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핑크born pink

by bx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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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qX_6stnU1xk


신호음이 울리고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심한 듯 사려 깊고 높지도 낮지도 밝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마냥 어둡지도 않은 억양 변화가 거의 없는 모노톤의 목소리. 소리에 공기가 잔뜩 끼어있어 우수에 차 있는 것처럼 들리는 목소리. 9일만이든 90일만이든 900일만이든 언제 듣는대도 바로 알아차릴 수 있는 내가 아주 잘 알고 있는 그 목소리였다.


나야.

어.

잘 지냈어?

어.

바다 보여줄까?

안 봐.

아직도 삐졌어?

아니.

삐진 거 같은데.

...거기서 살 거야?

다음주에 올라가.

거기서 살지, 그 사람이랑.

아니라니까.

너를 믿을 수 없어.

그럼 사진 왜 보냈어? 시는 왜 보내고?

(침묵)

내 인스타 봤어?

안 봐.

거기 여행 기록 올려놓았어. 내가 뭐하는지 다 적혀 있어. 당신이 상상하는 그런 일 없었어.

너를 믿을 수 없어.

아, 그럼 믿지 마. 전화하지 말고.

전화 내가 안 했는데.

그럼 사진 보내지 마. 시도 보내지 말고.

오늘은 어디가?

신발 사러 가.

신발은 왜?

내일 한라산 가.

갔다 오지 않았어?

또 가.

혼자 참 잘 돌아다녀.

내가 알아서 할게.

...추운데 조심히 올라가.


가뭄에 콩 나듯 무심으로 일관한 저 말투에도 애정이 깃들어 있을 때가 있다.




제주시로 들어서자 차량이 많아졌다. 제주시는 여느 중소도시와 다름없다. 건물도 제법 높고 차도 붐비고 거리는 복잡하다. 그동안 인적이 드문 시골길에 익숙해져서인지 촌에서 상경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공영주차장에 차를 받치고 제주 시내를 걸었다. 이곳이 제주 상권의 중심지 칠성로라고 했다. 일제강점기 때부터 상점가가 들어섰고 그보다 훨씬 이전에는 원도심으로서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였다. 도민은 칠성로의 유래를 브리핑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등산화보다는 트래킹화가 날 거야. 평소에도 신을 수 있게. 예산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앞으로 십 년은 신을 건데 좋은 걸로 사야지.
십 년이면 산을 안 타겠다는 거지.
그렇지. 내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트래킹화가 되는 거지.

첫 번째로 들어간 아웃도어 전문점에서 도민은 검은색 트래킹화를 집어 들며 이거 어때, 하고 물었다. 발바닥이 뼈를 연상시키는 인체공학적 디자인이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매장을 빠르게 훑어보고 말했다.

여긴 마음에 드는 게 없어.

매장을 세 개쯤 들어갔다 나왔을 때 도민이 내 패딩을 보며 말했다.

네 취향을 알겠다. 핑크를 좋아하는구나.

내가 입은 패딩의 안감은 인디언 핑크였다. 내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건 아닌데. 핑크가 없으면 감성이 없잖아. 하하.
잘 모르겠는데.
핑크는 감성이 있다니까.
그냥 핑크를 좋아하는 걸로.

네 번째 매장에 들어갔을 때 알바생인지 주인인지 중년 여성이 발랄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어떤 걸 찾으세요?
트래킹화요.
요즘 이런 게 잘 나가는데 어떠세요?

중년 여성이 진회색 운동화를 집어 들었다. 도민이 옆에서 대신 말해줬다.

핑크는 없나요?




예닐곱 개의 매장을 다녀와 드디어 새 신을 샀다. 연회색 바탕에 연핑크가 포인트로 들어간 트래킹화였다. 사은품으로 등산양말도 두 켤레 받았다. 내일 한라산 등반 전 조금이라도 발을 적응시키기 위해 아디다스 운동화를 벗고 트래킹화로 갈아 신고 제자리에서 폴짝 뛰어보았다. 발에 오리발을 낀 듯 무거웠다. 가벼운 신발만 신었던 나는 신발의 무게로 인해 발이 더 피곤해질 것 느낌이 들었지만 어느 정도 무거워야 충격을 흡수해 준다는 등산 애호가의 말을 믿기로 했다.

앞으로 십 년을 함께할 트래킹화. 잘 부탁해.

이제 공항으로 간다.

j를 만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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