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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버반지 Jun 23. 2023

1화. 그녀의 대학 시절

캠퍼스에서 마주친 훈남은 하늘색 셔츠에 검정 바지를 입고 있었다. 목 단추를 두 개 정도 풀어헤친 옷매무새는 매우 바람직한 코디다. 그저 그런 블랙 팬츠지만 허리와 다리가 가느다랄 것으로 예상되는 순정만화 남자 주인공 형 하체는 평범한 옷차림을 예사롭지 않아 보이게 한다. 눈이 말똥말똥하고 검정 뿔테 안경에 계란형이면서 다소 기다란 얼굴은 큰 키가 더 크게 보이게 만든다. 호리호리한 몸에 훤칠한 키를 자랑하는 모범적인 외모 소유자다.


이런 남자를 우연히 만났다는 건 전날 밤 용꿈을 꾼 게 틀림없다.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반짝거리는 햇살이 그의 오른쪽 관자놀이 부근에 멈출 때마다 눈이 부신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곤 했다. 빛나는 햇살은 스튜디오 조명 못지않은 효과를 발산했고 완벽한 음영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햇살이 닿았다 떨어졌다 할 때마다 얼굴의 오른쪽 면은 밝아지고 왼쪽 면은 어두워지다 보니 곧게 뻗은 콧날이 더 오똑해 보인다. 콧날은 여고 생활을 마치고 이제 막 캠퍼스에 입문한 소녀와 여성 중간 단계 인간이 잘 생긴 남자를 판별하는 핵심 요소다.


‘지금껏 봐온 남자들 중에 제일 괜찮아.’


하늘이 내려준 대단한 기회임에도 불구하고 ’어머 나도 댁 같은 남자라면 얼마든지 만나보고 싶어요‘ 이 한마디 하지 못했다. 멋쩍게 떠나는 뒷모습만 바라보다 집에 와서, 전화번호 적힌 종이를 만지작거리며 낮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 남자는 ‘도서관 안에서도 봤는데 얼굴이 밝아 보이시네요. 어느 학부세요?’라고 스스럼없이 물어왔다. 잠깐, 도서관 안에서도 봤다고? 그럼 따라온 게 틀림없다.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다. 지금 중요한 건 따라왔는지 갑자기 맞닥드렸는지가 아님에도 지나간 상황을 차근차근 짚고 있다. 직관이 중요한 상황에 분석을 하고 있다.  훈남의 말에 제대로 된 리액션을 보여주지 않으면 실망하고 떠날지도 모른다. 이건 우연한 기회뿐만 아니라 어떤 상황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분석이 머릿속에 맴도는 동안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의 눈만 빤히 바라봤다.


대답하지 않자 ‘그럼 몇 학번이세요?’ 내 학번을 잊었을 리 없지만 목청에서만 울릴 뿐 굳게 다문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 물어보고 답을 안 하니까 물러서지 않고 또 물어보다니 아마도 외향형 인간이겠지, 라며 이번에는 훈남의 성향을 분석했다.


여자가 먼저 말 거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흔치 않다. 내가 여자라서 남자에게 말 거는 일이 없기도 했겠지만, 꼭 맘에 드는 이성을 따라가는 상황이 아니라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건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훈남은 한층 더 용기를 냈다.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면 연락 달라고 적어준 019로 시작하는 그 시절 핸드폰 번호가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전화하기 민망하면 문자만 보내면 된다. 문자 하나 보내는데 30원. 통화 무제한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 문자 메시지 보내는데도 과금이 되던 때다. 이런 호사스러운 연락에 그 정도야 별 것 아니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자 한 통 보내기가 그렇게 힘들었을까. 종이만 만지작거리다 결국 내려놓고 말았다. 하루, 이틀, 사흘 나흘이 지나도 선뜻 연락하기 쉽지 않았다.


도도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는 그 태도는 전혀 거만함의 표출이 아니다. 그저 마음 표현하는 말 한마디 하는 게 서툴고 어렵고 용기가 나지 않은 것이다.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이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아쉬움에 목이 멘다. 젊은 날에만 가능했던 잊지 못할 추억을 내 발로 멀찌감치 차버린 느낌이다. 먼저 낚아 채지 않으면 기회는 다른 여자에게 넘어간다는 것을 한참 지난 후에야 알았다. 표현할 줄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쑥맥이다. 그때 그 훈남은 어떤 여자를 만났으려나.




MBTI 검사를 해보면 내향형과 외향형을 판가름하는 질문은 ‘사람들과 같이 있을 때보다 혼자 있을 때 편하다.’를 조금씩 변형한 문항들부터

‘글로 표현한다.’ , ‘단순한 질문도 생각을 필요로 한다.’ ‘사람들에게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기 힘들다’와 같은

활동성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문항까지 무수히 많은 문항에 답변을 하게 한다.


