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은 먹고 다니냐?

by 실버반지

실습처로 어느 병원 갈지 고르라고 할 때 '밥이 맛있다'는 조건이 걸려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었다.


당시 학원에서 그런 말을 왜 하는지 이해가 안 갔다.

그러다 현장에 나와보니 밥맛을 강조한 이유가 있다는 걸 가슴 깊이 깨달았다.


현장실습이라는 명목 하에 배움보다 일을 더 많이 하는 구조에서 밥은 매우 중요했다.


종일 걷고 또 걷고 다리가 퉁퉁 붓도록 심부름하고 일 한다. 바이탈 사인을 체크하다 보면 병상에 누워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환자 분들이 이런저런 대화를 원해 같이 이야기를 들어준다. 날 보면 간호사 일을 하는 손주 며느리가 생각난다는 할머니도 계시고, 날 추운데 반팔 하나 걸치고 괜찮냐고 묻기도 한다.

(바이탈 사인 : 활력징후 - 체온, 맥박, 호흡, 혈압)


낮 최고 기온이 영상 3도였던 쌀쌀한 날씨 속에 그저 씩 웃으며 말한다.


"일 하다 보면 더워요."


환자가 의료 처치와 관련된 질문을 하면 간호사실에 물어보러 스테이션에 갔다 왔다를 반복하고, 침상정리 몇 번 하다 보면 등에 땀이 줄줄 흐르고 체력이 달린다.


고단한 와중에 도래하는 점심시간 만이 유일한 휴식시간이다.

이때 한 입 입에 들어가는 음식이 영양사가 정성스레 짜준 식단에 감칠맛 나는 정갈한 반찬이라면 그 행복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핸드폰으로 찍을 수 있는 사진도 점심 메뉴 사진뿐이다. 같이 공부한 동료들이 이토록 행복한 점심시간에 찍어 올린 사진을 보면, 계란찜 같은 별식이 포함된 5첩 반상, 떡볶이가 들어간 간식을 곁들인 토마토소스 스파게티, 꽃게 다리가 보이는 두부 해물탕 등 침이 꿀떡 넘어가는 화려한 식판을 자랑곤 한다.


그렇다면 내가 일하는 곳의 식단은?


거짓말 안 보태고 정규직원들도 욕하는 맛대가리 없는 음식. 그 자체다.


맨 첫날 먹은 비빔밥은 고추장이 바닷물보다 짠 나머지 보기엔 맛깔나게 비빈 밥을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반은 버렸다.


둘째 날인가 셋 째날 나온 제육볶음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한 양념으로 고기의 육질이 좋은지 나쁜지 신선한지 아닌지 감쪽 같이 가려주었다.


이것은 메인 메뉴는 따로 있고 사이드로 나왔을 거라 여긴 자그마한 그릇에 담긴 잔치국수 몇 젓가락은 국물까지 싹 비웠음에도 오후 시간에 허기가 져서 겨우 걸어 다녔던 기억이 난다.


실습생에게 밥은 중요한 정도를 넘어 실습 생활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제는 배가 무척 고파 맛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허겁지겁 먹을 정도로 적응이 됐지만, 식사 후 배가 부르고 나른할 때쯤 조금 전에 먹은 게 음식이었을까를 떠올리면 답이 좀체 나오지 않을 때도 있긴 하다.


그래서 동료들이 단톡방에 연일 올리는 풍성한 양과 가짓수 많은 식판을 보면 부럽기만 하다.


난 이곳에서 누구에게 속 마음을 털어놓거나 대놓고 팩트 폭력을 날리지 못한다. 의지할 데 없고 외로운 실습생 아닌가.


밥도 그렇다. 아무리 부실했어도 짜고 맛없었다고 솔직히 말한 적이 없다.


오히려 선임 간호사들이 구내식당 음식이 왜 이렇게 별로 나며 한탄할 때면, 오랜 사회생활로 익힌 처세 기법으로 이렇게 답해주곤 한다.


"밖에서 먹는 음식이 다 그렇죠 뭐..."


음식 타박을 한 간호사는 내가 같이 음식 욕을 해줄 줄 알았나 보다. 그러지 않자 내심 놀랐는지 이렇게 응대했다.


"음.. 그럼 뭐 다행이고."


눈치와 개념으로 일해야 하는 무일푼 근로자 실습생은 밥이 별로였던 서러움은 뒤로 하고 오늘도 이렇게 웃어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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