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훈
세 번째로 찾아가게 된 뮤지컬 팬레터 220225
전반적인 감상은 자첫 때 이래저래 길게 풀어 둔 것 같고, 이제는 내가 거듭해서 보면서 점차 눈에 들어온 것들과 캐스트들 위주 간단한 느낌차이 정도로 남길 것 같다. 이 극은 정말 어려서부터 좋아하던 책을 거듭해서 읽는 느낌이라 볼 때마다 시야가 넓어지고 생각이 많아져 새롭다.
자첫 때 세훈이를 마냥 순수하지 않은 세훈이라고 남겼던 기억이 나는데, 오늘 세훈이를 보고 난 후 그 말에 대한 수정의 필요성을 좀 느꼈다. 오늘의 세훈이는 본인의 감정에 대해 굉장히 솔직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히카루와 가장 비슷해 보이면서 같이 변해간다. 준휘세훈이 극 중 사건들이 진행될수록 히카루에게 점점 휘둘리는 느낌이라면, 성일세훈은 어느 정도 자의지를 가진 채 히카루에게 점차 동화된다. 히카루는 정말 많은 단어들로 해석하는 배우에 따라, 바라보는 관객에 따라 정의할 수 있겠지만 혜인카루 느낌 자체가 세훈이 본인의 성정으로는 쉽사리 밖에 드러내지 못할 마음속 깊은 욕망을 현실화한 느낌, 혹은 세훈의 말처럼 글자로 빚어낸 존재이기에 누구보다 글에 대한 집착이 강하며 그 외 모든 것을 후순위로 두는 것 같았는데 지금껏 혜인카루만 봤어서 그런지 이런 히카루와 가장 유사해 보이는 세훈이었다.
아무도 모른다에서 자첫때는 세훈의 말 중 가족의 사랑에 대한 부재 부분이 가장 와닿았어서, 히카루가 세훈의 모성에 대한 결핍으로 나타난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식으로 말을 남긴 것 같았는데 오늘은 아무도 나에게 꿈을 물어본 적 없었어라는 가사가 가장 인상 깊게 들렸었다. 극이 진행되면서 해진을 향한 감정과, 작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내밀한 마음이 가장 잘 보여 본인 감정에 솔직한 세훈이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게 아마 오늘 세훈이 방향의 전조인 듯했다.
자첫 때의 세훈이가 소심하고 사회성도 좀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오늘 세훈이는 어려서부터 눈치를 많이 보고 자라서인지 다른 세훈이들보다 넉살도 좀 있고 타인들과 잘 어울리는듯한 세훈이었다. 초반에 칠인회에서 다른 선생님들과 장난도 치고 말도 곧잘 하는 세훈이었는데 김해진과 독대하면서부터 점차 수줍어지고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 달리 말도 제대로 걸지 못하기에 해진의 대한 마음이 더 와닿음과 동시에 표정과 행동에 본인의 감정이 다 드러난다.
이것과 더불어 뮤즈 때도 그렇게 친하게 지내던 칠인회 다른 선생님들에게 읽으시면 안 돼요!! 하며 온몸으로 화내며 앞뒤 가리 지 않고 본인의 감정에 충실히 행동하는 등 (준휘세훈은 이 장면에서 읽으시면... 안 돼요... 하며 일단 행동은 하지만 빠르게 이성을 찾고 타인의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이런 모습들에서 정말 그 나이대 사춘기 소년 같다는 느낌을 주는 세훈이었다.
초반에 히카루가 해진에게 편지를 쓸 때 아벨라르와 엘로이즈 이야기를 하며 저의... 저의... 하다 가볍게 웃곤 정절을. 하는 장면이 있다. 정절이란 단어에 반응하는 세훈이들의 반응 차이도 각자 성격을 보여주는 듯했었는데, 준휘세훈은 정절이라니...하며 매우 부끄러워하며 고치자는 듯한 행동을 한다. 반면에 성일세훈은 정절이라니~하면서 재밌다는 듯이 웃었는데 이런 사소한 반응조차도 히카루와 더욱 비슷해 보이는 세훈이었다.
