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을 인큐베이터로 사용한다는 상상력

문창과 입시 '곰' 전문과 비평

by 정도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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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다시 느끼건대, 창작물은 현실을 뛰어넘지 못하는 듯하다. 지난 5월, 미국 조지아 주에서 스미스라는 이름의 산모가 뇌사 상태에 빠졌다. 뱃속의 태아는 21주를 지나고 있었다. 병원의 의료진들은 뇌사 상태에 빠진 산모, 사실상 시신을 의료 기술을 사용해 태아가 36주에 이르기까지 몇 주간 더 연명시키기로 한다. 의료진들은 조지아 주의 낙태법 상, 6주가 지난 임신을 중절하는 것은 불법이었기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사건에 개입한 사람들의 상상력이 무섭다. 감히 죽은 사람을 인큐베이터로 사용할 수 있다고 믿다니. 그것이 법을 지키는 숭고한 정신이라고 생각하다니. 스미스의 몸에 어떤 조치를 취했는지는 가족에게도 알릴 수 없는 극비 사항이라고 한다. 오늘의 습작에서도 이번 사건과 마찬가지도 산모의 몸을 마치 물건처럼 다루는 상황이 등장한다. 여성의 몸은 쉽게 재화나 도구가 되지만, 산모들은 특히 그런 위험에 취약하다.


글제: 어떤 남성이 임신하였다. 그 이후 벌어질 일을 쓰시오.(3000자 이내)

제목: 곰


나는 남자다. 군대를 다녀왔고, 임신 3개월째라고 한다.

의사가 말했다. 위에 구멍이 보이는데요. 혹시 뭐 생으로 드신 거 있어요? 몸에 좋다고 해서 곰의 피를 생으로 마신 적이 있었다. 가설은 두 가지였다. 곰의 수정란이 섞인 피가 위로 들어갔다가 위의 구멍으로 빠져나와 복강에 자리 잡았을 경우. 또 하나는 신이 아이를 내려주었을 경우.


곰 새끼인지 인간 새끼인지 구분하는 것은 현대 의술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럼, 배를 가르든 뭐든 해서 처치를 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 권한은 의사에게 있을 것 같지 않네요."

하얀 가운이 펄럭였다.


낙태가 금지된 지 오랜 시간이 흘렀다. 전쟁이라는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종교가 권력을 잡았다. 그 뒤로 낙태 가능 주수는 짧아졌고, 급기야 종교 협회에서 인정된 사유가 아니면 낙태를 할 수 없게 하는 법이 통과되었다. 임신과 출산에 관한 모든 영역에 종교가 손을 대면서 관련 분야의 의학 발달이 크게 더뎌졌다. 그래도 이건 경우가 달랐다. 나는 남자고, 뭔지도 모를 것을 뱃속에 키웠다간 그 끝은 안 봐도 뻔했다. 의사는 손을 뗐다. 괜히 갈랐다가 진짜 사람 아이면 어쩔 겁니까. 협회 사람과 연결해 드리죠.


나의 생물학적 성, 성관계를 한 적 없다는 증거, 첫 번째 가설을 서류로 제출하니 협회인은 심드렁하게 그만 가보라고 했다. 수술 허가는 언제 나오죠? 잘 모르죠. 일단 기다려보세요. 나를 보고 눈을 빛낸 것은 협회인 중에서도 권력에서 살짝 빗겨나간 아웃사이더들이었다.


"협회인들 느려터진 거 당신도 잘 알죠? 이러다가 낙태 가능 주수 놓치면 끝장이요. 수술 허가가 떨어져도 어느 병원이 손 더럽혀가며 수술해주고 싶겠나?"

우리가 당신 뱃속에 든 거랑 잘해볼게. 일이 잘 풀리면 수술은 물론 보수도 챙겨주지. 강 씨가 말했다. 나는 아웃사이더들의 권력 탈환에 이용되었다.


