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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R Jun 10. 2024

연인戀人, 단상 #6

2023. 10. 15.


길채 정말 순간순간의 판단력이 정말 날카로움. 심양에 끌려가면서도 조선 임금까지 청으로 끌고 간다는 마당에 양가의 여인이 무슨 대수냐는 매국노 새끼 말에 사족/양인 불문하고 징징거려봐야 소용 없겠구나, 라는 거 순식간에 캐치하고 입 꾹 다무는 거.


"고맙다니, '내 일' 이오. 내가 옥에 갇혔을 때 유씨 부인이 나를 위해 해준 일을 생각하면 내가 무엇을 못하겠소."


정작 인조는 소용조씨 치마폭에 쌓여서 현실도피 하고 있는데 연준이는 백성이 처한 현실을 직시하고 회피하려 하지 않음. 연준이가 왜 따라간다는 걸까? 싶었는데 연준이 같은 올곧은 유생이 찐 현실을 파악하기 위해선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거라 생각하고.


"얘, 너 길을 잃었니"


량음이는 어쩌면 어린 아이에게서 자신을 보았던 건지도.


소현세자 앞에서 무릎 꿇고 집에 가게 해달라는 노인의 울음에 드라마 보다가 같이 울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이 드라마는, 연인은 어쩌면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버티고 버텨서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 소현세자가 조선으로, 길채가 능군리로, 장현이 자신에게로. 집이란 건 꼭 물리적인 집이 아니어도 내가 사랑하는 연인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그곳이 집이라 생각해. 연인은 성애의 대상이 될 수도 있지만 부모가 될 수도 있고 내 고향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장현, 유길채에게 달빛 아래 사랑을 맹세했던 거, 자신의 평생을 유길채에게 속박시킨 거나 마찬가지란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이장현이 말하고, 이장현이 본 유길채는 자기 중심이 확고한 사람. 눈이 반짝거리는 사람. 자신이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눈을 떼지 않는 사람. 멋있는 사람.


소현강빈의 일화에서 모티프를 따왔을 수도 있겠지만 사실 인류가 농업을 통해 다음 세대를 기약하며 살아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억만리 떨어진 땅에 떨어져도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서 그 땅에 뿌리를 내리고 농사를 짓고 다음 세대를 약속하며 내 집과 고향과 연인에 대해 이야기를 할 수 있겠다는 게 보여서 가슴이 먹먹하다.


난 사실 역덕이 아니라서 인조와 소현세자의 실제 설정값이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드라마 상에서 보여지는 인조와 소현세자의 차이는 정말 명확하게 보인다. 드라마를 보면서 아비란, 군주란,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계속하게 되고 그 시작은 현실을, 백성의 삶을 직시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하는데 인조는 외면하나 세자는 구역질을 하면서도 직시한다.


"치욕이 파도처럼 덮이는 것이 두려워 죽음을 선택한 이가 원망스러웠나이다."


그 치욕을 파도처럼 덮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나 반문하게 만드는 구절. 그리고 유길채는 그 파도 앞에서 버티는 사람인 거고.


"어찌 죽지 않고 살아 저런 치욕을 당한단 말인가. 어찌 조선의 치욕이 되어..."

"허면 조선의 전하께오선 오랑캐에게 아홉 번의 치욕을 겪고도 어찌 살아 계십니까. 왜 어떤 이의 치욕은 슬픔이고, 어떤 자의 치욕은 왜 죽어 마땅한 죄이옵니까. [...] 자식이 아비를 지키는 법은 없나이다. 지키는 것은 아비의 몫이지요."


드라마가 좋은 게 뭐냐하면 분명 영웅 서사 같지만 그도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 속한 한낱 개인일 뿐이며 함께 하는 이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선택하고 기뻐하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인데 제도권 교육에서 역사를 배우면서 좀 뚱했던 건 늘 어떤 공로가 있으면 그 공로가 지배자 한 사람에게 가는 게 의아했다.


"소현세자와 강빈이 농사를 지으면서 심양에서 살아남았다" 라고 한다면 소현과 강빈도 인간인데 그 모든 일을 혼자 할 수 없는 거잖아. 그런데 드라마는 그 사실을 너무 잘 보여주고 있다. 세상에 일방적인 영웅도 없지만, 누군가 영웅이 되기 위해선 함께 하는 이들의 도움이 없이는 안 된다는 거. 우리는 결국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거.


"전쟁이 끝난 게 아니라 골수까지 쪽쪽 뽑히고 있었어. 이러다 나라가 무너질 것 같으이. 난 말이지, 조선 땅에서 오랑캐의 흔적을 지울 수만 있다면 내 혼이라도 바치고 싶어."


