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희망의 건너편>

by 백치


<돈>, 로베르 브레송


LArgent-1983.jpg <L'argent>, 1983


돈, 도덕의 하수도: 한 소년이 아버지에게 용돈 가불을 요청한다. 아버지는 거절하고 소년은 어머니를 찾아간다. 똑같이 거절당하고 돈이 궁해진 소년은 위조지폐를 쓰자는 친구의 제안을 듣고, 근처 사진점에 가 작은 액자를 사고 진짜 돈을 거슬러 받는다. 사진점 사장이 뒤늦게 이를 알아채지만, 소년들은 이미 떠나고 없어 다음 손님에게 위폐를 떠넘기기로 한다. 막 일을 마친 수리공이 봉급을 쪼개기 위해 사진점에 찾아오고, 직원은 지시받은 대로 그에게 위폐를 넘긴다. 이후 근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친 수리공은 사진점에서 받은 돈으로 값을 치르고, 곧 위폐임이 적발돼 위조범으로 몰려 법정에 서게 된다. 사진점 직원은 '처음 보는 사람'이라며 위증하고 수리공은 실형에 처해진다.

<돈>의 발단이 되는 이 이야기는 그 수직적 구조가 선명하다. 책상 뒤에 앉아 펜대를 굴리는, 관료적 가부장에서 시작된 돈의 공백이 아들에게로 전해지고, 아들은 그 공백을 친구의 위폐로 메꿔 중간자인 상인에게로 옮긴다. 상인은 책임을 피하기 위해 하층 노동자인 수리공에게 이를 떠넘기고, 더 이상 이를 반사할 수단이 없는 그에게 모든 죄가 물어진다. 오폐수 파이프에 마개를 씌우며 등장한 수리공 이본의 작업복은 기름의 검댕으로 얼룩져있다.

돈의 논리는 돈이 없는 감옥에서도 건재하다. 누명을 쓰고 수감된 이본은 그 안에서 활발히 이루어지는 물물교환을 목격한다. 담배와 고기, 숟가락 따위가 모두 돈이 되어 이 손에서 저 손으로 넘어간다. 이본은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의사가 주는 수면제를 삼키지 않고 모아 자신의 돈을 구축한다. 그는 이제 정말로 위폐범이다.

어느 날 예의 그 법정에서 위증한 사진점 직원, 즉 이본을 감옥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 같은 교도소에 수감된다. 그곳에서 이본의 딱한 사정을 들은 그는 이본에게 동반 탈옥을 제안하고, "내가 너를 이 꼴로 만들었으니 나가게 되면 모두 갚겠다"라고 말한다. 속죄의 약속처럼 보이지만, 감옥의 시스템으로 보건대 이 역시도 단순한 물물교환일 뿐이다. 양심과 윤리마저 교환물이 되었음이 선언되는 장면이다.

형기를 마친 이본은 다시 사회로 뱉어진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수감되었을 때의 이본과 같은 인물이 아니다. 그는 이미 교환의 논리에 융해되었다. 살인과 절도로 생계를 이어가던 이본은 다음 타겟으로 중년의 어느 여인을 고르고, 적절한 기회를 기다리며 그녀의 집까지 쫓아간다. 자신의 집으로 불쑥 쳐들어온 괴한에게 이 여인이 비친 반응은 놀랍게도 공포의 비명이 아니라 따뜻한 수프다. 졸지에 식객이 된 이본은 헛간에 잠자리를 펴고 기이한 숙박을 시작한다.

여인은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이본을 계도하기 위해 애쓴다. 그녀는 집안의 주인인 남편에게 모진 대접을 받고 애물단지인 장애인 아들을 두고서도 군소리 없이 매일을 살아내는 인간이다. "노동은 보상을 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그녀는 말한다. 그녀의 비호혜적 세계관은 언뜻 이본을 잠식한 비정한 논리를 씻어낼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기독교적 구원'의 기대는 이본이 헛간의 도끼를 집어 들며 산산이 부서진다.

그가 여인의 일가족을 살해하기 전 아주 중요한 장면이 있다. 여인을 따라 빨래터에 간 이본은 손수 나무의 열매를 따 그녀와 나눠먹는다. 열매는 그 자체로 '대가 없는 노동'에 대한 대가로 하늘이 내려주는 '대가 없는 결실'이다. 목가적이다 못해 성서적인 이 행위는 이본이 파괴적 시스템의 새로운 대체재를 찾은 듯한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돈의 논리에 깊숙이 찌든 이본에게 이것은 채무 관계로의 진입일 뿐이다. 무상으로 열매를 먹은 여인은 이본에게 빚을 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본은 살해 직전 여인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다. "내 돈 어딨어?"

일을 마친 이본은 근처 카페에 가 음료를 한 잔 마시고, 자신을 찾아온 경찰에게 '내가 그들을 죽인 범인'이라며 자수한다. 경찰은 그에게 수갑을 채우고, 구경꾼으로 붐비는 현장을 벗어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이 결말에는 구원도 속죄도 없다. 논리의 일관된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이본은 법을 어겼고, 그래서 체포된다. 사회에 진 빚은 형기를 채우면 다시 변상될 것이다. 그렇게 단순한 일이다.



