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Zeugitai Oct 11. 2023

하이퍼 레셔널리즘

지나친 합리주의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 이해할수있는 준칙이나, 예측가능한 통제상황을 원한다. 여기서 타자에 대한 모방이 필요하며 근본적으로 자아를 성찰하는 계기가 되어준다 . 그리고 사회가 형성되고 그러한 모방을 제도화한것이 "교육"이다. 이러한 교육은 문화적 발판이나 그 국가의 통념이 지배한다. 그러나 문화, 관습은 너무 보수적으로 확고해진다면 교육이 함양될수도없으며 개혁할수도없을뿐더러 오직 결과만을 반영하는 초경쟁주의를 양산한다. 얼마전 김누리 교수가 프로그렘에 나와서 강연하는걸 봤다. 그의 강연을 보니 가슴이 웅장해졌고 내가 여태껏 형언하지도 못했던 지식의 굴레를 극복하는듯한 해방감을 느꼈다. 그는 한국교육의 결함들을 이야기하면서 독일의 선례들을 토대로 한국 교육이 얼마나 패쇄적이고 근시안적인지를 설명했다. 특히, 한국 교육은 개인에게 초자아를 강요하며 내면의 본성을 사유하는것 자체에 대한 죄책감 부터 심어준다는것이 가장 큰 문제점이다. 속칭 흔하게 볼수있는 "화 내지말고 이성적으로만 생각해" , "남을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되며 예의 갖추며 배려를 해야된다"라고 재차 강조하는 모습을 한국사회의 일상에서 볼수있다. 언뜻보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익숙해져있어서 결점을 찾아볼수없으며, 그저 우아한 도덕적 이상향으로만 보여진다. 하지만 여기에는 인간의 자아를 방해하는 모종의 질서가 함축되어있다.

바로 이건 비판적 사고를 제한하려는 권위주의적 향배라고 할수있다. 인간이 생각할수있는 이유도 비판이 발생해서였고, 인간의 행복의 구심점도 비판에서 출발한다. 다르게 표현하면 그것은 "특정한 부재가 존재가 되기위한 의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학습이나 교육이 주창될수있는 상위가치를 아우르는 대전제라고도 할수있다. 하지만 한국 교육은 이것을 죄책감으로 치부하며, 원초적인 자아를 '미개함이나 짐승'으로 비유한다. 이성도 본성의 흐름에서 차출되는 하나의 전유물일뿐이다.  한국교육은 인간의 욕망과 이성을 철저하게 단절시킴으로써 이성을 목적으로 지향할것을 강요하지만, 사실 이성을 목적으로 두려면  욕망이라는 뿌리에서 찾아야한다. 그러나 이성은 의식에서만 머물며, 그것(보편적 이성)이 왜 발생하는지에대한 자유의지적인 고찰따윈 못한다. 왜냐면 욕망이 결여된 인위적 합리성은 도구적 이성이 되기때문이다. 도구적 이성의 패착에 대해서는 수많은 철학자나, 심리학자들도 우려를 표한다. 도구적 이성은 생각의 발원점보다는 방법론이나 접근론에 불과하다. 예를들면 차를 고치기위한 방법이지, 차를 고쳐야하는 이유에 대한 질문은 한국사회에서는 없는것이다. 이러한 도구적 이성만 개인이 철저히 종속되어야하는 노예로써는 어떠한 주체성, 자율성이 태동하기 매우 어려운 사회구조이다. 한국사회는 가시적인 장점으로 포장된 실질적인 단점이 생활곳곳에 포진되어있다. 한마디로 이중적인 구조이다. 겉으로는 국가적인 장점, 그리고 내부로는 순환되는 개인적 병폐, 이것이 한국의 현주소이다. 도구적 이성은 맹목적인 공교육으로도 남용이 된다. 국어 문학 지문에는 독자의 다양한 견해따윈 무시한채로 오직 하나의 생각만 허용하는걸 시험문제로 출제하여 학습 역량을 선별하는것은 너무나 팽배한 온상이다. 그런걸 민주헌정 이래로 30년째 존속해왔다는건 너무나도 무비판적인 개인들의 정서가 점유해온 실태이다. 하지만 그래놓고 정치 비판에는 왜 그렇게 관심이 많은걸까?

그 이유는 수동적 공격성이 주류를 이루고있기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공격성은 강안 폭력이나 제한적 상황으로 억눌려있던 의도가 차후에 욕망으로 점철될 경우를 시사한다. 한국은 정치와 관련된 자유주의, 철학, 역사에 대해 자유롭게 토론할 환경이나 창구는 조성되어있지도 않다. 그리고 일방적으로  "옳고 틀림" 이 두가지를 이분법적으로 학습한채로 그렇게 유년시절을 보내게되어, 결국 자유롭게 활보할수있는 성인이 되어 비정형적 정서로써 무르익어간다. 사실 이건 욕이나 혐오로 변하기 쉬우며, 정치를 비판하기보다 개인이나 인물상을 모욕하는 위주의 정치 분위기가 생겨난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모순적인 상황은 또다른 단계를 열어둔다. 바로 "패배주의"이다. 사회로부터 교육제도가 미비하여 개인이 성숙한 자아를 완비하지도 못한상태에 경쟁에 그대로 노출이되며 선험적으로 자각할수있는 교육수단조차 없다. 학벌은 개인의 우월성을 가늠할수있는 군중편견의 척도가 되었다. 도구적 이성을 강하게 비판하고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해 심도깊게 고민한 철학자가 많다. 대표적으로 들뢰즈가 있다. 그는 해체주의 철학의 대가이다. 그는 진리따윈없으며 진리를 찾는 하나의 운동성에만 주목하는것이 인간이라고 한다. 맞다, 인간은 이성을 찾기전에 인간이 어떤걸 추구하고싶은지 다양하게 고민해봐야한다. 한국사회는 지나친 합리주의 정서가 개인의 욕망을 앞지르고있다며 김누리교수는 관련 내용을 부각한다.