흠결 하나 없는 꽃과 같은 여성이 아니라 살기 위해 칼을 휘두르고 자신의 신체에 손을 대는 것을 허하고 결국 스스로 얼굴에 피를 내는 거까지 세상이 유길채를 유교연의 딸, 구원무의 아내, 왕야의 (예비) 여자로 묶어두려 해도 유길채는 오롯한 유길채일 뿐임을 유길채 스스로 증명해내는 게 멋있어.


드라마 속에서 조선이라는 사회가 이상적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경계에 선, 혹은 경계 밖 사람들을 포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포로가 된 이들을 속환하는 과정에서 아픔을 봉합하는 서사도 중요해보이지만 태생부터 경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량음과 같은 존재를 보듬고 경계 안으로 들이려는 노력도 중요해 보인다. 사실 그들이 경계 밖으로 벗어난 게 자의로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규범과 전쟁이라는 거대 폭력에 의해 밀려나거나 끌려간 건데.


농자천하지대본의 뜻이 통하는 나라에서 처음에 농사꾼들 업신 여기는 것도 웃겼지만, 한편으론 누군가를 택하면 누군가는 버려야 하는 상황에서 노인의 가치를 단순히 나이 듦=쓸모 없음 으로 보는 게 아니라 그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삶의 터전을 일구는 존재로 보는 드라마의 메시지가 좋아.


전쟁이라는 거대서사를 다루면서 초점을 민중의 삶과 수난으로, 그중에서도 여성의 삶에 초점을 맞춘 드라마라 좋고, 모든 인물이 다면적이라 좋다. 이번주 편에서 인상적이었던 건 양천이 자기도 포로 처지면서 여성 포로를 환향녀 취급하고 심양 가서도 그들을 '모셔야' 하는 여성들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던 거, 물론 인식이 거기에 머물러 있지만은 않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던 거.


다양한 인간군상만큼이나 다양한 여자들이 있다는 걸 보여줘서 좋아. 시대는 여성을 짓밟으려 하지만 드라마 속 여성들은 어떻게든 자기 존재를 드러내고 목소리를 내. 그리고 그렇게 잊혀진, 지워진 존재들에게 목소리를 부여하는 게 작가의 역할임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길채 진짜 자기자신에 대한 중심이 확고하고 여러모로 내면이 단단해. 그 근거가 자기가 살면서 보고 듣고 경험한 바에 근거한 게 너무 귀여움.


전작 '역적' 이랑 문제의식이 이어지는 게 좋다. 현대의 시각에선 "노비랑 정을 통하는 게 뭐 어때서?" 가 되지만, 사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얼룩' 묻은 인간들을 그 사회 성원으로 받아주느냐 아니냐는 사회 문제 중 하나이지 않나. 양반과 노비라는 신분 차이에서 시작되어 포로, 환향녀(여성), 외국인(오랑캐) 문제로 확장해서 생각해볼 수 있지 않나 생각이 드는.


양반과 노비라는 신분 차이에서 시작되어 포로, 환향녀(여성), 외국인(오랑캐) 문제로 확장해서 생각해볼 수 있지 않나 생각하고.


시대의 풍파를 겪고 장현이도 자기 한몸 편히 누울 데가 있었으면 좋겠어. 우심정도 좋긴 한데... 아무래도 집이 가지는 의미가 다른 것 같아서. 량음이도 행복했으면 좋겠고.


정보값이 굉장히 많은 드라마라 많은 얘기를 짧은 시간 안에 다 담기에 불친절한 건 맞는데 내용이 없다고 하면 갸웃하게 됨. 포로 잡혔다 도망치고 잡혀서 고통 받는 거로도 얘기할 게 얼마나 많아지는데. 우리 가족들도 그거 보면서 무능한 왕 때문에 저게 뭐냐고 십여 분을 떠들었는데...


제목이 왜 '연인' 일까 생각해본다면 버틴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가혹한 삶 속에서 한 개인이 그 '버티는' 행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절의와 같은 그 어떤 규범적 메시지로는 너무 공허하다고 생각함. 내 곁에서, 혹은 나를 위해 함께 버텨주는 사랑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을 보며 버티는 거지. 그게 부모가 됐든 자식이 됐든 친구가 됐든 통상적 의미의 연인이 됐든.


연출적으로 고민해보는 지점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함. 잔인한 걸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보다는 은유적으로 할 수 있을 텐데. 이건 감독이 고민해야 할 몫인 거고. 시간이 촉박한 와중에 강요하기 힘든 건 알지만 그래도...