허위 답변 이른바 실제 자아와 되고 싶은 자아를 바꿔치기 위해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로 답변하지 않도록 내용을 조금 바꾸거나 단어를 조금 바꾼다.

혹은 내용을 아예 바꿔 속내를 도저히 알 수 없게 만든 질문으로 솔직한 답을 이끌어 내게 한다.


난 아주 극단적인 I유형이다. MBTI 검사할 때 I와 E를 판가름하는 질문들에 매우 일관성 있게 거의 모든 항목을 I로 응답했다.

‘매우 일관성 있게’했다는 걸 안 건 검사를 마친 후 결과지를 받으면 각각 유형에 어느 쪽으로  비중이 더 치우쳐져 있는지 막대그래프가 그려져 있다.

특히나 I와 E를 나누는 도표에서 I쪽으로 매우 우세했기 때문이다.


가만히 보면 세상에는 내향형과 외향형 말고도 또 다른 유형이 있을 것도 같다.

다만 아직 누군가 확실하게 공표한 것이 없다 보니 과묵하거나 나대는(?) 정도가 얼마나 되냐는 것으로 구분하는 것 같다.

사람이 조용한 환경에서 홀로 얼마나 오래 지낼 수 있느냐와 다수의 사람 속에서 그들과 긴 기간 관계를 맺는 것.

이것을 얼마나 잘 해낼 수 있느냐 차이로 나누는 것이다.


물론 나는 이 분야의 학자도 아니며 자격증도 없다. 밝혀지지 않은 또 다른 유형이 있다 하더라도 내가 뭐라 말할 수 없다.

그러니 나처럼 안으로 점점 더 숨어 들어가는 유형이 내향형이라면, 이와 정 반대되는 성향인 외향형과 그 외에 있을지도 모르는 다른 유형은 이번 ’내향형 인간입니다만‘에서는 ’일반인‘이라고 칭하고 싶다. 이렇게 정의를 해주어야 편한 것도 내향형 인간의 한 행태 같다. 글을 쓴 이 순간에 얼마나 다행인가 싶다. 말하는 걸 아끼는 내향 인간이 적어도 내 글 속에서만이라도 정의하고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나만의 세상을 만드는 것. 이게 내향형인 것이다.


’내향형은 혼자 있을 때 에너지를 얻고, 외향형은 사람들 속에 있을 때 에너지를 얻는다.‘ 정도는 일반인들이 거의 다 알고 있다.

이렇게만 표현해서 다 해결이 된다면 내향형의 모든 걸 안다고 자부할 수 있어야 하는데, 외향형과 일반인이 보는 내향 인간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점 투성이다.

“뭐 해? 그냥 하면 되지.”라고 말하는 수많은 순간 내향형의 진짜 속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말로 꺼내놓지 않고 속에서 빙빙 도는 실체가 대체 무엇인지 지금껏 겪은 사례들로 소개하려고 한다.


특이하거나 대단한 사례는 아니고 학창 시절 갔던 수련회에서, 친구를 사귀는 과정 속에서, 대학교 때 나간 미팅에서, 맞선 보는 자리에서, 직장 생활 속에서 누구나 한 번쯤 겪었던 상황에서 내향인이 견뎌야 했던 고충과 내면을 풀어서 보여주고 싶다.


세상 돌아가는 게 외향적인 사람들에게 유리한 건 분명하다. 

누구와도 스스럼없이 친해지고, 갑작스럽게 주어진 인터뷰에서도 청산유수같이 말을 하고, 일을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유형은 외향인이 더 많다.

너무 닮고 싶었다.

나도 그렇게 해보려고 했지만 따라 할수록 어색하고 안 맞아서 역효과가 났다.

외향형이 잘하는 일 - 앞에 나가서 무리 이끌어가기, 친한 친구들을 불러서 서로 모르는 사람들을 한 자리에 앉혀놓고 술자리 만들기 - 을 해보려고 애쓰고 노력할수록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외향적인 사람도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눈을 감고 사색에 잠기기도 한다.

내향적인 사람도 사람들 속에서 같이 무언가를 하고 있고 앞에 나가서 발표도 한다.

내향인을 이해해 달라 구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향적이라는 걸 받아들이고 소극적인 자세에서 좀 더 적극적으로 나가기 위해 했던 노력과 실패와 성공을 여러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총 10화로 구성해보려 한다. 나와 비슷한 유형인들이 지난날들을 공감해 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내가 추구하는 글쓰기 철학 - 써서 남을 이롭게 하기 - 실천하는 두 번째 프로젝트 ‘성향’으로 다가가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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