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사랑 서사를 낯간지럽다 한다.’
자유롭고 아름다운 표현이 소위 '오그라든다'며 평가절하 당하는 세상이다. 나는 저 문장을 써놓고 한참이나 들여다보고선 고민에 빠졌다. 너, 사랑, 서사, 낯, 간지럽다. 그리고 저 나열을 악착같이 품는 나.
나는 '사랑 서사를 낯간지럽다‘ 하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한다. 그들은 달콤한 말과 다정한 행동, 모든 것을 내어줄 것만 같은 저돌, 옛 것으로부터 우연히 발견한 추억 등 이 모든 것들을 망라하는 '낭만'이라는 키워드를 향해 비웃는다. 지금까지 쭉 써온 낭만들 중에서도 남들에게 손가락질당할 만한 것들이 꽤 있을 것이다. 억지 같다, 낭만을 그리 쉽게 치부하면 어떡하냐, 머리에 꽃만 찼다 등. 비판하려면 사소한 것까지 까임 당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상투적인 것이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가랑비처럼 사로잡을 수 있다고 믿는다. 낯선 표현, 신선한 소재, 획기적인 구성은 그 자체로 창의적인 매력이 있지만, 광활한 미지의 우주 안에서 결국 인류가 사랑을 선택하는 SF영화에서처럼, 우리도 흔해 빠진 카테고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그러니 자주 잃어버리기 쉬운 감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냉혹한 현실과 낭만 사이에 투명 다리라도 설치해야 한다. 언제라도 왕래할 수 있는, 그런 연결고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책, 영화, 음악은 감상의 통로로 사용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진부하다며 무시받을 일로 치부된다. 그러나, 익숙함이 개인적 경험과 뜨개질을 한다면 고유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 우리는 각자의 고유함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니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어린 왕자>나 <중경삼림>, 그리고 챗 베이커 음악이 매번 공통된 감상을 양산하는 게 아닌 이유는 개인적 경험의 비중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게 생긴 결과물은 특별한 '고유'로 재탄생될 여지가 충분하다는 뜻이다. 내가 만든 ‘상투적 고유함’은 매번 ‘낭만’과 연결되어서 덕분에 진부함을 특별하게 여길 수 있게 되었다.
가끔 내가 쌓아놓은 사사로운 낭만의 창을 두드린다. ‘일상이 이렇게도 가혹하다. 숨 쉴 구멍 하나만 줘.’ 미리 챙겨놓은 낭만을 꺼내면서 나는 유달리 행복했거나 진한 인상을 남겼던 시간들을 반추한다. 예컨대, 언니와 함께 본 <빌어먹을 세상 따위>에서 ‘사랑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은 사랑의 형체를 몰라서,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 착각한다’는 대사를 마음에 품었고,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볼 때는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를 따서 엄마와 건배를 했고, 최악을 상상하던 시기에 친구가 데려간 사울 레이터 전시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남길 바랐다는 작가의 말을 좋아했던 모든 추억들. 그러면 나는 미적지근하게라도 다음날을 준비할 수 있었다.
아직 탄생하지 않은 낭만을 기다린다. 진부함을 특별함으로 여기는 자세를 갖고 싶다. 위와 아래가 부재하고 옆과 곁만 자리를 지키는 그런 관계들이 더 많이 파생되었으면 한다. 그리고 극단적인 이상이 춤추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다. 지금까지 만난 낭만들은 온통 내가 갖고 싶고, 듣고 싶고, 보고 싶던 모습을 공통점으로 취했다. 더 많은 음악, 더 많은 사랑, 더 많은 영화와 더 많은 관계처럼, 더 많은 나만의 낭만이 땀처럼 자연스럽게 몸에서 흘렀으면 좋겠다.
죽음을 향해 돌진하다가 결국 이승으로 되돌아오는 것들이 있다. 예컨대 잔인한 사회가 싫어서 죽을 생각을 하다가도 저녁에 먹을 삼겹살을 생각하는 것, 저승에 머무르는 망자를 이승의 사람이 떠올리는 기억, 잊혀졌다 여겨졌음에도 다시 되돌아오는 유행 같은 것들. 생각보다 다양한 것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 우리의 낭만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믿고 싶다. 소박한 힘을 꾸준히 신뢰할 수 있는 환경이 미약하게나마 지속되길 바란다. 그러한 힘이 죽지 않고 영원으로 남는 세상을 기대한다. 그렇게 된다면, 사랑을 잃어버리지 않을 수도 있겠지.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를 하고 싶다. 나의 낭만은 이미 나열했다. 나는 불특정 다수가 간직하는 낭만이 궁금하다. 당신이 낭만을 속삭여준다면, 나는 그 속삭임을 통해 다른 낭만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면 꼭 말해주길. 그 속삭임에 꼭 응답하고 싶다.
당신의 낭만은 어떻게 지내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