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크로넨버그 BEST 5
주위 사람에게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추천하는 건 위험한 짓이다. 자칫 상대로 하여금 그간 나누었던 우정을 의심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크로넨버그의 영화는 그만큼 보기 끔찍하고 혐오스러우며 무척 난해하다. 그는 신체의 변형과 훼손, 그리고 다른 요소들―곤충, 테크놀로지, 기계 등―과의 결합을 통해 인간을 일종의 괴생명체처럼 다루고, 사물의 크리처화를 통해 세계의 논리와 질서를 무너뜨린다. 거의 구토를 유발해내는 이미지들은, 그러나 그 괴기한 형상에도 불구하고 그만큼 유별난 매혹을 지니고 있다. 귀신이 무서워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도 벌려진 손가락 틈 사이로 희미하게 눈을 뜨는 것처럼 그의 세계는 벗어나고 싶은 원심력과 끝내 그러지 못하는 구심력의 팽팽한 긴장 속에서 그야말로 아슬아슬하게 유지된다.
얼핏 보기에 크로넨버그의 영화는 끔찍한 외면에 천착하는 듯 보이지만, 그는 그것을 질료로 삼아 인간의 본성과 내면, 그리고 정신에 대해 사유하게 만드는 진중한 작가다. 커리어 초기에는 단출한 스토리라인 속에 번뜩이는 아이디어와 끔찍한 시각 효과, 그로테스크한 분위기에 몰두하였지만, <비디오드롬>을 분기점으로 그는 유연한 서사 전개 속에 인간의 내면과 정신에 관한 높은 수준의 철학적 사유를 녹여내며 깊이와 너비감을 확보하였다. 물론 그로 인해 영화의 난해함과 모호함은 더욱 배가되었지만, 크로넨버그는 다른 감독들은 흉내조차 내지 못할 해괴한 소우주의 창조주가 되었다.
그의 영화가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이야기를 인간의 상식과 통념 바깥에서 진행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그의 영화를 보는 것은 사실상 그의 영화를 보지 않겠다는 선언과도 같다. 그는 현실 세계와 인간이라는 고정된 개념을 허물고 완전히 새로운 시공간을 창조하거나, 정신 분석의 개념을 서사에 용해시켜 인물을 하나의 인간이 아닌 정식화된 개념으로서 움직이게 만들거나, 모순으로 가득한 미국의 사회 구조와 역사를 서사에 욱여넣어 알레고리화하는 까다로운 예술가다. 때문에 그의 소우주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현실의 논리와 이성을 일정량 버려야 하며(<크래쉬>), 작중 세계와 인물이 상징하는 바를 거듭 정식화시키고(<스파이더>) 때로 해체하는(<코스모폴리스>) 과정을 거쳐야 한다.
한편, 크로넨버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감독이기도 하다. 예컨대, 그는 <데드존>에서 80년대 전쟁 분위기를 조장하던 레이건 대통령에 대한 강한 적개심을 적나라하게 표출하였고, <M. 버터플라이>에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서양의 뒤틀린 인식을 직접적으로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경향은 커리어 후기로 갈수록 점점 짙어지는데, 그로 인해 크로넨버그 특유의 혐오스러운 이미지들은 완전히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폭력의 역사>는 <데드존>과 <M. 버터플라이>에 비해 온순하고 은유적이지만, 훨씬 더 폭발적인 효과를 낸 걸작이다. 영화는 다정해 보이던 남자의 내면에 추악한 폭력성이 숨겨져 있음을 탄로하며, 겉과 속이 다른 미국 역사의 모순을 날카롭게 꼬집는다. 남자는 아직 청산되지 않은 과거의 잔해들을 모조리 처단하고 새롭게 출발하려 하지만, 그의 비밀을 알게 된 가족들은 차마 그를 반기지 못한다.
