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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낭만 Jul 25. 2023

꽃을 든 영웅과 자퇴 파티




가장 쉽고 가볍고 잔인하게 사람을 토막 낼 수 있는 방법은 못된 입을 놀리고 애매한 시선으로 응시하는 것이다. 여기서 얻어낸 상처를 회복하기란 사람마다 다르지만, 공통점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제아무리 달콤하고 다정한 것들이 내 주변에서 강강술래를 춘다고 해도 당장 낫기란 무리다.


뭐든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던가. 지옥에서 매번 웃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스스로에게도 웃어줄 수 없으니 타인에게도 다정하기란 환상 같은 것으로 치부된다. 그런데, 생은 참으로 웃기고 예상 밖의 일들이 벌어지는 공간이라 불가능을 가능하도록 만드는 사람들이 꼭 나타나곤 한다.


최근 단약을 했다. 약 5년 동안 징그럽게 먹었던 약을 끊었고, 한 달에 한 번씩 방문했던 병원을 향한 발길도 끊었다. 청춘이라 일컫는 시절의 절반 가까이를 질병과 동거한 셈이다. 적과의 동침과도 같은 이 끔찍한 동거에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연인들의 따뜻한 헌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들과 했던 여러 경험 중 독특한 ‘파티’에 대해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아프고나서부터 나는 연인들과 조촐한 파티를 자주 즐겼다. 파티라 하면, 하이틴 영화에서처럼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모습이 그려지겠지만, 내 경우는 조금 다르다. 그들은 일부러 나를 위해 우리 집에 찾아와서 조그마한 파티를 열었는데 이유가 제각각이다. 어느 날은 대학원 자퇴를 축하하기 위해서, 어느 날은 현실도피가 필요해 아이돌 직캠을 함께 보기 위해서, 어느 날은 선물로 받은 와인을 마시기 위해서 등 생각보다 쓸데없다고 생각할 만한 이유들로 파티를 열었다.


자퇴 파티를 한 날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세상에, 자퇴를 축하하기 위해 파티를 여는 사람들이 또 있을까? 실은 보편적인 ‘축하할 일’도 아닐뿐더러, 자퇴라 하면 무언가를 포기했다는 인상이 있어서 울적함만 떠오르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친구들과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마음껏 웃으면서 조촐한 파티를 한 경험이 있다. 이건 MZ세대들 식의 위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시 그 당시로 돌아가자면, 나는 자퇴를 결심한 뒤부터 수업에 일절 참여하지 않았다. 그럴 몸 상태, 정신 상태가 아니었고, 내 마음은 맨 처음 연구를 하겠다는 이십 대 중반의 열정 따위는 이미 소멸된 상태였다. 4월의 싱그러운 어느 날, 과 사무실에 자퇴 원서를 제출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스스로를 극한으로 내모는 성격 탓에 그동안 꿈을 꾸며 일궈놓은 밭농사를 망친 느낌이었다.


‘나 자퇴했어.’ 나의 짧은 문장을 받은 오래된 연인들은 ‘축하해’ 또는 ‘고생했어’라는 답변을 남겼다. 감히 상대방의 처지를 진단하지 않는 그들의 매너 덕에 나는 아주 조금 기운을 차렸지만 미소 지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가장 울적해지기 쉬운 저녁 시간, 언니와 친구 혜지가 와인 한 병과 꽃다발을 들고 현관으로 들어섰다. 그들은 요란스러운 제스처를 동반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자퇴 축하해, 오늘 파티하자!”


그들은 늦은 시간까지 바쁘게 일을 하고 돌아온 길이었다. 자퇴서를 제출하고 혼자서 궁상떨고 있을 나를 위해, 그들은 어여쁜 꽃과 내 취향인 달달한 와인을 일부러 가져온 것이다. 거의 울 듯한 얼굴로 하루를 보냈던 나는 그 말을 듣자 나사 빠진 사람처럼 깔깔거렸다. 그래, 60억 지구에서 나만 자퇴한 것도 아니고. 그들의 등장과 환호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이런 마법을 부릴 줄 알다니. 참으로 멋진 재능을 가졌다.


우리는 동그란 테이블에 앉아서 배달음식과 와인을 먹고 마시며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 한때 탑처럼 쌓인 책과 프린트물로 가득했던 테이블에는 기름진 음식과 향긋한 와인, 보기만 해도 마음이 말랑해지는 꽃다발이 놓여 있었다.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 건가. 그런 건 중요치 않았다. 그들은 일부러라도 미래를 가늠하는 문장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저 현재의 내가 치료를 잘 받고 푹 쉬기를 바랐다. 그리고 그간 뜨개질 해놓은 나의 일상을 토닥토닥해주었다. 약을 먹어도 쉽사리 잠들지 않은 밤들의 연속이었는데, 그날 밤은 두 다리 쭉 뻗고 아주 잘 잤다.


한번 빠진 우울은 습자지 위에 떨어진 물감처럼 급속도로 퍼진다. 내 몸이 검정색으로 물드는 건 순식간이고, 나는 그 우울에 잠식돼서 밖으로 나가기까지 꽤나 긴 시간이 걸리고 만다. 대개 '우울의 동굴'로 들어간다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다행히 회복 탄력성이 전보다 좋아진 편이라 예전처럼 병원에 실려갈 정도로 굴을 열심히 파지는 않지만, '실패'와 '포기'는 근 몇 년 나에게 가장 잔인한 키워드였다. 그럼에도 이승과 작별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기피하는 키워드를 누군가는 소위 '웃픈 에피소드'로 바꿔주기 때문이다. 자퇴 파티는 이러한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지점이 되었다. 


현실의 슈퍼 히어로는 영화나 만화에서처럼 하늘을 날지도, 멋진 유니폼을 입지도, 재난 속에서 시민을 구하지도 않는다. 단지, 꽃다발과 와인병을 들고 나타나서 해사하게 웃을 뿐이다. 꽃은 꽃집에서, 와인은 상점에서 쉽게 구할 수 있다. 웃음은 억지로 입꼬리만 늘려도 지을 수 있다. 하지만 이걸 동시에, 그것도 진심을 오픈하면서까지 다가오는 이들은 현저히 적다. 친구들은 그걸 해내는 슈퍼 히어로다. 진짜 현실에서 필요한 영웅은 이러한 유형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벌써 우리들의 자퇴 파티는 몇 년 전의 에피소드가 되었다. 숨 가쁘게 흘러가는 시간만큼 나의 질병도 ‘완치’라는 스티커를 붙일 수 있게 되었다. 단약 소식을 들은 언니와 혜지는 “이번에는 단약 파티하자!“며 소리를 질렀다. 예상하건대, 단약 파티를 하는 날에도 달콤한 와인과 동글동글한 꽃이 있을 것만 같다. 또다시 우리는 지랄 맞고 요란법석 떠는 성격을 그대로 표출하면서 춤을 추고 서로를 끌어안겠지. 상상만 해도 설렌다. 단약 파티가 끝나면, 그 추억을 글로도 남겨야겠다. 꽃을 든 영웅들과의 파티라. 내가 회복하지 않고는 못 배길 만큼 기분 좋은 풍경이 아닐까.



아, 이번 파티에서는 소주랑 토닉워터도 섞어 마셔야지. 우리 모두가 좋아하니까. 그리고 그 향긋함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한 컵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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