우선, 나는 '신을 품은 자'라는 이름으로 언론에 노출되었다. 수염을 절대 깎지 않고 길게 늘어뜨렸다. 개월 수가 늘며 나날이 불러가는 배는 순결함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질 나쁜 장비로 촬영해 잘 보이지도 않는 초음파 사진은 포토샵으로 선까지 딴 후에 인터넷에 업로드되었다. 뱃속의 태아는 신의 현신이라며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강 씨는 최전선에 나가 있는 군인들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내가 직접 가서 연설을 해야 한다고 했다. 군인들의 사기는 이런 걸로 올라가지 않아요. 내가 말했다. 알아, 군바리 위해서 가는 게 아니야. 전장의 비장함. 때려 패서 만들어 놓은 박수 소리, 그 안에 있는 네가 중요한 거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영상. 요컨대 전시 상황에 홍보로는 군대만 한 게 없다는 뜻이었다.


연설은 엉망이었다. 외워 둔 대본을 잊어버려 '순결'이란 단어만 수 차례 중얼거리다 무대에서 내려왔다. 영상은 적절히 편집되어 올라갔다. 흙먼지와 섞여 펄럭이는 수염과 내 입에서 주체할 수 없이 튀어나오는 수, 순겨, 순결. 볼록 튀어나오도록 강조한 배를 마주하고 어찌할 줄 모르는 군인의 표정이 압권이었다. 박수 소리만큼은 우렁찼다. 긴장해서 토하는 사진까지 숭고한 희생으로 제목이 붙여졌다. 원래 없었던 신성함이 점점 떨어지고 있었다.


강 씨가 사무실로 급하게 뛰어 왔다. 여당이 바이블의 내용을 가지고 우리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했다. 요약하자면 순결은 여성에게 부여되는 가치이며, 남성의 본분은 씨를 뿌려 자손을 번영케 하는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순결을 지고지순하게 간직한 남성의 이미지를 팔면 안 되었다. 차라리 성별의 경계를 허문 초월적 존재로 나가야 했었다. 강 씨가 머리를 싸매고 소파에 주저앉았다. 여당이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남성 표를 얻기가 힘들 것 같은데. 강 씨가 말했다. 거기엔 우스꽝스러운 연설도 한몫했다.

"우린 여기서 끝이겠네요."

내가 약속받은 수술 허가증이라도 요구하려는 순간, 강 씨가 내 어깨를 잡았다.


"낳자."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복강에 자리 잡은 태아가 온전히 자랄 때까지 내가 무사하리란 법이 없었다. 게다가 실컷 신을 품은 자 어쩌고 해 봐도 뱃속에 들은 것은 변하지 않는다. 곰 새끼다. 강 씨 당신도 알고 있잖아.

"곰이어도 상관없어. 우리가 알아서 할게."

강 씨가 말했다. 너 우물쭈물하는 사이에 낙태 가능 주수도 지났어. 명심해, 우리도 신고할 수 있어.


강 씨는 마지막까지 내 배를 가르느니 자연분만을 하느니 시끄러웠다. 드라마틱하려면 곰 새끼가 내 뱃가죽을 터뜨리고 나오는 게 좋단다. 그냥 나 뒤지라고 하지. 기자 앞이든 뭐든 내가 생난리를 피우니 강 씨가 나를 진정시키며 농담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무통 주사는 안 돼. 알지? 강 씨 얼굴에 주먹을 날리려고 했으나 그전에 나는 수술대에 묶였다.


곰은 생각보다 털이 북슬북슬하지는 않았다. 푹 젖은 솜털에 눈도 뜨지 못한 곰의 주위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벌써부터 강 씨는 곰에게 태초의 인간이니 하는 별명을 붙이기 시작했다. 이제 태어난 지 일주일도 안 된 새끼한테 쑥과 마늘을 퍼 먹이는 꼴을 봐야 하겠군. 그전에 누군가 내 배를 닫아주었으면 좋겠다. 의식이 멀어져 갔다.