이후, 크로넨버그는 <이스턴 프라미스>, <데인저러스 메소드>, <코스모폴리스>, <맵 투 더 스타>를 연이어 연출하며 사회 구조와 특정 학문 이론 등을 깊숙이 탐구하고 해석하는 데 공을 들인다. 그런 탓에 크로넨버그 특유의 B급 호러 영화를 좋아하던 상당수의 팬들은 무언가 충족되지 않은 듯한 허전함을 느끼며, 그의 커리어 초기 영화들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그러다 마침내 2022년에 이르러 크로넨버그는 그 애절한 바람에 응답이라도 하듯 애초부터 작정하고 자신의 커리어를 총망라한 것 같은 걸작 <미래의 범죄들>을 세상에 내놓는다. 아마 크로넨버그의 올드팬이라면 <미래의 범죄들>에 환호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아들 브랜든 크로넨버그의 두 번째 장편 영화 <포제서>를 해설하는 시간에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지금 우리에게는 두 명의 위대한 데이비드가 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데이비드 린치, 그리고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혹여 이 말을 듣고 핀처의 팬들이 불평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정성일 평론가의 말에 100% 동의한다. 적어도 현직 '데이비드' 가운데 가장 위대한 감독 두 명은 데이비드 린치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다(물론 이 중에서 한 명을 고르라면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데이비드 린치를 고를 것이다).
무척이나 뛰어난 두 작품 <플라이>와 <엑시스텐즈>를 두고 정말 많은 고민을 했다. 결국, 내 선택은 <엑시스텐즈>였다. <엑시스텐즈>는 점점 환상이 현실을 대체해가는 현대의 흐름과 세기말의 감성이 절묘하게 뒤섞인 영화다. 무엇보다 엑시스텐즈라는 가상 현실 게임 속 생경한 풍경들은 그야말로 압도적인 매혹을 불러일으킨다. 영화는 엑시스텐즈를 둘러싼 현실주의자와 환상주의자 사이의 결투를 그리는데, 이는 현실과 환상이라는 예술사의 거대한 두 축의 대립을 의미하기도 한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엑시스텐즈>는 환상을 옹호하는 쪽이다. 환상주의자처럼 보였던 주인공들은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현실주의자로 밝혀지지만, 그 반전이 폭로되는 시공간조차 환상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영화는 결코 환상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조명한다. 말하자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영화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한번 강을 건너면 다시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는 이야기 구조가 <엑시스텐즈>에서는 영화 전체를 감싸는 거대한 환경으로 구축되어 있었던 셈이다. 크로넨버그는 환상이 현실을 교란한다고 여기는 자에게 이렇게 비아냥대는 것 같다. "넌 이미 환상 속에 있는걸?" 요컨대 인간성의 상실을 우려해 환상을 없애려 했던 현실주의자의 노력은 크로넨버그에겐 퇴행적인 행동으로 간주된다. 그는 인간이 왜 현실에만 붙박여 있어야 하는지 반문하며, 인간성의 재정의를 요구한다. "환상 속에 살면 인간이 아니란 말인가." 이 질문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는 현재, 그리고 갈수록 그 경향이 짙어질 미래에 더욱 유효한 질문이 될 것이다. 의도와 상관없이 <엑시스텐즈>는 시대적 현상에 관한 예언적인 영화가 될 것 같다.
흥미롭게도 영화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감각은 촉각이다. 이는 대개 시각과 청각에 의존하는 영화 매체의 특성과는 사뭇 다른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영화는 탯줄처럼 생긴 바이오 포트와 인간의 척추에 박힌 배꼽 모양의 플러그가 연결되는 것을 게임기의 전원을 켜는 행위로 설정하는데, 두 장치가 연결될 때 고무 재질 특유의 말랑한 촉감과 슬라임을 주무르는 것 같은 끈적한 사운드는 마치 4DX 영화를 보는 듯한 실감을 자아낸다. 특히, 수정된 양서류의 알에 합성 DNA를 넣어 성장시킨 동물로 묘사되는 바이오 포트는 그 유기체적인 성질에 따라 생명을 부여받은 장기처럼도 보이고, 거대한 라텍스 재질의 콘돔처럼도 보인다. 이 괴상한 생명체를 인간의 척추에 박혀 있는 플러그에 삽입하는 행위는, 그래서 무엇보다 통각적이면서 동시에 섹슈얼하다. 무척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 감각은 관객들로 하여금 각자의 환상으로 들어가 그 괴이한 것을 주무르고 몸에 삽입하는 추체험을 가능토록 만든다. 그렇게 영화는 관객들을 엑시스텐즈 게임에 접속시키는 신비한 마력을 선보인다. 이는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사악한 제안이다.
