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요. 그런 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어머니께 부탁하나 드릴게요. 제가 이번에 5학년 주임을 맡았어요. 어머님도 아시다시피 제가 작년에 부임해서 아는 어머님들도 몇 분 안돼요. 수아랑 어머님이 작년에 너무 잘 도와주셔서. 이번에 5학년 운영위원으로 어머님을 추천하고 싶은데, 부담은 갖지 마시고 가능하시면 한번 더 도와주세요"
학교에서는 담당선생님의 부탁으로 하더라도 학부모들이 지원한 것처럼 해주기를 바란다.
학년별 모임시간, 학년 운영위원을 지원받을 때 손을 들었다. 그렇게 5학년 운영위원이 되었다.
첫 운영회의날 선생님들과 행정실 직원분들까지 전체 식사를 하기 위해 인근 식당으로 이동했다. 나는 학원에 들려서 수업 준비를 하고 30분 정도 늦게 약속장소로 가는 길이었다. 영준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수지야. 니 혹시 6학년 운영엄마 잘 아나?"
"작년에 얼굴 몇 번 보기는 했는데 잘은 몰라요. 왜요?"
"아니. 그 엄마가 이상한 말을 해서 혹시나 하고 나와서 니한테 전화해 본다. 여기 분위기가 좀 요상타"
"그 짧은 시간에 분위기가 어떻게 이상해졌을까요? 왜 그러는데요?"
"내 요 앞에 나와 있으니까 내 먼저 보고 드가자"
"네. 언니"
운영위원은 교장선생님 포함 교사위원 4명. 행정실장님과 직원 1명. 학부모위원 6명(학년별 1명) 그리고 지역위원 2명으로 구성된다. 지역위원은 누구라도 지원할 수 있는데. 학생수가 많은 큰 학교는 총동창회 임원이나 퇴직공무원. 구의원 등이 지원한다. 그러나 우리 학교처럼 작은 학교는 학부모들이 하는 경우가 많다. 전화를 준 언니도 5학년 학부모다. 아이가 다리가 불편해서 휠체어를 타거나 목발을 짚고 다닌다. 아무래도 학교 소식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다. 운영위원이 되면 소식도 빨리 들을 수 있고 건의도 할 수 있겠다 싶어 내가 추천했다.
"아까 내가 인사할 때, 네가 추천해서 지원했다 했다이가. 그거 아니라도 니랑 내랑 친한 거 알 건데. 6학년 엄마가 내한테 이상한 말을 하는 거라"
"무슨 말요?"
"네가 싸가지가 없다고. 니 하는 줄 알았으면 본인은 안 했을 꺼라데. 그 말을 다른 학년 엄마들이랑 같이 걸어오는데 하는 기라. 지금 교장 선생님 옆에 앉아가 웃어가며 밥 묵고 있다. 거기서 또 무슨 말을 할지? 내가 신경 쓰여서 말해줄라고 나왔다. 뭐 생각나는 거 없나?"
기억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글쎄 작년에 학부모회 모임 할 때 한 번인가 봤는데. 그때 말도 안 섞었어요. 수아가 반장이라 나는 6학년 대표였고, 그 엄마도 자기 딸이 반장이라 5학년 대표였는데 모임에 안 왔거든요."
4월 운동회를 앞두고 학년별 학부모대표들이 만나는 자리에 5학년 엄마만 안 왔다. 회장엄마가 여러 번 전화해서 뒤늦게 오기는 했는데 자리에 앉지도 않고 입구에 서서 "바쁜데 왜 자꾸 전화해요. 5학년은 알아서 할 테니 빼고 하세요" 하고 나갔다.
운동회 때 입을 단체티 문구랑 학년별 색상도 정해야 하고, 애들 선물이며 선생님 간식도 의논해야 해서 이전부터 친분이 있던 3학년 엄마가 다시 데리러 나갔다. 그동안 엄마들은 밥을 먹으며 그 엄마 이야기도 반찬으로 곁들였다. 시끄러운 고깃집에서 엄마들의 목소리도 커졌다. 10분쯤 지나 두 명이 다시 식당으로 들어왔다. 5학년 엄마는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5학년은 인터넷으로 주문했어요. 색깔은 검은색으로 했으니 참고하세요. 아이들 간식은 5학년 반장엄마들 하고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마시고. 그 외 비용은 1/n 계산해서 말해주세요. 이체할게요. 됐죠!" 그러더니 다시 문을 열고 나갔다. 이전보다 더 큰소리로 더 거친 말이 오갔다. 그 자리에 있던 누구랄 것도 없이 한 마디씩 말을 보탰다.