이성을 고민하려면 이성의 근원인 리비도에서 찾아야한다. 리비도는 성적인 에너지이며, 성욕으로부터 기인한다. 과학적으로 보면 뇌안에 변연계로부터 활성화되는 신경전달물질이다. 변연계는 고대 철학에서말하는 디오니소스적인 도취 쾌락이다.  이런건 과학이 없던 시절에도 경험론적인 절차를 통해 초석을 만들어나갔던것이다. 변연계는 단순히 욕망을 관장하는것이 아니라 전두엽에게 신경전달물질을 공급하면서 지향 명령을 전달한다. 그 지향 명령이 타당한지는 일단 전두엽이 분별한다. 이 단계만큼은 데카르트 철학에서 말하는 이성이다. 변연계가 욕망을 불렀지만 대뇌는 그것을 평가할 능력이 있음을 최종적으로 확인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것으로는 인류 뇌 과학도 철학도 아니다. 사실 여기서 더 역학적으로 관계를 주고받는것이 있다. 전두엽에서 지향명령을 받은후에 판단으로 걸러지고 일부분의 의사전달만 남겨둔다. 그리고 그 행위를 다시 변연계가 결정하며 두 부위가 방금 절차를 계속적으로 반복한다. 이것은 니체나 흄의 철학으로도 설명이 가능하다. 즉, 이성과 욕망은 복잡하게 얽혀있다. 이성과 욕망이 분리된것이 아니라 분절되어있다는것이다. 이렇게 욕망 중추는 모든 인간의 행동을 결정해줄수있는 주요한 역할을 수행해낸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은 매우 비과학적이며, 무엇이 더 "발전"에만 유리한것인지에 초점이 맞춰져있기에 안타깝다. 경쟁지향 가치관은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방해한다.

김누리교수는 경쟁이 인간의 본능인걸로 착각하는 사회는 한국이라고 한다. 그리고 독일을 비롯한 선진국에서는 경쟁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협력과 공감에서 찾아야한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경쟁은 본능이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산물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한국에서는 다수에게 경쟁이 인간의 본능인가라고 질문해본다면 거의 90프로가 고개를 끄덕일것이다. 하지만 한국은 6.25이후 과도기 단계를 겪은 나라로써 경쟁이 필요해진 나라였다. 하지만 인간의 심리마저도 경쟁이라며 혼동하고있다. 그러나 경쟁은 본능을 의미하지않는다.  본능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생물학적 현상이며 단순히 언어하나로 형언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사회적 맥락이나 구호로써 "경쟁"이라는 단어는 인간 본성에 환원시킬수도 없다. 경쟁은 타인에게 가해지는 유기적 관계로부터 살아남기위한 모든 현상을 표집하는 가치일뿐이지, 어떠한 의과학적인 사실을 전제하지않는다. 인간의 본능은 경쟁도, 이기심도 아닌, 오직 편안하고 즐겁게해줄 욕망이라고 표현할수밖에없다.각자의 자신이 즐거우니 무언가를 행동하는 그 자체만으로 모든 개인들의 성격은 다양해질수밖에없다. 교육이 구축되려면 교육이 무엇인가를 알아야한다. 그러나 한국은 부랴부랴 남북분단 이후에 급하게 미국으로부터 임시정체를 들여왔다. 이런 환경에는 급진적인 경제성장만 옹호하는 획일화가 퍼진다. 그리고 적지않은 다수의 한국인들은 그걸 자유주의라고 어설프게 명시해놓는다. 교육이 무엇인가를 아는것은 소위말해 "교육학 계론"이라고 불린다. 교육에 접근하기위한 기본적 소양 의식이 필요하다는것이다. 이것을 철학적으로 비화하자면, 도구적 이성이 아니라 이성 그 자체에 질문하는 고차원적인것이라고 할수있다. 바로 이러한 목표 이성의 태도가 모든 제도와 사회의 근간이 되고 나아가 교육이 탄생해야하는것이다. 독일의 학생들은 비판하는 수업을 한다. 어떠한 난제를 주어서 각자의 다양한 생각들을 현란하게 표출할수있는 시간이다. 거기서 아이들은 협력과 존중이 무엇인지 알기에 한국의 갈등상황처럼 교실이 불거지는경우는 전혀 없다. 오히려 서로의 개성을 더 잘 파악하고 친숙해질수있는 기회의 장이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열리는것이다.그러나 한국의 학교분위기에는 교권과 학생인권이 대립하는 형국이다. 우습게도,비판교육을 학교에서 하는것이 아니라 학교를 중심에 두고 비난과 손가락질이 오가는것이다. 한국은 지정학적 각축을 다투는 와중에서 성장한 국가이기에 질적인 향상따윈 기대할수없으며 국제정세의 패권이 변동하지않는이상 한국의 상황은 계속 굳어질것이다. 전근대에는 육체를 억압하는것은 국가였지만, 현대에는 공화국 이래로 내면을 속박하는것은 한국 사회이다. ​


"전쟁과 굶주림보다 더 심각한 불행은
바로 그런것들을 미온적으로 상기시킬정도의 범사회적 비극과 참상이다"

작가의 이전글 영화리뷰 : 더 플렛폼 (2019)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