상영 시간이 한 시간 조금 넘는 <스테레오>와 <미래의 범죄>를 중편으로 분류한다면 <파편들>은 크로넨버그의 사실상 장편 데뷔작이다. 그런 만큼 <파편들>은 그의 어떤 영화보다도 끔찍하고 혐오스럽다. 호러 영화를 잘 보는 편인 나도 이 영화는 상당히 버거웠다. 혐오스럽게 생긴 기생충이 인간의 배 속에서 꿈틀거리고, 인간의 얼굴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화상을 입히며, 그것도 모자라 인간의 키스를 통해 입에서 입으로 둥지를 옮기는 이미지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공포를 선사한다. 그러나 이 버거움이 영화를 중단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끔찍한 이미지에서 발산되는 불가해한 매혹,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기어이 보고야 말았다는 이상한 카타르시스가 우리를 화면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섬 아파트에 갇힌 인간과 인간의 몸속에 갇힌 기생충은 갇혀 있다는 동일한 상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묘하게 연결된다. 인간과 기생충은 각기 다른 이유로 갇힌 공간에서 벗어나려 애쓰는데, 이때 기생충의 탈출은 단순한 탈출에 머물지 않고 다른 인간에게로의 전이로 이어진다. 그런 점에서 기생충은 황급히 제거해야 하는 고약한 괴물이 아니라 인간 내면에 잠재한 어두운 본성을 상기시킨다. 기생충의 숙주가 된 인간들은 대부분 죽지 않고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살아나 폭력과 성에 대한 욕구를 극한으로 표출한다. 말하자면 기생충의 침투는 평범한 인간의 심연에 세워진 억압의 장벽이 붕괴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게 인간은 기생충이라는 어두운 본성을 받아들여 도덕의식이 전무한 사나운 짐승으로 변모한다.
크로넨버그의 초기 영화들이 그렇듯 <파편들> 역시 스토리라인은 간단하다 못해 사실상 없는 수준이다. 작가이자 글쓰기 교육자인 K. M. 웨일랜드의 구분에 따르면 <파편들>은 '스토리'가 아니라 '상황'의 영화다. 영화는 인물의 내적 변화와 서브플롯 없이 분명하고 직접적인 해결책이 있는 곤경을 전면화할 뿐이다. 그러나 절묘하게도 이 영화는 스토리라인의 부재가 단점이 되기보다 오히려 살 떨리는 공포감을 순수하게 추출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파편들>은 상황의 끔찍함을 조금씩 변주하고 점층적으로 심화시킴으로써 숨 막히는 긴장감과 독창적인 잔혹함을 분출한다. 영화를 보다 보면 이런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그래, 이게 크로넨버그지!"
<폭력의 역사>는 크로넨버그의 이전 행보와는 완전히 다른 결을 보이는 영화다. 사회적 금기와 억압된 무의식 등의 세계를 끔찍하고도 파격적으로 선보였던 그는 <폭력의 역사>에 이르러 다소 점잖아진다. 그러나 이것이 영화의 품질마저 떨어뜨린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많은 작가주의 감독들이 몇 번의 변곡점을 지나듯 크로넨버그도 하나의 변곡점을 지난 것뿐이다. <폭력의 역사>는 <파편들>처럼 혐오스럽지도 않고, <비디오드롬>처럼 기괴하지도 않으며, <크래쉬>처럼 금단의 이미지를 보여주지도 않지만, 그것을 능가할 만큼 유려하고 단단하며 섬세하다.
<폭력의 역사>라는 제목을 두고 혹자는 지나치게 거창하고 엄숙하다고 지적하지만, 이 제목이 사실 <미국의 역사> 혹은 <아메리칸 드림의 역사>라는 점을 인지한다면 매우 적합한 제목이라는 것을 납득할 것이다. 영화는 겉보기에 선한 인물처럼 보이는 톰 스톨이라는 건실한 남자에게 무자비한 갱스터들이 찾아오는 것을 시작으로 그의 추악한 내면과 과거를 들추어내는 데 모든 힘을 쏟는다. 그는 표면의 이미지와 달리 사람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것으로 한때 이름을 날린 킬러 중의 킬러였다. 그의 추악한 과거가 폭로되고, 가족이 갱스터 무리에 위협을 당하자 억눌려 있던 그의 폭력성은 분출하는 화산처럼 그야말로 거침없이 뿜어져 나온다. 크로넨버그는 범죄 액션 장르의 외피를 빌려 잔인한 살인 장면들을 매우 사실적으로 보여주는데, 특히 톰 스톨에게 살해당한 인물들을 아주 집요하게 포착함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숨겨져 있던 어두운 본성의 실체를 직시하게 만든다.
