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경은 절망의 다른 이름이다. 위대한 영화를 보았을 때, 경이로운 비평을 읽었을 때, 혹은 말로 그 비평의 해설집을 듣게 되었을 때, 존경이란 감정은 어느새 깊이를 알기 어려운 절망으로 변모한다. 죽었다 깨어나도 저 위치에 도달할 수 없을 거라는 탄식이 정신과 육체 모두를 마비시킨다. 만일 지금 절망에 빠져 있다면 이제 불안에 떨 차례다. 재능, 노력, 열정, 잠재성 등 모든 영역에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지금이라도 걸음을 멈추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 건 아닐까. 이 절박한 괴로움은 한 번의 강렬한 임팩트에 머물지 않고 수시로 숨통을 조여온다.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악귀와 다를 바 없다.
아이러니한 건 얼마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존경의 대상에 가닿기 위해 신발끈을 조여 맨다는 것이다. 참으로 기묘한 일이다. 어째서 절망은 새로운 출발로 이어질 수 있는 걸까. 불안이라는 악귀는 여전히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그곳에 닿기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표면의 목표는 여전할지 몰라도 심연의 목소리는 이미 기운을 잃은 상태다. 물론 반문할 수도 있다. 나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고. 그렇다면 이 반문에 다시 답해야 한다. 정말 존경했느냐고. 해 볼 만한 상대는 존경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찬양에 지나지 않는다.
절망에 빠진 사람은 도저히 존경의 대상을 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절망에 빠져 본 적 없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존경해 본 적 없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때로 그런 사람이 부러울 때가 있다. 존경이라는 비가시적 UFO는 가끔 지나칠 정도로 약이 오르게 만들어 애초에 만남 자체가 없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까지 들게 한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한번 성사된 만남은 그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 이 비극적인 비가역성 앞에 인간은 참으로 무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