6학년이 졸업하면서 엄마들도 졸업했다.
나는 다시 둘째 엄마로 학교 일을 하게 되었고, 다른 저학년 엄마들도 이런저런 이유로 빠졌다.
식당에 들어서니 교장선생님께서 손짓을 하며 나를 불렀다.
"아이고 부위원장님 이리로 오세요. 아주머니 여기 식사 주세요~"
하필 그 테이블에 진영이 엄마도 있는데... 마주 앉기 싫어서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내 맞은편에는 교장선생님께서 추천해서 지역위원으로 들어오신 퇴직한 교장선생님이 앉아 계셨다.
"잘 부탁합니다. 최수환 교장선생님이 부탁하셔서 오기는 했는데 저보다 학부모이신 부위원장님께서 하시는 게 더 좋았을 텐데 말이죠. 저는 감투만 쓰고 있겠습니다. 하하하"
"무슨 말씀을요. 선생님께서 위원장을 맡아 주셔서 든든합니다. 열심히 돕겠습니다."
의례 하는 인사말이 몇 번 오가고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이분은 그 뒤로 한 번도 학교에 오지 않으셨다.
최수환 교장선생님도 9월 자로 교육청 발령이 나서 떠나셨다. 나는 부위원장 이름을 달고 위원장 일도 해야 했다.
몇 숟가락 먹지도 않았는데 벌써 체한 것 같았다. 6학년 엄마는 하하 호호 잘 웃고, 잘 먹었다.
'그 언니 잘못들은 거 아니야?' 머릿속은 복잡하고 얼굴은 계속 굳어있었다. 표정관리가 안 됐다. 오히려 내가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꼴이 됐다.
'에이 차라리 그 말을 전하지 말지, 몰랐으면 이렇게 불편하지 않았을 텐데...' 나를 위해서 해준 영준언니의 친절이 나만 이 자리에 어울리지 못하게 하는 것 같아 원망스러웠다.
그 뒤로도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종종 질문을 받았다.
"수지 엄마, 진영엄마랑 무슨 일 있었어? 자기 어떤 성격이 이냐고 여기저기 묻고 다니더라고, '나서는 거 좋아하나 보다. 온데 설치고 다닌다' 이러면서"
어이가 없었다. 화도 났다. 나도 좀 알아봐야겠다 싶어서 수지랑 여러 번 같은 반을 했고, 한 아파트에 사는 나경이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나경언니, 진영이 엄마 잘 알죠?"
"안 그래도. 현규엄마가 자기 얘기하더라고. 수지엄마가 이해해요. 아, 현규가 큰 애야, 우리 유나랑 같은 학년이라 큰 애들 때부터 친하지. 그 엄마가 나쁜 사람은 아니야. 큰애한테 기대를 많이 했는데 애가 그만큼 안 해주니까 속상한가 보더라고. 그나마 딸은 반장도 하고 잘하는데 형편이 어려워져서 척척 해주지도 못하고 그래서 부러웠나 봐. 어쩌겠어 딸내미들이 똑똑하니까 이런 일도 겪는 거지. 수지엄마가 이해 좀 해줘요."
'왜, 무슨 일 있었어?'라고 물어봤으면 이러쿵저러쿵 속말을 했을 텐데 저렇게 말하니 덧 붙일 말이 없었다.
"네... 이런 전화해서 미안해요"
대놓고 말하면 '아니다'라고 할 텐데 봄바람 불 듯 살랑 지나가고, 잊을만하면 또 살랑 지나가니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공식적인 모임에서 만나면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
진영이는 졸업을 했고 그 엄마도 더 이상 학교에서 볼일이 없었다.
하루는 큰 대로로 가는 지름길인 지하도로를 지아가는 데 맞은편에서 진영이 엄마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