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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Jun 09. 2024

연인戀人, 단상 #2

2023. 09. 03.


초반부터 유교가 길채 발목을 잡는다. 물론 전쟁의 상흔은 그 난리통을 겪은 이들에게 트라우마를 남겼을 텐데 증상 발현 묘사 없이 그냥 정신을 잃었다, 정도로 설명되는 게 이상하긴 했지.


장현과 원무 대사의 유사성. 변주를 통해 역설적으로 원 대사를 한 장현에 대한 마음을 되새겨 보게 되는 거 아니겠나 싶고.


초반부로부터 이어지는 '절 비판' 서사로서 병자호란 시기를 보여준다면, 전쟁 이후 주인공 유길채가 정절 때문에 억압 받는 서사에 대한 묘사가 필연적이라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을 한번 하는 게 무슨 잘못인지 잘 모르겠다.


9화에서 내내 보여준 게 유길채의 가족에 대한 책임감 아니었나. 가족에 대한 책임감, 생명의 은인에게 보답해야 한다는 책임감. 그런데 어떻게 자기 욕망을 따르겠다고 선뜻 장현을 따라가겠어. 백 번을 흔들리고 천 번을 흔들리지만 유길채는 유길채인걸.


"욕해도 돼."


이 말 한 마디 내뱉기까지 길채 마음이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나랏법에 남편이 간통한 사내와 부인을 죽이는 것은 죄가 아니오"


이 말 드라마 세계관을 지배하는 정절 이데올로기의 중심을 꿰뚫는다. 진짜 혼인을 한 건 아니나 '함이 오갔다' 는 이유만으로 유길채는 구원무의 <소유> 임이 법으로 관습으로 인정된 것. 소름 끼쳐.


10화는 조선 사회가 유길채의 발목을 끊고 새장에 가두는 모습을 역설적으로 보여준 거라 생각한다. 효, 가족애, 생명의 은인에 대한 보은, 정절이라는 현실의 족쇄가 유길채 발목을 잡다 못해 끊어버린다. 드라마를 보는 우리는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유길채에겐 저게 현실인데 욕 먹는 걸 이해할 수가 없다.


길채와 장현이 '원 앤 온리(One & Only)' 라는 이유로 서로가 서로를 붙잡을 빌미가 되면, 그게 오히려 길채 발목을 잡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유길채를 옥죄는 정절은 구원무-유길채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이장현-유길채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라 생각하기 때문에.


내 생각에 이제 유길채-이장현의 관계에 있어서도 낙인이 새겨진 것이다. 그 사회는 당대 규범이 만들어낸 거고. 이제 드라마의 관전 포인트는 그 낙인의 굴레로 인한 상처를 주인공들이 어떻게 지우거나 봉합해내느냐의 문제가 되었다.


조선 사회의 축소판인 능군리. 나는 이 드라마를 보는 내내 능군리를 이상향으로 삼을 수 없었다. 능군리가 주입한 절-이데올로기의 규범이 결국 유길채의 발목을 끊은 걸 보라고...


이장현, 충절을 어긴 이. 유길채, 정절을 어긴 이. 둘의 존재는 17세기 조선도 21세기 대한민국도 불편하게 만드나 보다.


유길채가 이장현을 따라가면 안 됐던 이유.


우선 오늘 회차를 통해 유길채라는 인물이 조선 사회를 지배하던 정절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암시를 줬다고 생각한다. 조선은 양란 이후 후기 사회로 접어들면서 <심증만으로> 여성의 정절을 단죄할 수 있는 나라가 되는데 이 드라마는 배경 자체가 병자호란 이후. 그런 점에서 구원무의 새장 속에 갇힌 유길채가 어떻게 빠져나올 것인가를 우리는 궁금해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더불어 유길채와 이장현의 관계는 비록 연인이나, 10화 후반부에서 유길채가 두려워하며 뱉는 말이 있다. "자신이 <헌 여자> 라고 장현이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기면 어쩌나." 라는 장면. 장현은 그럴 일 없다 단언하나, 정절 이슈로 인해 생기는 관계적 위계를 유길채가 가슴 속 죄책감으로 담아두지 말라는 보장이 있을까. 결국 오늘 회차에서 길채가 장현을 따라갔더라면, 심리적으로나 관계적으로 유길채는 이장현에게 예속되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장현이 충절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위기를 해결하고, 유길채가 정절 문제로 인해 발생하는 위기를 해결하고, 서로로 인해 발생하는 속박도 벗어나고, 온전히 자유로운 상태에서 재회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현실 속 유길채가 터전을 마련하면, 세상을 부유하던 이장현이 유길채에게로 돌아간다. 물론 유길채의 마음 속 단 하나의 정인도 이장현인 거고.