글제는 남성이 임신한 상황을 상상하는 것이었다. 임신한 이유, 그 후에 벌어질 사건을 개연성 있게 맞추어야 했다. 나는 곰의 수정란이 위의 구멍으로 빠져나와 복강에 착상한 상황을 제시하였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상황이지만, 이런 방식을 선택한 첫 번째 이유는 글제에 숨겨진 함정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평생 남성으로 살아왔으나, 몸 안에 자궁이 숨겨져 있었다'는 상황을 편하게 상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에 간성이지만 그것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이 존재한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 이들을 글로 멋대로 묘사했다가, 그들의 삶을 침범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두 번째 이유는 산모의 몸이 물화되는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가장 적합한 형태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산모의 선택권과 태아의 생명권이 충돌하는 오래된 논쟁 말고, 그저 몸이 도구화되는 그 과정 자체만 떼 놓고 보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뱃속에는 이종의 수정란이 들어가게 되었다. 독자가 태아가 죽는지 사는지에 관심을 갖지 않길 바라서였다. 내가 오직 묘사하고 싶었던 것은 '상상력의 방향'이었다.


상상력에는 일정한 방향이 있다. 어떤 천재가 10년 동안 골방에서 썩으면서 짜낸 아이디어 같은 건 없다. 대신 상상의 방향을 조정하고 일직선으로 흐르게 하는 어떤 압력이 있다. 주인공이 임신을 하자마자 상황은 빠르게 변한다. 주인공은 일개 환자에서 갑자기 신성한 존재로 추앙되다가 배가 열린 채로 그대로 수술대에 방치된다. 그 상승과 하강에 주인공의 의지는 개입할 수 없다. 다만 상상력만이 브레이크를 잃고 질주할 뿐이다. 임신 중절에 허가가 필요하다는 발상, '낙태 가능 주수'라는 발상, 산모의 몸에 순결함과 신성함만을 부여하는 발상, (그러나 가끔 성적인 대상으로 격하하는 발상), 태아의 목소리와 성격을 상상하는 대단한 창의성, 무통 주사 없이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는 발상, 필요시에는 모든 과학력을 동원하여 산모보다는 태아를 살려야 한다는 목적의식, 하지만 인공 자궁이 상용화되어서는 안 되는 삼만 가지 이유를 적어내는 학구열. 이 모든 게 오랫동안 한 줄기에 꿰여 있었다. 그래서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당연한 것이 되었으나, 오히려 차에 받힌 탱탱볼이 받은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멀리 튀어나가는 모습처럼 보인다.


내가 '곰 새끼'라는 소재를 선택한 것은 임신 중절과 관련된 오래된 논쟁에 천착하는 것을 피하고 싶어서라고 말했으나, 꽤 겁쟁이처럼 보인다. 그 논쟁에 직접적으로 뛰어들지 않았으니 말이다. 그때 나는 '산모의 선택권 대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논쟁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논쟁이 구도부터 잘못되었다는 점을 알고, 그 구도 하에서 나올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모의 선택권과 태아의 생명권을 저울에 올려두면 언제나 생명권으로 기울어진다. '선택권'이라는 말은 '낙태할까 말까?'하고 촐랑대는 가상의 여성을 만들어낸다. 그에 비하면 생명이 걸린 태아는 매우 비장하다. 모체를 어느 정도 공격하거나 상하게 만드는 것은 살아남는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이 구도 하에서 모체와 태아는 서로 죽도록 싸우다가 결국 태아의 승리로 끝난다. 결국 무엇이 이 구도를 만들어냈는지에 대해 아무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이 문제는 '제삼자가 여성의 몸에 개입할 수 있느냐'로 보았을 때, 새로운 이야기가 나타난다.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신생아 수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중절은 금지된다. (임신 중단을 막으면 신생아 수가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는 빈약한 상상력은 덤이다.) 이 과정에서 법원이, 의료기관이, 국가가 여성 몸의 주권을 갈가리 찢어 나눠 가진다. 자의로 임신 중단을 선택할 수 없는 여성은 신체의 통제권을 제삼자에게 박탈당한다. 이 관점에서 조지아 주 사건은 매우 충격적이다. 산모는 뇌사 상태에 빠져 선택권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이었으며 아무도 그의 가족에게조차 동의 여부를 묻지 않았다. 아무도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오로지 태아를 충분히 성장시키기 위한 연명 치료가 진행되었다. 의료진들은 8월까지 연명 치료를 진행하기로 하였으나 모종의 이유로 6월 13일에 응급 제왕 절개가 시행되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비밀리에 부쳐졌다. 그리고 제왕 절개가 시행되어 모체와 태아가 분리되고 나서야 시신은 가족에게 인도되었다. 인격은 철저하게 몸에서 지워졌다. 그리고 그 몸은 완벽하게 정의상 인큐베이터가 되었다.


