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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xd Oct 04. 2023

숙소의 여자들 1

이제 제주기억을 bxd 유튜브에서도 만나 보세요:

https://www.youtube.com/watch?v=6gu2gQU0HxM&t=3s


방문을 열자 홀로 여행 중인 3명의 처자가 일제히 나를 보았다.


안녕하세요...


어색한 인사를 시작으로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그들은 이것저것 질문을 해대기 시작했는데 이렇게 적극적인 투숙객들은 처음 보았다. 다들 혼자 여행에 지쳤거나 외로운 듯했다. 두 명은 이십대 중반으로 보였고 한 명은 나이가 좀 있어 보였다. 이 밤에 곱게 화장 중인 귀엽게 생긴 여자가 물었다.

몇 살이세요?
마흔하나요.
정말요? 삼십대 초반 정도로 생각했어요.
아유, 무슨.

손사래를 쳤지만 속으로 생각했다. 바로 이거지. 얼굴에 은근한 미소가 퍼졌다. 지난주 말을 타러 갔을 때 아저씨 같이 생긴 남자로부터 어머니란 말을 들어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었다. 나이란 숫자에 불과하지 않다. 내 나이를 듣자 1층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여자가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나 마흔둘. 반가워요. 또래는 처음 만나네. 호호.

여자는 정말 반가운 얼굴로 활짝 웃었다. 저렇게 웃을 건 뭐람. 의아했지만 나 역시 웃음 지으며 아~ 하고개를 끄덕였다. 귀여운 여자가 귀여운 말투로 다시 물었다.

여행하신 지 며칠 됐어요?
이주쯤요.
와, 오래 계셨네요?
어머, 나도 오늘 딱 이주째인데.

마흔둘 여자였다. 여자는 아까보다 목소리가 더 커졌다. 이번에도 아, 정말요? 하고 짧게 응수했다. 건반으로 치자면 나의 반응은 레나 미 쪽에 있는데 반해 여자는 솔이나 라쯤에 가 있었다.

신기하다. 나랑 비슷한 시기에 입도했네. 언제 가요? 난 내일 출도하는데.
6일 뒤요.
어디 어디 다녔어요?
동부 갔다가 서부 왔어요. 이제 남부 남았네요.
많이 다녔다. 차가 있어요?
렌트했는데 오늘 반납했어요.
좋겠다. 나는 뚜벅이로 다녀서 많이 못 다녔어요.
이주 동안 뚜벅이요? 이 짐을 갖고요?

마흔둘 여자의 침대 앞에 놓인 28인치 캐리어를 가리키며 말했다. 놀라워하는 나의 반응에 여자가 부끄러운 듯 웃으며 말했다.

힘들었어요. 호호.

귀여운 여자는 화장을 마고 동네 LP 바에 간다며 나갔다. 마흔둘 언니와는 카펫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기소개 후 줄곧 말이 없던 조용한 여자는 조용히 듣기만 했다. 마흔둘 여자는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코 수술 후 제주도 여행을 자청했다. 내일 출도 후 일주일 뒤에는 한 달간 유럽 여행을 간다고 했다.

돈이 많으신가 봐요.
벌어둔 돈 다 털어서 가는 거예요. 다녀오면 그지예요, 그지.
우리 나이에 그렇게 다니기 쉽지 않은데, 무슨 사연 있으신 거 아니에요?

내가 웃으며 말했다. 여자는 심각해진 표정으로 답했다.

그래 보여요? 사연 있는 것처럼? 안 되는데...
진짜 여행 좋아하지 않는 이상 그렇게 시간 내서 다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우리 나이에. 먹고 사느라 가장 바쁜 시기잖아요. 인생이 정체되어 있을 때 떠나는 거 아니겠어요?