두 번째로 이 극을 마주했을 때 그 당시 뮤즈 장면에서 세훈이 편지를 뺏어 들고 읽으면 안 된다고 말하자, 해진이 급격히 표정이 안 좋아지며 헛웃음을 쳤었다. 이후 세훈과 편지를 사이에 두고 계속 시선을 마주하다가도 칠인회 멤버들에게 끌려나가며 세훈의 쪽으로 계속 편지를 들이대는 모습을 보고 해진이 이때 눈치를 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자첫 땐 아무래도 극의 전반적인 흐름을 보기 때문에 해진의 편지에서 어느 순간부터 너에게 히카루를 느꼈다, 하는 말을 듣고 언제부터 알아챘던 건지 혼자 추측도 해보고 계속 생각해 봤던 기억이 있는데, 나름의 시그널은 있었더라. 그래서 오늘 볼 때 뮤즈 장면에서 해진의 표정을 위주로 봤었는데, 세훈이가 저렇게 반응하자 해진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설마 쟤일까? 아니겠지? 에이 설마 하는 뉘앙스였다. 모르긴 몰라도 이때부터 히카루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감은 잡았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두 번째 때는 확신이었다면 오늘은 가벼운 의심 정도. 이 표정을 보고 나서 뮤즈에서 흩날리는 편지들을 사이에 두고 시선을 마주하는 해진과 세훈의 모습에 다시금 소름 돋으면서도 연출 또한 이 장면을 잘 살렸다는 느낌이 들었다.
뮤즈에서 칠인회 선생님들이 하는 말들을 이전에 그렇게 귀담아듣지 않았었는데, 오늘 들어보니 그이들이 취해서 내뱉는 가벼운 말들이 전부 의도치 않게 세훈에게 상처를 주는 말들이었다. 편지의 수신인이 달라지면 내용의 가치가 달라지는 거라고 하는 말이나, 히카루가 악마인지 하는 이런 말들을 들으며 세훈이 그들을 등지고 움츠려 앉아있을 때 그 말들에 시시각각 상처받는 모습이 보였기에 더더욱 고백을 할 수 없었던 마음과 칠인회에서 해진을 빼내기 위해 투서를 쓴 과정의 흐름이 더욱 자연스럽게 느껴졌었던 것 같다.(물론 거짓투서를 쓴 세훈의 행동이 절대 잘했다는 것은 아니다. 이전 시즌 팬레터에서 세훈의 인물설정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고)
대본만 읽어본다 해도, 세훈은 나이에 걸맞지 않은 뛰어난 필력을 가지고 있으나 어린 나이 특유의 미성숙함이 보이는 지점들이 꽤 있다. 그중 하나가 뮤즈 장면 이후 해진이 눈치를 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곧바로 다음 편지에 당신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보여줘서 실망했다는 내용을 보내는 것인데, 이전에 그렇게 의심이 가게끔 화를 낸 후 불안함에 떨며 답장을 하는 세훈의 모습에 이 장면이 더욱 인물의 미숙함을 와닿게 했었던 것 같다.
그녀를 만나면에서 해진이 같은 별 하며 하늘을 손으로 가리킬 때 세훈이 같이 웃으면서 그 별 바라보다 퍼뜩 놀라 웃음을 거두고 고개를 젓고, 태준이 야인풍경이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고 했을 때 걱정하면서도 사람들의 반응을 진심으로 궁금해하고 등단이라는 말에 부끄러워한다. 이런 세훈의 순수한 면모들이, 미움과 무관심에 익숙해있던 아이가 갑자기 찾아온 순간의 달콤함을 맛본 후 더 이상 그것을 빼앗기고 싶지 않아 하는 마음을 히카루와 같이 있을 때 겉으로 비로소 드러내어 더욱 부각해 주는 듯했다.
어느 정도 자의지를 가지고 히카루를 이용하는 세훈이기에, 섬팬에서도 느낌이 매우 달랐다. 섬팬 왈츠에서 히카루와 세훈이 바뀌는 장면에서 해진을 낚아챈 후 한 바퀴 빙 돌렸었는데, 눈앞 해진에게 이건 나라고 어필하는 듯했었다. 또한 히카루와 해진의 마지막을 두고 싸울 때도 히카루에게 편지를 집어던지는 등 히카루에게 휘둘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강해 보였었는데, 이런 모습들이 고백까지의 흐름으로 잘 이어졌었던 것 같다. 고백에서 울며 주먹으로 본인의 가슴을 때리면서 내가 당신의 히카루에요 하는 문장에 방점을 찍어 화내듯이 말하고, 이 가사 다음에도 해진의 거부하는 반응에 '제가 히카루라니까요!?' 하며 울먹이는 세훈의 모습에, 해진에게 미안한 마음 반, 본인을 글 너머 히카루가 아닌 정세훈으로 알아달라는 간절함이 더 느껴졌었다.
