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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Oct 11. 2023

이다

이제 제주기억을 bxd 유튜브에서도 만나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i1mnwqDi3oQ


왼손으로 오른쪽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검지가 허전했다. 며칠 그 자리에 있던 돌고래반지를 잃어버렸다. 아무래도 숙소에다 놓고 온 듯했다. 그럼 그렇지. 이번 반지도 십일을 못 넘겼다.

책방은 숙소에서 도보 10분 거리에 있었다. 경사길 중턱에 위치한 일반 가정집 대문에 검은색 칠판이 걸려 있었고 하얀색 분필로 애월책방이다 open이라고 쓰여 있었다. 자세히 보니 칠판이 아니라 나무 합판에 검은색으로 페인트칠을 한 거였다. 나뭇결을 따라 페인트가 여기저기 벗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연식이 있는 책방인 것 같았다.

하얀색 시 같은 미닫이 문을 열자 책으로 둘러싸인 실내가 들어왔다. 방과 방을 터 만든 곳이었다. 적지 않은 면적인데도 공간 가득 책이 채워져 있어 비좁아 보였다. 좁은 통로를 지날 때면 사람과 혹은 책과 부딪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했다. 이 동네에서 묵었던 관광객들이 한 번씩 들르는 유명 코스인지 사람들이 많았다. 평소 책을 읽는지는 알 수 없으나 책방을 나갈 때 손에 하나씩 책을 들고나갔다.

이곳에는 어떤 책이 있을까.

독립서점의 특징은 주인장 마음대로였다. 주인장이 원하는 책을 원하는 방식으로 가져다 놓기 때문에 독립책방은 주인장이 만들어 놓은 한 세계와도 같았다. 한 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으로 천천히 공간을 훑어보았다. 벽면에, 책꽂이에, 전등에, 옷걸이에 북- 찢은 갱지가 걸려 있었고 종이에는 책꼽문이 휘갈겨 써져 있었다. 방금 대문 앞 칠판에서 본 그 글씨체였다. 주인은 그런 식으로 책을 읽으며 좋아하는 글귀를 써두었다. 이 많은 책을 다 읽은 것인지 샘플로 놓인 책마다 연필로 밑줄이 그어져 있고 당시에 떠오른 생각이 적혀 있었다. 주인장은 정말로 책을 좋아하는 사람 같았다. 책을 추천해 준다는 메모도 보였다. 우리 엄마도 이렇게 책을 보며 좋은 글귀를 적어두면 좋을 텐데... 현실성 없는 바람이었다. 평생 책 한 권 읽지 않고 몸으로 때우며 살아온 엄마는 요즘 부쩍 인지 능력이 떨어지셨다. 단어를 떠올리는데 오래 걸리고 원하는 바를 정확히 언어로 표현하지 못했다.

?

자석에 철가루가 달라붙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책을 손에 쥐었다. 검은색 표지에는 피골이 상접한 노인이 허무와 슬픔에 찬 시선을 내리깔고 담배를 물고 있는 사진과 함께 하얀 글자가 휘갈겨 써져 있었다.

최승자.

주인장과 비슷한 글자체였다. 언제 책을 내신 거지. 후미를 펼쳐보니 초판 1쇄 2021년 11월 30일이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벌써 6쇄였다.

책을 내셨구나... 병원에서는 나오신 건가...

평생을 불면과 정신분열에 시달렸고 종적을 감추고 행방불명되었으나 정신병원에서 발견된 천재시인. 대학 때 시인의 시를 읽고 전율이라는 걸 처음 느꼈다. 글이 사람을 이렇게 요동치게 할 수 있구나. 평생 쓴대도 시인의 발가락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는  함께 그럼에도 글을 사랑하게 만든 시인. 한때 나를 뒤흔들었던 문장들이 떠올랐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십세 중에서

너희들 문간에는 언제나
외로움의 불침번이 서 있고
고독한 시간의 아가리 안에서
너희는 다만
절망하기 위하여 밥을 먹고
절망하기 위하여 성교한다.
-과거를 가진 사람 중에서

까맣게 잊고 있던 과거를 만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 머나먼 곳에서 시인을 다시 만날 줄이야. 이 공간이, 주인장이 고마다. 이제 칠순이 넘으셨을 텐데... 우리 엄마와 별로 나이 차이도 안 나는데 건강이 염려되었다. 책을 집어 들고 계산대로 갔다. 컷트 머리의 흰색 뿔테 안경을 쓴 여주인은 낭랑한 목소리로 어서오세요 하고 인사했다. 계산을 하며 시인의 안부를 물었다.

이 분... 지금 어디 계세요?
정신병원에 있지 않나요?
아직도요?
그렇지 않을까요?

주인장의 대답에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시인이 건강해진 모습으로 더 많은 좋은 글을 세상에 남겨주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건넨 카드를 받아 들며 주인장에게 한 번 더 말을 건넸다.  

책 좀 추천해 주세요.
어떤 걸 찾으세요?
어머니에게 선물할 책이고요, 어머니가 평생 일만 하신 분인데 최근에 많이 아프세요.

몇 권을 추천받았고 그중 박노해의 사진과 글귀가 담긴 잡문집을 선택했다. 손바닥 크기두께가 5cm 되었으나 사진도 있고 문장도 짧아 엄마가 보기에 부담스럽지 않을 것 같았다. 책방 주인은 책을 받아 들고 기름종이 같은 흰색 포장지로 책을 싸고 노끈과 천 쪼가리로 매듭을 졌다. 그러더니 책갈피에는 이렇게 썼다며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보여주었다.

태어나주셔서 감사합니다.

후드득. 순식간이었다. 빗방울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저... 휴지 좀...

나도 주인도 당황했다. 다행히 사람들이 나간 뒤였다. 하여간 나이 들어서 주책이야. 뒤 돌아 눈물을 닦아내는 나를 책방 주인은 모르는 체하며 엽서 한 장을 더 챙겨주었다. 초록색 수채화 물감으로 그려진 나무였다.

어머니께 드리세요. 그리고 이런 거 쓰시면 좋아요. 이렇게 날짜 쓰고 필사하고 그러면서 손가락 근육도 키우고요.

주인이 보여준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쓰는 일기장이었다. 맨 윗줄에는 년, 월, 일, 시와 날씨를 입력하게 되어 있고 아래는 큼지막하게 표처럼 줄이 구분되어 있었다. 엄마가 긴 생을 지나 늙어 초등학생이 된 것 같았다. 머지않아 조카보다도 더 아이가 되어 거동이 둔해지겠지. 마침 한 달쯤 전 손가락이 잘 움직이지 않는다고 하셨다. 또다시 눈물이 차오르며 고개를 떨구었다. 책을 받아 들고 황급히 책방을 나왔다.




최승자 시인 2010년 조선일보 인터뷰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1/21/201011210110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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