나도 원앤온리 구원서사 좋아하긴 하는데, 연인이 된 이들의 결말이 혼인뿐이라는 발상 자체가 너무나 가부장적이지 않은가 싶다. 더구나 그 발상을 기반으로 인물들 까고 작가에게 인신공격을 하는 게 너무나도 폭력적이라고 생각함.


양반층의 간통 사례는 조선 후기에 점차 줄어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정절 관념의 강화에도 원인이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간통 행위 자체가 은폐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가문의 명예와 관련되는 간통 행위를 은폐하기 위하여 <간통한 여성을 자살하게 하거나 직접 살해하기도 하였다.>


유길채가 지고지순하게 이장현만 오매불망 기다리길 바라는 사람들은 그냥 자기가 이장현 아버지랑 똑같은 인물인 걸 인정해야 한다.


사실 이장현이 어른이 되려면 이장현을 성장하지 못하게 만든 근본적 트라우마를 제공했던 성리학 규범을 박살내야 한다. 물론 불가능하겠만.


근데 어떻게 알을 깨고 나올지가 궁금해.


장현길채를 포함 작중 '캐붕' 이 된 인물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더불어 보는 이들은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이 어느 방향인지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는 내내 충절과 정절이 당대 개인을 옥죄는 폐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무려 4세기가량이 지난 시점에서 그 이데올로기 결 그대로 캐릭터 판단하고 있진 않은지.


당대 지배 규범과 맞서야 하는 사랑은 투쟁일 수밖에 없고 어쩌면 가장 고운 시절의 맺어짐은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거 아닐까. 세상 모든 이들이 달려들어 난도질해서 걸레짝이 되어도 그 상처를 봉합해주는 인연이 진짜 연인이지.


이장현 캐릭터가 답답하고 이해 안 갈 순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드라마가 망했다는 논리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현재까지 드라마가 이장현이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진 인물인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이장현 개인에 대해서는 설명을 잘해왔다고 생각한다.


물론 한 개인을 설명하기 위해 그가 살아온 배경/환경을 분리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이장현은 정체조차 모호한 상태이다. 심지어 이름이 진짜 '이장현' 인지조차 알 수 없다. (나는 장철 아들이라 추정하지만)


어떻게 보면 드라마를 보고 있는 우리는 굴러들어온 돌에게 온 마음을 빼앗긴 셈인데, 당연한 거 아닌가. 계속해서 떠오르는 '이장현이라는 돌멩이가 어쩌다 세상을 굴러다니게 되었는가' 라는 질문. 즉 '이장현의 과거와 정체는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이 드라마의 주제의식에 직결되어 있기 때문에 시작부터 다 까놓고 보여줄 패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장철이 장현의 아버지라는 예상이 맞다면, 이장현이 아버지와 대립하는 장면은 어머니의 정절 문제에 대한 문제임과 동시에 조선이라는 나라의 국법에 반기를 드는 충절 문제일 수도 있을 텐데.


종종 사람들이 극의 맥락 속에 존재하는 유길채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자기 머릿속에서 미리 만들어낸 자기가 보고싶은 유길채를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드라마가 자기 예상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니 화가 났던 거 아닐까. 그렇지만 사이다 문화 + 페미니즘이 화두가 되는 시대에서 태어난 사람들과 유길채는 같을 수가 없다는 걸 왜 인지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즘적으로 유길채를 해석하고 있는 것도 아니란 게 아이러니.