크로넨버그가 이상할 정도로 비장하게 톰 스톨이라는 킬러를 파헤치는 것은 그가 미국이라는 나라 자체를 의인화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선인과 악인을 오가는 톰 스톨의 이중성은, 세계 질서를 지키는 영웅으로 스스로를 포장하지만, 수많은 인디언을 학살하고 긴 세월 인종 차별을 주도해왔던 미국의 모순된 역사를 상기시킨다. 크로넨버그는 그러한 미국의 역사를 폭력의 역사로 규정하면서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아주 현실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앞으로 이 괴물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갱스터들을 모조리 처단하고 다시 선인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톰 스톨은 마침 밥을 먹고 있던 가족들 곁에 조용히 앉는다.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화면을 장악하는 사이 크로넨버그의 질문은 갈수록 가혹하게 우리의 어깨를 짓누른다. 영화는 답을 유보하지만, 우리는 답해야 한다. 그 괴물은 상상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이다.
<크래쉬>는 내가 지금껏 봐온 영화 가운데 가장 괴상한 영화 중 하나다. 영화는 자동차의 충돌을 보며 성적 쾌감을 느끼고, 금속성 물질과 섹스를 나누는, 정상인의 시각에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정신병자들의 얘기를 다룬다. 크로넨버그는 에로스와 타나토스가 뒤범벅된 자동차라는 물성을 통해 인간의 상식을 완전히 해체한 뒤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인간을 재정의한다. 여기서 자동차의 충돌은 남성과 여성의 섹스와 동일시되며, 이들 사이에 끼어 있는 차가운 금속 물질은 섹스의 뜨거운 성질과 맞물리며 기이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그 끝에는 가장 황홀한 쾌락으로 묘사되는 죽음이 있다. 한마디로 그들은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섹스를 하고, 이상한 지점에서 오르가즘을 느끼며,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죽음을 욕망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불경하고도 생경한 광경에 감각은 끝없이 확장되고 인식의 틀은 무한히 넓어진다. 그러니까 적어도 지금 완전히 새로운 것을 보고 있다는 그 매혹만큼은 부정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크래쉬>는 크로넨버그의 영화가 항상 그렇듯 뒤돌아보지 않고 질주하는 영화다. 이 영화가 칸영화제에서 논쟁의 대상이 되었음에도 심사위원 특별상을 받았던 것은 바로 대담함과 뻔뻔함 때문이었다. 카이에 뒤 시네마도 이 말도 안 되는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는지 1996년 최고의 영화 1위로 선정하였다. "삶은 욕망이지, 의미가 아니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격언처럼 <크래쉬>는 끝없는 쾌락의 세계를 보여주면서 마침내 모든 것이 무의미해 보일 지경까지 우리를 끌고 간다. 쾌락은 끝없이 더 큰 쾌락을 요구하고 종국에 무의미를 낳으며 그것은 죽음으로 종결된다. <크래쉬>는 이 간단한 욕망과 파멸의 관계를 아주 이상한 방식으로 파헤치면서 어떤 새로운 경지를 보여준다. <크래쉬>는 누구나 사랑할 영화는 아니지만, 누군가는 아주 열렬하게 사랑할 영화다.
처음엔 크로넨버그의 커리어 초기 영화에서 느낄 수 있었던 해괴함이 다시 재현된다는 소식에 설레었다가, 레아 세두, 비고 모텐슨, 크리스틴 스튜어트라는 화려한 출연진을 보고 심장이 쿵쾅거렸다가, 필름 코멘트에서 2022년의 영화 1위로 선정되었다는 기사를 접하며 마침내 미칠 지경에 이르렀다. 때로 지나치게 높은 기대감 때문에 영화에 실망하게 되는 경우가 생기곤 하는데, <미래의 범죄들>은 그 높은 기대감을 충분히 충족시키고도 남는 걸작이었다.