방금 전 바다를 보며 생각했던 바였다. 여자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더니 근심 가득한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어쩌지, 그럼.
뭘요? 유럽 여행이요?
사연 있는 여자처럼 보이고 싶지 않은데.
뭐, 그런 걸 신경 써요.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솔직히 제주 와서 며칠은 재밌었는데 좀 지나니까 여행도 재미없어지더라고요. 힘들고... 이제는 바다를 봐도 아름답다는 생각이 안 드는 거. 호호.
그럼 취소해요.
취소하려면 비행기 삯이니 숙소니 비용이 얼마인데.
취소 수수료가 그렇게 비싸요?
한 달 치 숙소 다 취소하려면 돈 많이 들 텐데. 취소도 안 해줄 거 같고.
한 달 치를 예약했다고요??
왜? 나 제주도도 2주 치 숙소 다 예약하고 들어왔는데?

입이 떡하니 벌어졌다. 말로만 듣던 J를 만났다. 숙소를 예약했다는 것은 언제 어디에 갈지도 대략 계획했다는 뜻이었다. 그것은 여행에서의 변수를 최소화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살아가는 방식이야 저마다 다르고 예정대로 계획을 수행했을 때 오는 즐거움도 있겠지만, 가끔씩 무계획에 나를 던졌을 때 그 과정에서 발견하는 재미와는 결이 다를 것이다. 마흔둘 여자가 남은 여행에서 예상치 못한 일을 경험해 봄으로써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기를 바랐다.


언니, 안 하던 거 해보세요.
안 하던 거? 뭐?
바다에서 소리 지르며 뛰어다녀 보세요.

여자는 깔깔 대며 웃었다. 진심이었는데 농담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았다.

성격 좋네. 호호.

성격이 좋다는 이야기는 머리털 나고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예민과 우울을 늘 달고 살았는데 낯선 이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는다 게 신기했다. 제주 여행으로 정말 달라지기라도 한 건가. 내 안의 어린아이가 조금 성장한 것일까. 사실, 성격이 좋은 건 여자 쪽이었다. 잘 웃고, 낯선 사람에게 관심을 보이고, 솔직하게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쪽이야 말로 건강한 사람이었다. 원래 밝은 사람이 잠시 어두운 시기를 지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방에서 책을 꺼내 여자에게 건넸다. 시간은 한 번뿐 되돌릴 수 없고. 여기저기 구겨지고 찢어진 마음을 어루만져준 책이었다.

언니, 이 책 한번 봐보세요. 도움이 될 거예요.

귀여운 여자는 두 시간 만에 돌아왔다. LP 바 문이 닫서 한담해변 근처까지 택시 타고 가 와인을 마시고 왔다고 했다. 솔로인 귀여운 여자는 아무래도 즉석만남이 성사되지 않은 듯했다. 이윽고 소등 시간이 가까워지자 조용한 여자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우울증이 있거든요.

우울증이란 말에 이제 대화의 주인공은 조용한 여자가 되었다. 모두 안쓰러운 얼굴로 조용한 여자를 걱정했고 질문포화가 이어졌다. 그 중심에는 마흔둘 여자가 있었다. 마흔둘 여자는 자신의 경험담을 이야기하며 복용했던 약을 읊어대며 다시 일어설 수 있다고 용기 잃지 말라고 했다. 조용한 여자의 사연은 그러했다. 대학 때부터 사귀었던 동갑내기 애인과 헤어지고 우울증이 시작되었고, 헤어진 지 일 년이 다 되어가도록 밤에 악몽을 꾸고 있으며, 현재는 자신을 아껴주는 배려심 강한 한 연상의 연인과 사귀는 중이라고 했다. 마지막 대목에서 나를 비롯한 나머지 세 여자는 어딘지 한 대 맞은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귀여운 여자, 마흔둘 여자 모두 솔로였고 나 역시 공식적으로 헤어진 상태였다. 조용한 여자의 애인은 혼자 여행 온 여자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을까 걱정해 내일 휴일에 맞춰 제주에 오기로 했다고도 했다. 이야기를 주도했던 마흔둘 여자도 내심 머쓱한지 입을 다물었다. 조용한 여자가 이어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자다가 소리를 지르더라도 이해해 주세요.

자정이 되자 방의 불이 저절로 꺼졌다. 나를 포함해 네 명의 여자는 각자의 침대로 올라가 커튼을 치고 침대별로 마련된 전등을 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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