법은 한 사회과 지향하는 규범과 이상을 구현한 것이고, 유길채가 사는 시대는 양란 이후 조선 후기. 정절을 이유로 여성을 살해하는 게 <합법> 인 시대가 의미하는 게 무엇이겠는가. 아무리 집안을 일으킨 악바리 앙큼도도불여시라 해도 군주제 국가에서 여성이 함부로 법 위에 설 수 있겠는가.


영상매체에서 의상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극은 서방님이란 소리와 더불어 장현에게 유길채=자신의 새색시라는 환상을 부여했지만, 다른 한편으론 녹의홍상을 벗지 못한 채 도망간 까닭에 결과적으로 (원무와의 혼인을 위한) 녹의홍상을 벗을 수 없게 된 유길채의 모습에서 정절 이슈가 부각된다.


여주가 바뀌긴 뭘 바뀐다는 건지, 그간 서사가 왜 날아간다는 건지 모르겠다. 이 드라마는 유길채와 유길채의 연인인 이장현의 이야기고, 막말로 유길채가 이장현과 이어지지 않는다 해도 연인의 여주는 유길채고 두 사람의 사랑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다. 여주 바뀌나?! 소리 자체가 자신이 남주 중심으로만, 유길채의 존재를 오직 멜로 관계 속에서만 보고 있었다는 방증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남주섭남, 여주섭녀의 대사-연출이 데칼코마니처럼 여겨진다면 "왜 데칼코마니로 표현했어!!! 메인 바꼈냐!!!" 라고 화를 낼 게 아니라, 섭남이 남주와 비슷한 대사 후 여주가 이전 남주의 대사를 떠올리며 어떤 마음, 생각, 행동을 보이는지가 중요한 게 아닐까. 동일 대사 동일 상황이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주는 남주를, 남주는 여주를 택하게 되는 맥락이 중요한 거지 컷이 아니라. 아무리 움짤, 숏폼 클립 시대라지만 맥락을 제외한 채 컷만으로 전체 서사가 망했다고 이야기하는 건 정말 어불성설이라 생각한다.


유길채는 관념이나 이상보다 현실이 더 중요한 사람인 걸. 집안이 풍비박산이 나기 이전부터 꾸준히 보여주었다.


1. 곁에 없는 충절의 목적이자 대상으로서의 임금보다 내 곁의 연준도령의 생사가 더 중요했고

2. 강화도로의 여정에서 '양반입네' 하며 귀한 대접 받으려 하기 보다 오히려 자신이 나서서 방두네를 업어 날랐다.

3. 길채에게 은장도는 정절이라는 허상을 따르기 위한 도구가 아닌 현실 속 자기 삶을 구하기 위한 도구였으며

4. 같잖은 이상/관념보다 배곯는 게 더 무서운 거란 걸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길채가 어떻게 사랑을 따라 떠나겠나.


황진영 작가님의 전작인 '역적' 을 보며 공맹좀비들에게 굉장히 비판적이시구나 생각했었는데 비판만 하는 게 아니라 그 가치를 따르는 선비들의 장단과 성장을 다각도로 보여주신다는 생각이 든다.


길채 아버지, 능군리 때 생각하면 온화해보이지만 길채영채 낳고도 나이 터울 꽤 나게 늦둥이로 제남이 낳은 거에서 대를 이을 아들을 보겠다는 의지가 느껴진다. 솔직히 영채에서 끝냈으면 극중 영채가 시집 가버리면 끝났을 문제가 장자인 어린 '남동생'을 책임지는 문제까지 이어지는.


이장현의 정체성 문제에서 야기되어 최종적으론 인조를 향할 온갖 형태의 절의 문제들도 기대가 된다.


결국 당대 규범을 만드는 건 안개 속 모호한 이들이 아니라 왕실과 사대부라는 실체들이 만드는 건데 그들의 모순을 까발려줬으면 좋겠어.


개인적으론 장현길채가 감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서로가 서로에게 관계적 불균형을 만들지 않고 수평적인 위치에서 재회하는 걸 보고 싶다.