0210에서 준휘세훈은 고백 때 해진에게 무릎을 꿇은 채 '모두 다 제 잘못이에요, 다 저 때문이에요' 이런 말들을 거듭하며 해진에게 사과했었다. 그동안 세훈이가 계속 지니고 있었던 죄책감의 무게가 와닿는 동시에 모든 책임 본인에게 전가하지만, 했던 말들을 계속 반복하며 해진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눈물을 쏟아내어 오히려 더 애처롭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오늘 성일세훈은 이 장면에서 '선생님, 제가 다 설명할 수 있어요, 오해가 있었어요 그러니까..' 하며 본인이 감당하기 힘든 이 모든 상황을 변명하려 들지만, 끝내 말을 잇지 못한다. 해진에게 고백하기까지 준휘세훈은 정말 오랜 시간 이 상황을 상상하며 혼자 속을 오래 앓았을 것만 같았고, 성일세훈은 해진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직감한 이후에 앞뒤 가리지 않고 바로 결심했을 것만 같았다.
준휘세훈에게 혜인카루란 마음속 깊이 잠재된 욕망/ 본인이 되고자 했던 모습 같았었는데 성일세훈 스위치 하나만 누르면 바로 튀어나올 것 같았던 세훈의 모습인 듯했다. 뮤즈 이후 히카루가 해진에게 마지막 편지라고 하자 해진이 안된다며 절규하자 입을 가리고 웃는 세훈을 보면서도 어느 정도 자발적으로 세훈 자체가 모든 일에 가담하고 있다는 느낌을 줬었다. 앞서 언급했었던 것처럼 준휘세훈보다 더욱 히카루와 비슷하고, 히카루에게 덜 휘둘리지만 다른 장면들에서 보이는 솔직함과 충동적인 모습들에 전자보다 되려 어린 느낌을 많이 받았었다.
처음과 오늘 둘 다 같은 해진으로 봤었는데, 지난번엔 정말 히카루가 누구든지 상관없다는 느낌으로 극을 이끌어나가기도 했고 이게 고백에서도 티가 났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글보다는 그 너머 히카루를 어느 정도 바라보는 느낌이었기에 이런 세훈의 고백이 더 마음이 아프게 느껴졌었던 것 같다. 해진의 편지 시작에서도 세훈이 세훈전... 세훈전! 하며 기뻐하면서 우는데 그간 히카루로 편지를 보내며 허무함을 다 터뜨리는 느낌이라 고백에서의 간절함이 다시금 떠올랐었다.
아직 본 해진은 두 명뿐이지만 개인적으로 오늘의 해진을 정말 좋아한다. 기본적으로 정말 히카루가 누구였든지 상관없었을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해진이기도 하고(날바날로 세훈을 대하는 태도는 약간씩 차이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방향은 변함이 없는 듯했다) 그렇기에 해진의 편지에서 느껴지는 해진의 성장 서사, 어떤 진실성이 있다. 저번 후기에서도 남겼지만, 세훈을 그렇게 남겨두고 떠난 후 정말 많이 후회했었을 것만 같았다. 그간 주고받은 편지를 계속 읽어보며 이름뿐이었던 히카루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보았을 것 같고, 그 과정에서 진심으로 히카루를 세훈으로 받아들인 그 과정이 해진의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고 해야 할까, 세훈을 마주하고 말로 전해주고 싶었지만 계속 찾다가 끝끝내 찾지 못하고 해진의 편지를 윤에게 부탁 후 유언처럼 남겼을 것만 같았다.
2막에서 해진이 윤에게 자신이 더 이상 글을 쓰지 않는 것은 나를 단순히 무기력한 폐병 환자로 정의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때, 히카루가 뒤에서 그런 해진을 보며 무표정하게 눈물을 흘리다 윤이 간 후 아무렇지 않게 눈물을 닦아내고 책상 위 원고들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다. 본인도 세훈이기에 어쩔 수 없는 반응이지만, 그런 감정을 대처하는 히카루의 태도에 정말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두 번째 볼 때까지 이윤 캐릭터에 대해 그렇게 중요도를 두지 않았었는데, 오늘 이윤을 보고 나서 이윤이 정말 중요한 캐릭터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천재작가 이상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여서 그런지 특유의 괴짜 같은 면모가 잘 드러나는 이윤이었는데, 구치소에서 세훈의 모든 이야기를 듣고 다소 퉁명스러운 말투로 '글 써, 정세훈으로', '계속 글 써 인마' 툭 내뱉는데 김해진을 대할 때 느껴졌던 따뜻함과 정말 성숙한 어른이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래서 이윤이 뒤돌아 가려고 하자 고개를 숙이고 '존경합니다, 선생님' 하며 맨 처음 윤을 만났을 때 했던 말을 되풀이하며 우는 세훈의 마음에 깊이 공감이 됐었고, 해진이 형은 너를 원망하지 않는다는 말이 더욱 진실되게 들렸었던 것 같아 이 장면에서 처음으로 같이 울었었다.
말이 많았지만 결론은 또 보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