<희망의 건너편>, 아키 카우리스마키


maxresdefault.jpg <Toivon tuolla puolen>, 2017


난민은 문제적이다. 난민이 문제적인 이유는, 이 나라에 문제가 없다는 전제 때문이다. 바이러스의 침입을 받는 항상계처럼, 회색분자에 의해 타락하는 고매한 사상처럼, ‘무결한 나의 세계에 불결한 너가 침투한다’는 마음속의 그림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그럴까? 참으로 내 나라는 완성되어 있고 난민은 그것을 어지럽히는 존재일까? ‘낮은 곳’에 본적을 둔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이 주장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희망의 건너편>은 두 인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중년의 위기를 맞은 핀란드인 사업가 위그스트롬과 시리아에서 피난 온 난민 칼레드다. 아내와 절연을 고하고 분노로 차를 몰던 위그스트롬이 실수로 칼레드를 칠 뻔한 초반부의 장면 이후로, 영화의 절반이 지나도록 두 사람의 길은 겹치지 않는다. 핀란드인과 난민이 각각 두 세계를 형성하는 과정을 카메라와 함께 따라가 보자.

‘칼레드의 핀란드’는 놀랍게도, 호의로 가득 차있다. 핀란드는 평화로울 뿐만 아니라 온정적이다. 그를 받아준 난민 구호 센터는 그에게 온수 샤워와 깨끗한 잠자리, 일자리 연결 시스템과 공정한 입국 심사 시스템을 제공한다. 비록 재판부는 그에게 당치 않은 환송 판결을 내리지만, 행정 부조리가 비단 핀란드의 문제만은 아니니 탓하기도 애매하다. ‘핀란드 해방군’이라는 인종차별 깡패들이 그를 위협하지만 동시에 선한 노숙자들이 그를 지켜주기도 한다. 여동생이 무사히 도착하기 전까지 핀란드를 떠날 수 없는 칼레드는 부득이하게 센터를 탈출해 길거리로 도망친다.

‘위그스트롬의 핀란드’는 사뭇 다르다. 이곳은 무정하고 무관심하다. 그러나 이는 다른 세계라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위그스트롬은 손님이 아니라 주인이며, 그의 행적 역시 능동적인 선택과 주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집을 나선 그는 기존의 의류 사업을 전부 처분해 현금화한 뒤, VIP들이 모인 포커판에 들어가 일확천금을 노린다. 날이 다 새도록 달린 끝에 테이블 위 모든 돈을 따낸 위그스트롬은 ‘두 번 다시 이곳에 모습을 보이지 말라’는 상대방의 말에 냉소를 흘리며 “안 올 거니 걱정 마라” 답하고는 자리를 뜬다. 주머니에 넣기도 어려울 만큼 커다란 돈다발을 손에 넣은 위그스트롬은 그 돈으로 적당한 크기의 레스토랑을 사 새 사업을 시작한다.

두 사람의 충돌은 위그스트롬이 자신의 가게 쓰레기통 옆에서 자고 있는 칼레드를 발견하며 벌어진다. ‘여기서 꺼지라’며 침낭을 치우려 드는 위그스트롬에게 칼레드는 돌연 “내 잠자리 치우지 마라”라며 주먹을 휘두른다. 얼굴에 주먹을 맞고 당황한 위그스트롬은 곧장 카운터를 날려 칼레드를 한 방에 기절시킨다. 이 느닷없는 폭력사태가 불러온 결과는 당황스럽게도, 칼레드의 취직이다. 직원의 조카가 만들어준 감쪽같은 신분증명서는 덤이다. 칼레드는 순식간에 핀란드의 시민이 된다.

두 ‘핀란드’의 파열이 폭력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은 주목할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호의에 둘러싸여 있던 그전까지의 칼레드는 어떤 유의미한 결과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센터에서 만난 그의 친구 마즈닥은 항상 베풂 받고 베풀면서 살아감에도 일자리를 얻지 못하며 ‘5년이나 구호 센터에서 도움을 받’는 실정이다. 이상적인 ‘착한 난민’ 서사는 이렇게나 무력하다.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럼 공감은?”. 이 질문에 대한 카우리스마키의 대답은 영화의 가장 우스꽝스러운 장면에 녹아있다. 틀에 박힌 가게 운영에 염증을 느낀 위그스트롬은 어느 날 레스토랑을 스시집으로 재단장하기로 마음먹는다. 간판을 새로 달고, 메뉴를 바꾸고, 직원들은 기모노를 입은 채 어설픈 일본어로 손님을 맞는다. 그들이 만든 스시는 주먹만 한 와사비로 무너지기 직전이고, 생선이 다 떨어지자 창고에 묵혀뒀던 꽁치 통조림을 꺼내 쓴다. 동양인 여행객 무리를 맞아 처참한 성적을 낸 스시집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양 본래의 레스토랑으로 돌아온다. 외부세계에 대한 편협한 이해와 동경은 괴상한 문화적 전유만을 남긴다. ‘공감이래 봐야 이 정도인데 어디 멀리 가겠느냐’는 작가의 조소다.

폭력은 분명 해법이 아니다. 맥락 없는 폭력은 핀란드 해방군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하지만 긴장은 대등한 관계의 필수 조건이다. 이방인이라고 해서 항상 죄송하고 감사할 필요는 없다. 당장 기성 핀란드인인 위그스트롬의 성공 신화 어느 부분을 바람직하고 건전한 사회인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감사는 받을만한 놈이 받는 것이다! 카우리스마키는 현지인과 외지인의 세계를 무관심이라는 하나의 실로 꿰어 모두를 밑으로 끌어내리는 동시에 같은 눈높이로 끌어올리는 ‘따뜻한 냉소주의’를 시연한다. 그는 아마도 난민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은 듯하다. ‘이 세상은 원래 정명했던 적이 없다. 그러니 너도 당당히 주먹을 들어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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