2023. 09. 04.


병자호란 이후 여성의 삶 하면 떠오르는 게 [환향녀], [정절] 이슈. 이 두 가지가 안 나오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혹시 여주는 당연히 그 맥락 속에서 제외될 거라고 생각한 건가? 초반부터 능군리 노인들의 "여자는 외간 남자에게 얼굴만 보여도 자결해야 한다" 라는 소리와 <은장도> 가 왜 계속 보였던 거라 생각하는 걸까. 그냥 사이다여주가 "흥, 뭐래." 라고 받아치길 원해서? 왜 난리가 난 건지 모르겠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초반부에서 시제로 절節 얘기가 나왔을 때 이장현이 서원 시험 안 치고 때려친 이유를 이장현 입으로 구구절절 풀었어야 했나 보다. 연준과 장현이 싸울 때도 "우리는 '충절' 을 위해 싸우는 거다." 구구절절 명시해주고, 능군리 어르신들이 "왜란 이후" 말할 때도 '정절' 언급해주고. 계속 은유적으로, 상황적으로 패러프레이징하니까 같은 얘기하는 줄 모르고 엉뚱한 포인트로 보던 사람들이 난리인 것 같다.


미션 때도 느꼈지만 역사 시간에 아무리 군주로서의 인조가 무능하고 백성들 비참하게 만든 인물이란 걸 가르쳐도 '어딜 가암히 내 나라 역사 속 군주를, 조선을 능멸하는 드라마를 쓰느냐' 분노하는 사람들 많은 게 좀 신기하다.


이장현이 왜 서원에서 붓을 내팽겨치고 나갔는지, 왜 그렇게 군주와 나라를 지키는 걸 회의적으로 본 건지에 대해 로맨스 장면이 아니라는 이유로 넘긴 이들의 소란을 보는 기분. 그 모든 것 때문에 이장현이 그렇게나 회피적이고 둘의 사랑이 그렇게나 어려워진 건데.


난 이번 드라마가 진짜 시기도 잘 탔다 생각했는데.


페미니즘이 화두인 시대에 살면서, 이렇게나 여주 외모에 대해 품평질하고 여캐의 육체적/정신적 정절에 목 매는 이들이 많다니. 이들은 대체 대선에서, 용산의 무엇에 분노했단 말인가.


이쯤 되면 "사내 없인 못 삽니까?" 라는 장현의 대사가 길채를 향한 시청자의 마음을 투사해서 메타적으로 넣은 대사다.


그러나 유길채는 17세기 후기조선 성리학시대에 사는 여자라고 오조오억번 이야기할 수 있겠다. 유길채가 남자 없이 살지 못한다 보여지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맥락을 봐야지, 남주에 대한 정신적 정절을 지키지 않았다고 패고 원무 버리고 혼자 당당하게 사는 사이다여주 안 보여준다고 냅다 패는 거 이해가 안 감.


댕기, 애기씨 시절을 상징하면서도 자기도 모르게 붉게 물든 마음을 장현에게 보여줌. 단도, 당대 여성의 자결을 종용하던 은장도를 길채가 자신의 삶뿐만 아니라 대복이의 새 생명을 이어나갈 도구로 사용함 그리고 그것에 대해 장현이 잘했다고 이야기함. 이렇듯 떡밥은 다 회수가 되었는데 떡밥을 던지기만 하고 내다 버렸다는 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 은장도/단도는 이제 길채가 한 사람의 독립체로서 경제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도 되고, 더불어 자신이 아닌 다른 여성들이 먹고 사는(어쩌면 날 해하려 하는 인간들의 목에 냅다 꽂을) 수단으로까지 확장되는데.


회수를 너머 확장되기까지 했는데 대체 언제 단도를 버렸단 말이지?


사랑했던 정인과의 물리적 연이 끝난다 한들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비극이 되나.


