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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를 달려 도착한 곳은 사람이 잘 올 것 같지 않은 외딴 길목에 있었다. 이름하야 왕이메오름. 옛날 탐라국의 삼신왕이 와서 사흘 동안 기도를 드렸다 하여 지금의 이름이 되었다고 한다. 사유지인 이곳은 거의 관리되지 않고 방치된 듯했고, 때문에 아는 사람들만 오는 숨은 명소 중 하나였다. 분화구 안쪽까지 내려갈 수 있는 몇 안 되는 오름이기도 했다. 돌덩이가 우후죽순 튀어나온 곳에 주차를 하고 도민의 뒤를 따랐다. 오름은 오랜만이었다. 지난주 아무도 없는 사려니숲길에서 압도하는 자연을 경험한 후 한 번도 오름에 오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혼자였다면 절대 오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람 여기도 왔네.
도민은 볼멘소리를 하며 나뭇가지에 걸린 녹색 띠의 매듭을 풀었다. 한자로 뭐라 적혀 있었는데 도민도 나도 대나무 죽竹 외의 글씨는 알아보지 못했다.
제주 오름들에 이 띠가 걸려 있거든.
산을 좋아하는 분이네.
나도 산을 좋아하지만 그러지 않거든. 우리는 산에 잠시 왔다 가는 것뿐인데, 왜 표시를 하냐고.
그렇게 기분 나쁜 일인가 생각하고 있는데 도민이 한 마디 덧붙였다.
오름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오름이 가능한 오래 그 모습 그대로 있어주길 바라는 것뿐이야.
앞장서서 올라가는 도민은 보이는 족족 돌탑을 발로 걷어찼다. 사람들이 재미로 혹은 어떤 소망을 담아 쌓아 올린 낮은 돌탑이었다.
그거 무너뜨리면 돌 올린 사람의 소원이 날아가는 거 아냐?
이런 게 산을 망치거든. 제주도가 화산섬이잖아. 이런 게 있으면 물의 흐름을 막아서 오름이 훼손돼.
훼손이라 하면 땅이 파이거나 가라앉는 등 지형의 변화를 뜻했다. 도민을 따라 작은 돌탑 하나를 발로 톡 찼다. 대여섯 개의 돌이 투두둑 무너져 내렸다. 나 역시 제주의 여러 오름에서 돌탑에 조약돌을 올리며 소원을 빌었다. 이런 사소한 행동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모르는 누군가는 쌓아 올리고 아는 누군가는 무너뜨리고. 세상의 이치도 이와 비슷할 것 같았다. 대다수의 군중이 깨어나 알아버릴 때 세상은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 길이 맞는 거예요?
분화구 안을 향하면서 도민은 길 같지 않은 길을 만들며 가고 있었다.
여기는 길이 따로 없어. 가는 게 길이야. 어, 복수초다.
도민이 말하다 말고 뛰어가듯 걸어가 멈춰 섰다. 그리고는 쭈그리고 앉아 사진을 찍었다. 도민의 발아래 노란 꽃이 피어 있었다.
이때가 아니면 볼 수 없거든.
도민은 아주 재미있는 무언가를 발견한 듯 신이 나 보였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살짝 웃음기를 머금은 표정이 상기되었다. 지금껏 풍채와 달리 나긋나긋한 말투로 여정을 조언하던 그의 섬세함이 느껴지는 대목이었다. 제주에 와 도민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 알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분화구 안을 돌아 정상에 올랐을 때 파란 하늘에 새의 날갯짓 같은 구름이 피어 있었다. 막 알을 깨고 나온 새가 신을 향해 날아오르는 것 같았다. 오름의 정상은 사방에서 바람이 펄럭임에도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정말 왕이 납시어 하늘에 제를 올렸을 것 같이 경건해지는 풍경이었다. 분화구 너머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수십 개의 오름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어 웅장함을 더했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돌며 영상을 찍었다. 파란 하늘과 날갯짓하는 구름, 길게 늘어진 라산의 능선, 마른 황토색 풀과 나무, 펄럭이는 바람, 안개에 가려진 태양, 그 끝에 도민이 걸리었다. 도민은 하늘인지 분화구인지, 그 너머의 오름인지를 조용히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온전히 자신에게 이르고 있는 한 인간의 진짜 모습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