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 첫 만남, 첫 여행, 첫 이별.
단어 앞에 ‘첫’ 혹은 ‘처음’이 붙으면 새롭고 특별해진다. 누구나 보편적이고 다양한 처음이 있다. 다루고 싶은 처음이 많은데, 이번에는 나의 ‘첫 극장 경험’에 대해 다뤄보고자 한다. 그 경험은 길고 두꺼운 옷을 입고선 무한한 추억을 생산하는데, 영화적 표현을 빌리자면 ’절찬리 상영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자동차를 타고 나가야 물건을 살 수 있을 만큼 외딴 시골에 살았던 나는 문화생활과 동 떨어진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그나마 했던 거라고는 집에서 책을 읽거나 막내이모가 녹화해 준 비디오테이프가 고장 날 때까지 보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는 나와 언니에게 재밌는 만화를 보러 극장에 가자고 제안했다.
극장. 내가 살던 지역은 그 당시에 극장이 없었다. 바로 옆에 붙은 가까운 도시로 가야 볼 수 있었던지라 그전까지 나는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가본 적이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좌석에 앉아서 대형 스크린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장소. 무언가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나와 언니는 집 밖으로 나간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엄마가 운전하는 차 안에서 동요를 불렀고, 가끔씩 흘러나오는 최신 가요를 듣기도 했다.
한적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도시의 풍경. 온갖 차들이 빵빵 거리고,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득실거리며 다양한 소리가 공간을 채웠던 그곳에서 나는 신기함과 초라함을 느꼈다. 원래 전혀 다른 세계에 도착하면 이리도 무섭고 나 자신을 검열하게 되는 것일까? 그런 생각이 차오를수록 엄마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리고 한껏 위축된 어깨와 두리번거리는 시선을 장착한 채, 나는 엄마와 함께 극장에 들어섰다.
영화 포스터, 팝콘 냄새, 팔짱 낀 사람들, 형광색의 오락실. 들뜸보다는 눈치보기 바빴지만 처음은 늘 그렇듯 소량의 설렘도 동반한다. 엄마는 영화표 세 장을 구매했고 그날 우리가 볼 영화는 지브리 스튜디오에서 제작한 <천공의 성 라퓨타>였다. 나는 난생처음으로 텔레비전보다 몇 배는 몸집이 큰 화면을 마주했고 곧장 다른 세계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인상을 받았다. 좌석에 앉자마자 아까 장착한 부정적인 감정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팝콘을 와작와작 씹고 콜라도 몇 모금 마시면서 광고가 끝나길 기다렸다. 이윽고 반짝이는 목걸이를 한 소녀가 공중에서 뛰어내리면서 영화의 초반부가 고개를 들었다. 거칠지만 유머러스한 싸움, 소년과 소녀의 용기, 그들을 도와주는 어른들, 환상 그 자체였던 라퓨타, 동물들과 공생하는 낡은 로봇. 언니와 나는 눈을 반짝였다. 엄마도 어린이로 돌아갔다. 막판에는 히사이시 조가 작곡한 <君をのせて(너를 태우고)>가 아련하게 울려 퍼졌고, 우리 셋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영화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그다음에 본 영화도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이었다. 그 유명하디 유명한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개봉했을 시기였다. 이번에도 엄마와 우리 자매는 신나는 마음을 꼭 쥐고 극장으로 향했다.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엄마의 인생 영화로 자리매김했다. 그래서 아직도 하울 이야기만 나오면 엄마는 입에 모터를 달고 주절주절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대개 미남인 하울의 외모 이야기가 주를 이루는데, 어찌나 묘사를 잘하는지 하울을 모르는 6살 조카가 들어도 단박에 알 수 있을 것이다. 참, 왕자님 같은 얼굴을 사랑하는 사람이다.(나도 그 취향을 물려 받았다)
워낙 애니메이션을 좋아해서 다른 작품도 보고 싶어 했는데 엄마는 어떻게 보는지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지브리 스튜디오 작품을 전부 다 찾아서 구매했다. 영화는 자고로 큰 화면으로 봐야 한다는 주의라, 작은 노트북과 텔레비전을 연결했다. 이때 재밌었던 게, HDMI 연결선이 필요했는데 이걸 구매하러 엄마와 언니가 야밤에 차를 타고 나가기도 했다. 우당탕탕거리며 결국 우리는 2박 3일 동안 거실에서 지브리 작품을 전부 다 감상했다. <원령공주>의 ‘아시타카’를 보고 잠시 흔들렸지만, 엄마의 픽은 여전히 하울이라는 사실도 재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때 <귀를 기울이며>를 보았는데, 도입부가 참 인상적이었다. 평화롭고도 붐비는 저녁 시간대의 일본 도시 거리. 그 장면을 보고 반드시 일본에서 살아보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이때까지만 해도 진짜 갈 줄은 몰랐다) 덧붙여서 첫 소설을 집필하는 주인공의 모습이 와닿기도 했다. 쓰고 싶은 게 생겨서 글을 쓴다는 시즈쿠의 외침. 내뱉기에는 간단한 말이지만, 실행에 옮기기까지 단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그녀의 굳센 용기와 늦은 시간까지 소설 집필에 몰두하는 인내심이 새삼 부러웠다. 사랑하는 일을 한다는 건 없던 마음도 불러일으키는 걸까?
무엇이 되었든 간에 직접 손으로 그린 그림들이 발랄하게 움직이면서 눈물 나는 서사를 만들어 나가는 모습을 통해, 엄마는 환상을, 나는 꿈을 만나게 되었다. 현실과 조금은 동 떨어져 지낼 나날도 필요한 법이다. 언제나 그랬다. 잘 지내보려고 마음먹는 순간, 현실의 잔인함에 고꾸라지고 마는 사건들. 그러니 스스로 일어날 힘이 없다면 외부적인 도움을 받아야 한다. 아기자기하고 사랑스럽고 눈부시고 환상적인 영화 같은 것들로 말이다.
아직도 엄마와 우리 자매는 지브리 스튜디오에 빠져 산다. 본가에 내려가는 날이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이웃집 토토로>를 틀어놓고 셀 수도 없이 많이 본 그 영화를 다시 본다. 엄마는 역으로 우리를 데려오기 전, 넷플릭스로 무조건 지브리 영화를 틀어 놓고, 집에 온 우리는 익숙한 장면을 처음 본 사람들처럼 기뻐하곤 한다. 아마 내가 엄마와 흰머리를 공유하는 나이가 될 때까지 이 행위를 계속 반복할 것만 같다.
어둠이 눕는 시간이 다가오면 캔맥주를 따서 한 모금 마시고 끌리는 지브리 작품을 고른다. 이미 장면과 대사까지 외웠지만 우리는 일부러 그때의 황홀함을 찾기 위해 재생 버튼을 누르는 것. 인생의 회전목마에 올라타고는 현실 도피를 감행한다. 도망친다고 해서 겁쟁이가 아니다. 때로는 도망칠 줄도 알아야 한다. 우리의 대피처는 애니메이션이다. 그곳에서 마음을 잘 추스르고 다시 나아가면 된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신작이 일본에서 개봉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얼마 전, 삿포로에 갔을 때 엄마와 길을 걷다가 신작 영화 포스터를 보고 얼마나 신나 했는지 모른다. 가을쯤이면 한국에서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 극장을 찾았던 날처럼 우리 셋은 서로의 손을 꼭 붙잡고 고소하고도 달콤한 팝콘 냄새를 맡으며, 환상 속으로 들어갈 테다.
미리 상상해보건대, 엄마는 추억 상자에 새로운 물건을 넣는 아이처럼 싱그러운 미소를 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