예로 난 타이타닉을 '로즈의 일생' 으로 보는데 그 영화에서 제일 중요한 장면 노인이 된 로즈가 그간의 삶을 전시하듯 액자를 늘어놓은 걸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잭은 죽었지만 그 죽음이 의미 없고 비극인 건 아니라고 생각해. 새로운 삶의 전환점이 된 거지. 로즈가 새장에서 벗어나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https://brunch.co.kr/@hppvlt/126


1화부터 극중 불여시, 남자 없이 못 사는 여자로 그려지던 거 길채가 다 받아치던 거 장하면서도 속상했는데, 현실 앞에서 구원무 택했다고 작품 밖 인간들이 손가락질하는 거 때문에 다시 또 속상하다.


드라마에서 유길채-이장현의 관계가 있다 하면, 유길채를 극중 맥락 속에 존재하는 유길채로 봐야 하는데 유길채 속에 자신을 투영하고 정작 유길채의 존재는 지워버리는 게 보이니까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 찬다. 솔직히 10화 이후 난리가 난 것도 복면을 복면으로 안 보고 복면 물리적 위치에 자신을 투영해서 남주만 보고 있으니까 그런 거 아닌가.


애초에 드라마를 싫어했던 사람들, 관심 없다. 그런데 자칭 드라마팬이라는 사람들이 극중 맥락에 맞추어 해석하려는 노력조차 안 하니 슬플 따름이다. 체력 딸려서 드라마 잘 안 보는데 황진영 작가 작품이라고 챙겨보다가 어이 없는 논란들을 보며 유길채 이장현에 진심 돼버린 건에 관하여.


절節 뜻 자체가 신념을 굽히지 않고 꿋꿋이 지키는 책임감 아닌가. 그런데 그 절이라는 이데올로기가 진짜 개인이 태어나면서부터 지고 태어나는 것이냐, 국가가 주입한 이데올로기가 아니냐의 문제지. 나는 후자라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고.


임금을 향한 마음이 안 굽혀지냐, 그럼 충절이고. 지아비를 향한 마음이 안 굽혀지냐, 그럼 정절이고. 어버이를 향한 마음이 안 굽혀지냐, 그럼 효심이고. 그런데 그 모든 게 한 사람 인생을 옥죄는 족쇄인 거고.


초반부에선 이장현이 계속해서 철 들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유길채가 진짜로 자기중심적이고 미성숙하기도 했지만

자기 마음 각성한 후인 9회 기점으로 성숙도/사회화는 길채가 앞선 것 같다.


길채는 이제 자기보다 가족을 앞서 생각하게 됐고, 이장현에게 있어서도 자기가 나쁜년을 자처해서 장현의 마음을 끊어냈고, 더불어 세상과 계속 교류하면서 자기 세계를 확장해나갔는데, 장현은 더 큰 세상에 마음을 비우러 갔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세계를 더 못 믿는 자기중심적 인간이 돼서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자기혐오와 더불어.


사실 그 세월동안 성숙해졌다면 혼인 이전까지 자신이 사랑했던 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힘든 일은 없었는지 묻는 게 우선이었을 텐데 그저 녹의홍상에 눈 돌아서 길채에게 비수를 꽂다니. 길채의 처지를 알고서라도 "다 버리고 나랑 가자" 라는 게 진짜 자신과 자신이 갖고 싶은 여자만 보는 시선 같달까. 그런데 또 이런 장현의 시선은 길채에게 일종의 해방감과 자신을 둘러싼 족쇄를 인식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여하튼 나는 이장현이 아직은 알을 깨지 못한, 어린 시절 트라우마를 극복하지 못한 나르시시스트 같은데 이게 포로사냥꾼 에피랑 엮여서 어떻게 자기만의 에피파니를 겪을지가 궁금하다.


외부에서도 자기내면에서도 아니라고 외치는데도 어떤 인물이 고집하는 게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걸 왜 지키고 싶어 하는지, 혹은 내외부에서 '아니라' 고 주입되는 이유 자체가 모순은 아닌지 찾아보게 되니 보는 입장에선 굉장히 흥미로운.



2023. 09. 05.


근데 왜 해피 엔딩이어야 할까. 내가 장현길채에게 정이 너무 많이 들었나 보다.


살아서 좋은 날을 많이 누리고 살았음 좋겠어.



