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 건국 신화에 곰이 마늘을 먹고 여인이 되어 낳은 단군이었다는 이야기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이 설화를 학자들은 곰을 섬기는 부족과 호랑이를 섬기는 부족 간의 세력 싸움에서 곰을 섬기는 부족이 이긴 것이라는 해석을 하기도 한다.
곰인지 호랑인지에는 관심이 많은데 어디서도 마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우린 마늘을 좋아하나 보라고?
그보다 생마늘을 집어삼키는 성찰의 과정이 없다면 동물과 다를 것이 뭐냐는 해석은 어떨까?
5천 년 전의 신화다. 생각할수록 놀라운 의미이며 비유적 표현이 아닌가.
널린 인간을 이롭게 하라.
한국의 건국이념은 사람이었다.
선한 사람이 아니다.
동물과 별반 다르지 않은 육체 속에 옳고 그름을 모두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백이면 백 다르고 각양각색인 사람이 어떻게 보편적 가치가 될 수 있을까?
종교적인 윤리로 선과 악을 무 자르듯 나누는 사람들이 보면 펄쩍 뛸 일이다.
살인은 나쁜 일인데 전쟁에 나아가 적군을 죽이는 것은 용맹한 일이고
기부는 좋은 일인데 스스로를 높이려고 하는 기부는 허세가 된다.
같은 일도 때로 선이 되고 악이 되기도 한다.
나누면 한 가지 면 밖에 볼 수 없는데 꼭 나눠야 할 이유가 있을까?
전쟁에 나아가 적군을 죽이는 것은 아군에게는 감사한 일이고 적국에게는 억울한 일이다.
그렇다고 해도 총을 거두고 만난 적군과 아군이 친구가 되는 것은 결국 자기편 사람을 위해 한 일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기부는 좋은 일이지만 스스로를 높이려고 남을 내리누르면 얕보인 남의 입장에선 반감이 든다. 반감이 들면서도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는 이유는 그래도 남을 돕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어제저녁 먹고 산책 삼아 나가니 동네 꼬마 두 녀석이 놀고 있다.
놀이 텐트 속에 들어가 놀고 있던 한 녀석이 3살 많은 옆 집 형 신을 발 텐트박 두 발자국 옆에 옮겨 놓는다.
의도야 나도 모른다. 자기 텐트에 들어오지 말라는 것인지 거기가 신발장이라는 것인지.
그런데 형은 동생이 괘씸했는지 저 멀리 길 건너 나무 옆에 텐트주인 녀석 신발을 가져다 놓는다. 텐트주인 녀석이 울기 시작한다. 뒤늦게 엄마들 표정을 보니 둘 다 서운한 마음인 것을 알겠다. 서운한 이유야 텐트 주인 녀석 엄마 마음이 다르고 3살 많은 형 엄마 마음이 다르다. 3살 많은 형 엄마 입장이야 먼저 건드린 건 텐트주인 녀석이고, 텐트 주인 녀석 엄마 마음은 3살이나 많은 형이 너그러웠으면 한다. 나도 사람으로 대접받고 싶으니 너도 사람으로 대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람이 중심이 되는 건 어렵다. 나도 인간적으로 기분 나쁜데 네가 기분 나쁜 이유를 생각해 보기가 어린아이들 입장에선 쉽지 않다. 어른도 쉽지 않다. 효과적인 분쟁 조정을 위해 우리는 결국 법을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법도 결국은 인간을 찾게 된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 학교에 가면 친구를 때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고 가훈처럼 외치던 엄마도 아이가 학교에서 맞고 오면 정당방위를 설명하게 된다. 물론 시작은 말로 하지 말라고 해봤냐고 물어본다. 그럼 아이는 했지만 안 듣는다고 한다. 그러면 선생님한테 말씀드리라고 하면 아이는 또 반문한다. " 선생님이 안 계시면? " 원래 선생님 보이는데서 말썽 부리고, 친구 때리는 애들은 별로 없다. 그럼 엄마는 답이 궁해진다. 도움의 손길이 올 때까지 맞으라고 할 것인지, 도망갈 것인지, 아니면 반격할 것인지. 그래서 엄마는 정당방위를 설명하게 된다. 그러면 아이들이 그런다. 때리는 건 나쁜 건데. 때리지 말라더니 떄려도 돼? 엄마의 대답은? " 너도 인간적으로 우선 너를 지켜야 하니까 그건 괜찮아."
법으로 어떻게 인간사를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인간이 보편적 가치가 되려니 수양이 필수다.
수양을 통해서 중심을 찾아야 비로소 가치 판단이 된다.
그런데 마늘처럼 삼키기 쉽지 않은 수양을 우리는 당연시한다.
한국 사람들처럼 스펙 쌓기가 취미인 경우는 드물다.
물론 지나친 경쟁사회의 단면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공부를 하겠다는 의지 자체를 신기하게 보는 사람들도 많다. 방향성과 이유도 없이 공부를 너무 해서 문제랄까. 참 희한한 고민이다.
언젠가 미국에서 자란 사춘기 아들이 내 친구에게 하는 말이 엄마는 왜 만족을 모르냔다.
한국에서는 90점 맞고 온 아이에게 조금 더 하면 100점도 맞을 수 있겠다는 말이 응원이지 않나.
내가 들어갔던 미국 체육 시간은 점수를 매기는 방법이 희한했다.
예를 들어 윗몸일으키기를 한다고 하면 학기 초에 40번 하고 나중에 40번을 하는 것보다 처음에 10번을 하고 나중에 20번을 하면 성장했다며 좋은 점수를 준다. 10번을 한 아이들보다는 잘했지만 40번을 한 아이들이 점수를 잘 받으려면 자기의 최초 개수인 40개보다 한 개라도 더 해야 한다. 개인의 운동능력 차이를 감안하고 성장을 쳐주는 의도는 좋았지만 아이들은 귀신같이 자기들 유리한대로 써먹을 방법을 찾는다. 그래서 학기 초에는 40번 할 수 있는 녀석들도 설렁설렁 10번만 한다. 그러면 B는 받을 수 있다. 학기 초에는 대충 하고 학기말에는 50을 하면 되지 않냐고? 그래도 된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을 A를 받지 못한다. A를 받으려면 최고한계 개수인 50개를 달성해야 하고 학기말에 한 개라도 더해야 A를 받을 수 있다. 미국 아이들은 B만 받아도 만족해하는 아이들도 많다. 체육에 뭐 그렇게까지 진심이냐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그중에 A에 도전하는 아이들이 있다. 윗몸일으키기 말고도 다른 평가 영역이 많으니 전체 학점에 그다지 중요한 것도 아니다.
자존심 문제인지, 성실성의 문제인지, 복근에 진심인지 알 수 없지만 재미난 건 그 아이들이 마지막 한 개라도 더 해내기 위해 몸부림을 칠 때 아이들이 응원을 해준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왜 응원을 할까?
이런 생각이 완벽주의로 이어질 수 있다고 우려할 수도 있지만 우리한테는 개선의 가능성이 있다.
더 나아지겠다는 희망, 변화해 보겠다는 의지는 있으니 방향성만 잘 잡으면 된다.
안젤라 덕워스가 쓴 그릿은 2016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지만 우리는 깨달음을 위해서는 곰 같은 우직한 성찰이 필요하다고 기원전 2333년부터 전해져 내려왔다.
깨달음을 통하면 곰이 인간이 되는 새로운 탄생의 기쁨을 알기에 우리는 지금도 마늘 같은 고난을 기꺼이 참아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