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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Oct 14. 2023

시인의 질문

이제 제주기억을 bxd 유튜브에서도 만나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3du5_eEq2uA


미래는 언제나 무無였다. 있는 것은 언제나 밑도 끝도 없는 수렁 같은, 막막한 현재뿐이었다.
-최승자, 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중에서

짧고 강렬한 문장이 나의 심장을 쥐고 흔들었다. 한 문장 한 문장이 고통스럽다. 검은 먹물 같은 늪에 빠져 체념한 듯한 얼굴을 한 젊은 여자의 모습이 어렴풋하게 그려졌다. 그 여자는 저 문장을 썼을 당시 젊은 시인의 모습이었고 골방에 처박혀 글을 쓰던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꿈이 형벌 같다고 느꼈던 시기가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에 저당 잡혀 현재를 좀먹던 그때, 웃음기 하나 없이 세상을 비관으로 일관했고 실현되지 않는 욕망으로 불면과 두통을 달고 살았었다. 서글펐다. 한없이 부족했던 나를 무참히도 학대했었다. 꿈은 지독히도 잔인했다.

책을 덮었다. 대형 유리창 너머로 바다를 바라보았다. 환기가 필요했다. 시인은 정신분열증을 오래도록 앓았고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퇴원 후 집에 돌아오면 약도 밥도 먹지 않았고 그러면 외숙이 찾아와 시인을 강제 입원시켰다.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비극적인 인생쯤이야. 기꺼이 나를 제물로 받쳐야지. 감히 가당치도 않은 생각이었다. 한때 위대한 예술가의 비극적 인생을 탐닉했던 나지만 이제 그들의 작품을 마주하면 아프고 고통스럽다.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다들 그러고 살아. 그러니까 그냥 살아.

그냥 살아도 되는데, 다들 그러고 사는데 시인은 그러지 못했다. 꼭 시인으로 남지 않아도 되는데, 한때의 영광을 훈장 삼아 평생을 떵떵거리며 배 따숩게 사는 사람도 많은데, 제 한 몸 건사하지 못하는 한 가녀린 영혼이 가여웠고 나의 일인 양 마음이 쓰라렸다. 세상이 부조리하게 느껴졌고 하늘이 참 무정하다 생각되었다. 다들 그렇게 사는 것처럼 그냥 살기 위해 나는 도망쳤다. 그 골방에서 뛰쳐나왔다. 회피와 외면의 대가로 소위 사람 구실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넉넉하않지만 조카에게 헬로카봇 6단 합체 변신로봇을 사줄 정도는 되었다. 기뻐하는 귀여운 조카의 모습을 보면 그래 이거지, 이게 삶의 기쁨이지 싶다가도 대부분의 시간은 사는 게 재미없었다. 글을 쓸 때의 열정이나 욕망은 사그라들었고 시골 시장 바닥에 앉아 나물을 파는 노인의 눈빛처럼 무엇을 보아도 빛나지 않았다. 그때의 선택이 최선이었는지 현재의 내가 답을 해야 하지만, 나는 여전히 답을 유보하고 있다. 시인은 내내 덮어두었던 질문을 끄집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행복하니.

그렇게 도망치니 행복하니.


그만 생각하자. 아침에 비가 내려 어두웠던 하늘이 맑아지고 있었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핸드폰을 여니 메시지가 와있었다. 인적이 드문 어느 바닷가를 산에서 조망한 사진이었다. 태양의 주황빛이 기세 좋게 번져나가는 것으로 보아 아침에 찍은 사진인 듯했다. 일출과 일몰의 색은 달랐다. 사진을 보낸 이는 b였다. b는 아무런 말도 없이 달랑 사진 한 장을 보내왔을 뿐이다. 여행이라도 간 것인가. 갑자기. 그렇게 떠나고 싶다더니. 나도 시인의 글귀를 찍어 보냈다. 산문집을 출간했을 때 시인의 심정이 우리의 관계를 표현하는 말 같았다.

오랜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자니
웃음이 쿡 난다.
웃을 일인가.
그만 쓰자
끝.

1이 사라졌다. 답장은 없었다. 답장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기에 다시 핸드폰을 내려두고 바다를 응시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 짐을 챙겨야 한다. 도민을 만나 새 신발을 사고 공항에 가 j를 만난다. j라니... 이게 얼마만인가. 도민도 그렇고 제주에 오지 않았다면 영영 보지 않았을 것이다.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만남이 이어지고 있다. 카톡 알림이 다시 울렸다.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 b의 답장이었다.

기억하는가
우리가 만났던 그 날
환희처럼 슬픔처럼
오래 큰물 내리던 그 날
네가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네가 다시는 전화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평생 뒤척였다

시인의 시였다. 피식 웃음이 났다. 손가락을 세어보았다. 그날 마지막으로 통화하고 9일 만이었다.

뭐야... 귀엽게 이런 걸 다 보내고.


b에게 전화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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