이 사건을 정당화할 수 있는 말을 생각해 보자.


A. 태아를 살리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태아를 살리기 위해 죽은 몸을 사용할 수 있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어떤 이유로 모체를 잃어버린 21주 차의 태아가 있다. 그리고 이 태아와 연고가 없는 시신 A가 있다. 태아는 이대로 방치하면 곧 생명 활동이 멈춘다. 이 시신 A에 태아를 이식해도 되는가? 조금 더 확장해서, 만약 세상에 모체가 없어서 사망 위기에 처한 태아가 수만 체 있다면, 장례식이 치러지기 전의 시체 수만 구를 가져와서 태아를 이식해도 되는가? 의료진을 옹호하는 사람이 이 질문에는 반대한다면, 그가 내세울 말은 다음과 같다.


B. 산모는 자신의 아이를 끝까지 책임질 의무가 있다.

산모가 죽은 후에도 태아에 대한 책임을 다해야 할 의무가 있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 볼 수 있다. 50년 전, 뇌사 상태에 빠진 산모 B가 있다. 연명 치료를 통해 태아를 성장시킨다는 발상도, 기술도 없어 태아가 사망한다. 그리고 현재 뇌사 상태에 빠진 산모 C가 있다. 의료진들은 연명 치료를 통해 태아를 성장시켜, 결국 제왕 절개 수술에 성공한다. 이 상황에서 산모 B는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고, 산모 C는 책임을 다한 것인가? 혹은 둘 다 책임을 다한 것일까? 그렇다면 산모 B의 시신을 50년 정도 얼려서, 발달한 과학기술로 결국 태아를 소생시켰다면 어떤가. 이때, 시신을 50년 동안 얼리는 것도 산모가 다해야 할 책임인가? B 산모와 C 산모는 모두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을 뿐인데, 사후에 그들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바뀌는 이유는 무엇인가. '책임'이라는 말에 상상력이 개입하였기 때문이다. 임신 중절을 금지하는 법은 '임신의 책임'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네가 선택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책임지라는 징벌과 다름없는 말을 여성에게 들이밀었다. 이 법 아래에서 의료진들은 연명 치료 중단을 임신 중절과 동일시하는 엄청난 창의력을 발휘한다. 멈추지 않는 상상력은 현대의 과학력을 동원하여 시신을 인큐베이터로 둔갑시킨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책임인지, '끝까지 책임지다'의 끝은 어디인지, 모두 여성이 선택할 수 있는 척하면서 자신들이 좋을 대로 한다.


C. 산모가 기뻐할 것이다.

지금 시점에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으므로 생략한다.


나는 '곰'을 쓸 때, 너무 문제를 과장하는 것은 아닐지 걱정했다. 아무리 소설이라지만, 배를 연 채로 수술대에 눈을 뜨고 있는 사람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그러나 현실은 훨씬 더 잔인하고, 훨씬 더 문제 투성이라는 점을 알게 되어 참담할 뿐이다. '곰'의 아쉬운 점은 주인공이 필요 이상으로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목적의식도 불분명하고, 목적을 이루기 위한 시도도 충분하지 않다. 어차피 이 세상에서 산모는 끝없이 대상화되고, 도구로 사용되는데 이를 창작물에서 재현해 봤자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다음에 산모를 주인공으로 쓴다면, 더 크게 움직이고, 주장하며, 저항하는 인물로 만들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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