2023. 09. 07.


개인적으로는 길채가 구원무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있어도 상관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물론 상업 드라마에서 그럴 가능성이 있을까?) 상관 없고 괜찮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 아이는 구원무의 아이가 아니라 유길채의 아이다" 라는 관점이면 나는 납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원무/이장현이라는 부계 위주의 사고에서 유길채 중심으로 생각해보고 싶다는 건데, 이게 자연스럽게 흘러가려면 아무래도 구원무가 죽고 사이에 자식이 있다는 걸 몰라야 할 것 같기도 해. 아니면 그날밤으로 이장현과의 사이에서 아이가 생겼는데 구원무가 구천이가 그랬듯 제자식처럼 챙겨주면 간통하면 죽여도 된다 어쩌구 했을 때 오만정 다 떨어졌지만 까방권 한 개 정도는 줄 수 있다.



2023. 09. 11.


이장현이 모르는 유길채의 삶의 순간, 유길채가 모르는 이장현의 삶의 순간이 있다는 것.


서로의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없었던, 나와 공유할 수 없었던 삶의 순간들이 있었다는 걸 인정하는 거, 나는 알 수 없는 여백 혹은 그 순간을 이루었지만 말할 수 없는 숱한 이야기들을 그 사람의 삶의 한 편으로 남겨두는 게 사랑이라 생각해.


그 간극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오해로만 남겨두면 그 인연은 거기서 끝인 거고, 내가 그때 그리 힘들었어 이야기할 때 그랬구나 들어주며 가만가만 보듬어주는 거. 그게 사랑인 거 같달까.



2023. 09. 16.


10화를 다시 보며 드는 생각은 길채가 세간에 도는 '혼인을 몇 번이고 한, 사내 없이 못 사는 여인' 이라는 프레임에 의연한 척 했지만, 아니 그들의 입방아는 사실 길채에게 어떤 타격도 입히지 못했지만, 정작 장현의 입을 통해 들은 그 말은 길채에게 비수가 되었으리란 생각이 든다. 그러니 장현이 헌 여자라 하면 어떡하느냐 고민했던 걸 테고. 장현이 길채 가슴에 비수 꽂을 때 길채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져서 마음이 아파.


길채의 "난 여기 있었어요 한시도 떠나지 않고 여기" 라는 말은 역설적이게도 장현의 부유성을, 조선 사회에 발 딛고 살 수 없는 속성을 대비시킨다. 길채에게 그는 다시 만난 순간까지도 언제고 '떠나야만' 하는 사람이었고, 길채에게 하는 고백도 "함께 떠나자" 라는 말이었으니까.


이장현이 풀어야 하는 본질적인 문제. 조선 성리학 사회의 성원으로 받아들여지지 못하는, 아니 받아들여지기를 거부하는 문제. 2부에서 기대하는 것은 그 문제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고 어떻게 갈등을 풀어나갈 것인지, 작가가 나름의 해답으로 제시하는 것은 무엇일지가 궁금하다.


전작부터 좀 흥미로웠던 지점은 한 사회가 <역적> 이라 낙인 찍은 이들, 그들을 둘러싼 시대적 배경에 대해 작가가 관심이 있는 것 같단 거. 연산, 인조, 녹수를 재조명했던 것도 그렇고, 사실 포로사냥꾼이라는 면에서 장현도 그런 비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리라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를 역적으로 만들었는가" 를 계속해서 고민하게 만든다는 점이 흥미로움.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한다는 거. 그 어떤 이념보다 자기 앞의 생이 중요하단 거.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려면 그런 기제가 작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안락이라도 제공해야 하는 거 아닐지.


당대 규방 규수들과 겉으로만 달리 보일 뿐 사실 길채는 성리학 사회라는 틀/경계 "안" 에 존재하는 사람이라 생각한다. 물론 그 안에서 성장과 성숙을 이루었지만. 반면, 장현은 어릴 때는 경계 속에 머물고 싶었지만 점차 철이 들면서 자신을 경계 밖으로 내모는 조선 사회에 질려 스스로를 경계에 세운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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