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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Oct 07. 2023

숙소의 여자들 2

이제 제주기억을 bxd 유튜브에서도 만나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EJAhxYGHU3I


제주에 와 확실히 아침형 인간이 되었다. 오늘도 알람보다 일찍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집주인의 취향인지  천에 초록 플랜테리어가 소소하면서 매력적이었다. 고대로 집으로 옮기고 싶은 인테리어였다. 바닥에 대리석이 깔리고 한강이 보이는 고층 아파트보다 아담하고 감성 충만한 이런 곳이 내게는 더 예뻐 보였다. 소파에 앉아 간이의자에 발을 올려놓고 컴퓨터를 켰다. 카페에 갈 필요가 없다. 퇴실 전까지 여기서 시간을 보내야지.

한 시간쯤 지났을까. 슬슬 팔다리가 떨려왔다. 오늘로 3월이 되었지만 아침 공기는 쌀쌀했다. 방에서 옷을 꺼내올 수도 있지만 아직 다들 자는 중인 것 같았다. 그때 조용한 여자가 거실로 나왔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여자는 고개인사를 하고 말을 걸었다.

제가 어제 소리를 지르지 않던가요?
소리요? 전혀요.
아... 다행이다.

조용한 여자는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작을 하고는 내 옆에 앉아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어제 말한 연상의 애인인 것 같았다. 작업하며 대화를 훔쳐 듣는데 여자가 훌쩍이며 말했다.

어제도 자는데 악몽을 꿨어.

조용한 여자는 통화하는 내내 새끼 강아지가 낑낑 대는 듯한 목소리로 훌쩍 댔다. 나도 한 우울 하는데 여자를 보니 나는 건강한 축이었다. 한참 뒤 통화가 끝나고 여자는 소파에 거의 가라앉아 있었다. 통화 내용을 들었기에 뭐라고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음악 좋아하세요?
네?
음악을 들으면 기분이 좀 나아져요. 그리고 따뜻한 물도 도움이 되고요.
감사합니다.
괜찮으시면 음악 틀어도 될까요?
네.

조용한 여자를 위해 어떤 노래가 좋을까 잠시 생각하다 sarah kang의 once in a moon을 재생했다.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 곡이었다. 노래가 2/3쯤 재생되자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워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조용한 여자는 그렇게 말하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뭐지. 어제에 이어 또다시 한 대 맞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한 시간 넘게 이 공간에서 추위를 참아가며 일하고 있는데 여자는 고작 십여분을 있었을 뿐이다. 우울증 진단의 진위를 가릴 이유는 없지만 저 정도로 제 감각을 소중히 여긴다면 우울증이라고 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우울감은 그것이 삶을 송두리째 지배했을 때 문제이지 일정 정도의 우울은 인생에서 필연적이었다. 제 우울함을 시시콜콜 이야기할 상대가 있는 저 상태가 우울하다고 볼 수 있을까. 정말로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은 집 밖을 나갈 의지조차 없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조용한 여자는 우울증을 무기 삼아 연인으로부터 혹은 타인으로부터 안쓰러운 시선과 챙김받는 것을 선호하는 것 같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작업을 마치고 방 안으로 들어가자 짐을 정리하던 마흔둘 여자가 물었다.

아침 먹어요? 호박죽 있는데.
좋죠.

부엌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자는 밥그릇 하나에 데운 호박죽을 부어 내 앞에 놓았다.

왜 안 드세요?
나는 하도 먹어서 못 먹겠어요. 물려서.

여자는 최근 코수술 후 붓기 제거를 위해 매일 같이 호박죽을 먹었다고 했다. 내가 다 먹을 때까지 여자는 내 앞에서 어제에 이어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나가는 이를 붙잡고 자기의 이야기를 할 정도라니. 마흔둘 여자야 말로 많이 외로운 듯했다. 어제 자신도 우울증 약을 복용했었다고 한 고백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우울함을 전시하지 않는 마흔둘 여자 쪽이 더 마음이 갔다. 여자는 남은 호박죽을 다른 여자들에게도 권했지만 아무도 먹지 않는다고 하여 싱크대에 흘려버렸다.

머리를 감고 나왔을 때 숙소의 여자들은 한창 퇴실 준비 중이었다. 귀여운 여자는 또다시 곱게 화장을 하고 있었고, 조용한 여자는 짐을 챙기고, J인 마흔둘 여자는 벌써 짐을 다 챙기고 양볼에 발그레하게 볼터치를 하고 침대에 기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볼터치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못 알아보겠는데. 하하.

나의 농담에 마흔둘 여자가 호호하고 웃었다. 그러더니 책 잘 봤다며 내가 어제 빌려준 책과 함께 김택화의 그림이 담긴 엽서 한 장을 건네주었다. 먹인지 검은색 물감인지로 그린 어두운 배경의 나무 그림이었다. 밖으로 웃고 있지만 안은 까만 여자의 내면 같았다.

여행 와서 이렇게 많이 이야기한 거는 처음이에요. 고마워요.
비행기 타기 전에 시간 되시면 바다에 가서 뛰어보세요.

여자는 또다시 호호 웃었다. 원래 웃음이 많은 사람 같았다. 여자가 지금의 그늘을 딛고 다시 웃게 되길 그리고 유럽 여행을 통해 자신을 더 사랑하는 기회가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

퇴실 시간에 맞춰 우리는 다 함께 나왔다. 남은 여행 일정과 서로의 앞날에 행운을 빌어주고 각자의 길로 떠났다. 나도 현관문 밖 테라스에 짐을 두고 근처에 있다는 책방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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