시간적 배경은 미래이지만 주위 건물은 전부 낡고 음침하고 고대적인 세계에서 펼쳐진다는 점부터 심상치 않은 <미래의 범죄들>은 인간의 상식과 개념을 완전히 허물고 그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요하는 난해한 영화다. 주인공 사울 텐서는 자기 몸에 새로운 장기를 이식한 다음, 장기가 증식하면 외과 의사 출신 카프리스의 집도 아래 그것을 제거하는 해부 수술 쇼를 벌인다. 이 세계에서 장기의 이식과 제거는 하나의 예술 행위로 인식되며, 사울 텐서와 카프리스는 이를 통해 관객들에게 깨달음을 주는 행위예술가로 받아들여진다(사람들은 사울 텐서를 가리켜 내면의 풍경 화가라고까지 말한다). 이때 영화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사울 텐서만이 이 세계에서 고통을 느낀다는 점이다. 허문영 평론가는 본인의 저서 『보이지 않는 영화』에서 라스 폰 트리에의 <멜랑콜리아>를 설명하며 "좋은 예술가는 시대의 병을 판정하고 치유책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병을 누구보다 깊이 앓는 사람"이라고 적었다. 이 말에 따르면 사울 텐서는 새롭게 자라나는 장기에 저항하며 직접 고통을 겪는, 그리고 그 과정을 직접 시연하는 진정한 예술가다. 요컨대 그가 선보이는 시연의 과정, 그러니까 배를 갈라 증식된 장기를 제거하는 수술 과정은 고통이라는 감각을 통해 인간의 실존을 증명하는 진중한 의식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켜보는 관중들은 고결한 고통 따위에 아무 관심이 없다. 해부 수술 쇼가 끝난 뒤 국립 장기 등록소의 수사관 팀린은 사울 텐서를 찾아 이렇게 묻는다. "수술이 곧 새로운 섹스죠?" 진중한 행위 예술에서 그녀가 얻은 깨달음이라곤 고작 '수술이 곧 새로운 섹스'라는 것뿐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사울 텐서와 카프리스는 그저 관중들 앞에서 포르노그래피를 찍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 물론 이것은 완전히 맞는 말이다. 그들은 나이프가 신체를 찌르고, 몸을 해부할 때에 쾌감을 느끼는 인물들이다. 심지어 사울 텐서는 갈라진 복부를 지퍼로 징그럽게 봉합한 다음 "지퍼는 별도의 섹스 어필이 있지."라고 말하고, 카프리스는 이에 응답하듯 그 지퍼를 열렬히 애무한다.
영화는 계속해서 미와 추, 그리고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뒤섞으며 기이한 순간들을 창조한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더럽히고 싶고, 쾌락에는 고통을 첨가하고 싶은 인간의 어두운 본성이 고스란히 외면화되었을 때의 세계를 그린 듯한 <미래의 범죄들>은 조금의 물러섬도 없이 그렇게 계속 진행된다. 여기에 크로넨버그는 미래의 인간상 중 하나로 합성물질을 소화시키는 신인류를 제시함으로써 새로운 지평으로 들어선다. 작중 소화 시스템의 변이를 추구하는 자들은 플라스틱을 현대적 음식이라 규정하며 "자신들의 산업폐기물을 먹기 시작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플라스틱 소화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장기에 변이를 가하고, 그러한 인간들 사이에서, 변화한 신체의 유전적 형질을 그대로 갖고 태어난 아기를 얻는 데까지 성공한다. 타고난 몸에 변형을 가한다고 그것이 유전적 형질이 될 수는 없지만, 영화는 그것이 기적적이게도 가능하다는 점을 가정한다. 비록 그 아기는 이미 죽고 없지만, 신인류의 탄생 가능성을 알게 된 사울 텐서는 점차 그들의 추종자가 되어간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장기 증식의 축적으로 인한 일종의 돌연변이 현상을 통해 직접 플라스틱 소화 시스템을 갖춘 신인류가 되어 환희한다.
크로넨버그는 새로운 인류의 가능성과 불가해한 미래 세계를 인간 상식 바깥에서 탐구하며 도리어 인간성과 예술, 그리고 쾌락과 고통에 관해 새롭게 사유하게 만든다. <미래의 범죄들>은 우리가 규정해 놓은 관념들을 해체하고 다시금 그것들을 재정의하게 만드는 마력의 힘이 있다. 크로넨버그가 "먼저 영화를 본 사람 중 한 명은 이 영화를 보다가 거의 공황장애를 겪을 뻔했다고 하더라."라고 직접 밝힌 것처럼 영화의 수위가 낮은 편은 아닌지라 관람에 어려움이 예상되긴 하지만, 크로넨버그가 산출하는 진정한 매혹을 제대로 느껴보고 싶다면 언젠가는 꼭 한 번 보기를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