서 종이컵에 우유를 따라 시리얼을 말아 나눠주는 행사가 있었다. 슈퍼 정문 앞은 그날 들어온 시금치, 오이, 당근 같은 야채가 가판대에 깔려 있고, 그 앞에 설치된 행사장에서 어른 몇 명이 시리얼을 우유에 말고 있다. 무료로 나눠주었으며 증정받는 대상은 어린이만 해당한다.


꽤 많은 아이들이 행사장 앞에 다가와 종이컵을 하나씩 받아갔다. 숟가락으로 떠먹거나 홀짝홀짝 마시며 즐거워했다. 한 번 모여든 아이들이 쭉 빠져나갈 때는 말아놓은 시리얼 컵이 다 사라지고 또 말고 있을 때다. 만들어 놓는 족족 아이들이 집어가는 것이다.


잘도 받아가는 아이들과 대비되게 참으로 소극적인 나는 가판대 앞까지 가는 것도 힘들었다. 아이들이 몰려 북새통을 이룰 때는 애들이 많아서 못 가고, 한 번씩 싹 빠져나가 한산할 때는 또 애들이 없어서 못 다가갔다. 많으면 많은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앞에 나서기가 힘든 아이다.

어찌어찌해서 힘들게 가판대까지 가기는 갔다. 받아갈 애들은 대부분 받아가고 한산해진 가판대 위에는 남은 시리얼이 없었다. 높이가 당시 내 키보다 조금 더 낮아 목덜미까지 오는 가판대 너머에는 흰 앞치마를 걸치고 서있는 여자 어른들이 있다. 그녀들이 우유에 시리얼을 마는 아줌마들이다. 아주머니들은 한산해진 틈을 타 조금 쉬기도 했고 몇몇은 담소를 나누고 있다. 조그마한 아이가 갈까 말까 망설이다 다가온 건 눈에 안보인 모양이다.


“얘야 와도 돼.” 내지는 “이거 줄게 받아가.”라고 한 마디만 해주어도 몸을 베베 꼬며 다가갈 텐데 정신없이 놀리는 손에 비해 눈길은 아무도 아이에게 향하지 않았다. 하물며 어린이에게만 주는 행사이니 가서 손만 뻗어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그걸 하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 앞에 서면 입이 다물어지는 내성적인 성격은 아주 어린 시절에도 있었다.




어린 시절 내성적인 성향은 특별한 이유가 없었다. 그냥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연습을 해서 무대에 서는 재롱잔치와 달랐다.

재롱잔치는 며칠이고 연습해서 무대에 세우면 연습한 대로 하고 내려오면 됐다. 내성적이기는 해도 무대 공포증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에 부담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연습해서 준비가 됐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다.

즉흥적이고 순간 일어나는 상황에 반응을 잘 못하기는 유년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끼 있는 아이들이나 워낙 사람과 지내는 걸 좋아하는 아이들처럼 어떤 상황에도 재롱떠는 것과는 달랐다. 잔치니까 재롱떨고 행사니까 연습한 것을 보여주는 정도였다.

어울리고 함께 노는 친구들은 있었는데 그중에도 말괄량이 같은 아이가 있다면 나는 얌전한 축에 속했다.


위에 쓴 시리얼 일화는 그 당시 먹긴 먹었는데 심적으로 되게 힘들게 먹었던 것 같다. 그것을 얻으려고 힘든 발걸음을 떼서 가판대 앞까지 걸어갔고 ”저도 주세요. “라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고 혀를 굴려서 발음을 만들어내야 했다. 마침내 소리를 내기 위해 공기를 목에서 빼낼 때 얼마나 긴장했는지 모른다.


시식 행사에서 샘플 음식 달라고 하는 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는 걸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요즘은 드는 생각이 그때 그러한 현상이 금쪽같은 내 새끼를 보면 나오는 ‘선택적 함구증’ 아니었을까 싶다. 아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줄곧 입을 열지만 동네 아줌마가 반갑다고 인사를 건네면 뒤로 쏙 숨어버리곤 했다. 더 세세한 기억은 안 나지만 유년시절 이런 모습은 기질이 내성적인 아이라고만 보기보다 정서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닐까 어렴풋이 생각도 해본다.


앞으로 연재해 나가겠지만 이런 성향이 어느 한 시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유년 시절부터 시작된 이 성향은 세상에 적응할만한 정도로 조금씩 개선해 나갔을 뿐 타고난 기질 자체는 변함이 없다.


그러면 친구나 지인이라는 사람들은 어떻게 만들어 갔을까?

난임 치료를 하는 지금은 그동안 일하던 사회관계마저 단절되었는데 누구와 대화를 하며 지낼까?

내향형 인간이라 아예 말하지 않고 지내는 걸 혹시 즐기는 건 아닐까?


요 몇 달간 나는 위에 말한 것과 같은 어려움으로 극도의 외로움을 느꼈다. 간혹 강의 수강 같은 것을 하더라도 줌으로 대체되다 보니 만나는 사람이 극히 드물다. 가끔씩 친구를 만나더라도 내가 걷고 있는 난임 치료라는 과정을 오롯이 공감해 주기는 어렵다. 그녀들은 이미 삼십 대 초중반에 출산을 했기 때문에 시험관 시술이 무엇인지 속까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끊임없이 사람을 찾아다닌다. 답답해 미칠 것만 같은 상황은 만들지 않을 수 있게 어느 정도 관계 트는 법을 터득해 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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