"왜 꼭 상대가 그렇게 비겁해야만 유길채의 전쟁에 시선이 모일까. 남주의 경우 상대들이 별 걸 안 해도 쉽게 동정과 연민과 이해를 얻는데. 시대에서 살아남겠다는 선택을 했다는 이유로도 충분히 다들 이해해주는데."


이 말씀에 대해 나는 일종의 여성혐오라고 생각하고 여캐 공감에 대한 연습 부족이라고 생각한다. 연인 같은 드라마를 보는 다수의 청자가 여성일 텐데 장현의 아주 사소한 장면도 의미부여를 하며 이면 서사를 만들어 이해하는 반면 길채에 관해서는 그런 노력을 안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슬펐어. 사실 역적에서 가령이 서사가 좀 부족하단 생각이 들어서 이번에 연인에서 길채 따라가면서 너무 좋았는데... 그냥 더 열심히 길채 삶을 해석하려 목소리 내려 노력해야지 라는 생각이 들어.


초반에 말랑한 로맨스로 시작했기에 비극성이 더 극대화됐다고 생각하는데 로맨스로 영업해놓고 이게 뭐냐! 화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아무래도 난 '적어도' 30부작 정도가 좋았을 거라 생각해.



2023. 10. 16.


순백의 애기씨였던 조선의 딸 유길채가 삶을 위해 자신의 의지에 따른 선택에 선택을 거듭하는, 그 과정 속에서 길을 잃어도 넘어져도 굴하지 않고 다시, 또 다시 일어나서 자기 앞에 놓인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는... 연인


아무리 봐도 이장현에게는 유길채가 필요하다. 이장현은 조선이든 청이든 어디에서든 뿌리 내리지 못하고 부유하며 사는데, 유길채는 어디에 있든 땅을 딛고 사는 사람이라 이장현이 사람답게 살려면 유길채가 없어서는 안 되는.


한 사회 내에서 어떤 사람을 호명하고 정체성을 쥐어주는 것에 관해 이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생각하는데

장현이 이름을 고친 건에 관해 여러 생각이 든다. 장씨 가의 일원으로 불리기 싫어서 '이'장현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개조한 걸 텐데 그렇다면 그를 뭐라 부르는 게 좋을까.


그럼에도 이름을 완전히 버리지 않은 건 어떤 생각에서 그런 걸까 언제고 다시 돌아갈 집이 필요한 거 아닐까 우심정 말고 진짜 돌아갈 집.


"죽더라도 고향에서 죽고 싶다" 며 제 나라 지존의 발 밑에 무릎 꿇고 울부짖는 노인을 보며.


사실 파트1 때 인조에게 인간적으로 좀 공감이 갔었는데 파트2를 보면서부터 그래도 군주는 저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면서 대가리를 한대씩 치고 싶음. 문제해결의 첫 단계는 문제인식이고 문제인식을 위해선 현실을 직시해야 하지 않는가? 소현도 장현도 연준도 량음도 골수까지 쪽쪽 뽑히는 조선의 고통을 직시하는데 정작 인조만 외면하고 회피한다.


근데 드라마에서 오랑캐들이 저렇게까지 괴롭히는 거 보니까 오히려 "오랑캐로부터 배울 게 있다" 라고 했다던 소현세자가 정말정말정말 대단하게 여겨짐.


길채도 자기가 상처 주고 장현을 버린 걸 알아. 하지만 길채가 장현에게 도움을 구하지 않는 이유가 뭐겠어. 사랑하니까, 그이에게도 이 삶이 팍팍하다는 걸 알기에, 굳이 나까지 더하고 싶지 않은, 나 때문에 사랑하는 그 사람이 위험에 처하지 않길 바라기 때문이지. 그게 길채의 사랑인 건데. 진짜 정 한 톨 남아있지 않다면 길채라면 살기 위해 장현에게 갔을 거라 생각해.


이장현이 유길채를, 유길채가 이장현을 사랑하고 사랑한 이유가 생에 대한 의지와 연관된 게 좋아. 살기 위해 시선 돌린 곳, 그 방향 속에 서로가 있었던 게.


장현이 좋은 이유는 길채를 멋진 사람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길채와 다른 선택을 한, 수많은 누이'들' 에게 자기 감정을 투영해 한톨의 원망도 내비치지 않는다는 거. 원망의 칼날이 정확히 어디를 향해야 할지 알고 있고, 방향은 한결 같이 아래가 아닌 위를 향하는 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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