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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낭만 Aug 24. 2023

민중가요와 세상에 지지 않는 마음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부딪쳐오는 거센 억압에도, 우리는 반드시 모이었다 마주 보았다.


민중가요 '동지'의 한 구절이다. 아마 이제는 이 곡을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곡은 20세기 운동권, 즉 투쟁가들이 한 자리에 모여 뜻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모아서 불렀던 노래이기 때문이다. 운동권이라. 세대는 다르지만 목표는 비슷해서 예전에 나도 친구들과 시위를 나갔었고 세미나를 열어서 함께 공부했던 적이 있으니 '운동권'이라 부를 수 있겠다.


핏줄은 어디 안 간다던가,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이 있지 않나. 나는 전직 노조위원장이었던 엄마와 학생 운동, 노동 운동, 농민 운동을 했던 아빠의 딸로 자랐다.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고 당장 나서야만 하는 기질, 말싸움으로 지는 건 누구보다 싫어해서 한 마디로 더 얹어야 하는 고집, 생각의 결이 비슷한 사람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가치관은 부모님이 물려주신 게 분명하다.


특히 엄마는 기억력이 어마무시하게 좋은 편이다. 예전에 불렀던 민중가요를 우리 앞에서 자주 부르곤 했는데, 그 여파가 나와 언니에게로 이행되면서 우리도 민중가요를 부르는 아이들이 되었다. 주로 학교 끝나서 먼 거리에 위치한 학원까지 가는 길에서 우리만의 '전국 노래 자랑'이 시작되었다.(아, 언니와 나는 노래 말고도 둘이서 역할극을 했다. 지금 하라고 하면 절대 못할 것이다)


나와 언니는 시골의 작은 분교에서 초등학교 시절을 보냈는데, 엄마는 그런 우리가 작은 웅덩이에 고여있지 않길 바라서인지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학원을 보냈다. 엄마는 운전기사를 자처하며 데리러 오고 데리러 가는 귀찮고 지난한 과정을 몇 년이나 반복했다. 어린 마음에 겹치는 학교도 없고 멀고 재미없는 공부를 하러 가는 학원이 끔찍하게 싫었는데, 그나마 다닐 수 있었던 이유는 엄마가 만들어준 추억의 공이 크다.


나는 엄마가 부르는 민중가요와 지금껏 그녀가 전기처럼 읊어준 지난날과 버무려서 조금이나마 그녀의 청춘을 가늠했다. 엄마는 충청도에 위치한 제약 회사에 근무하다가 노조가 생기자, 곧바로 노조위원장이 되었다. 절대 기죽지 않는 성격과 매서운 눈빛이 엄마를 탄탄하게 만들었고, 결혼 전까지 위원장으로서의 일을 굳건히 수행했다.


하지만 엄마가 결혼을 하고 우리를 임신하자, 그 당시 여성들이 밟은 수순처럼 엄마도 직장을 그만두었다. 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에 달궈진 강철같이 단단하고 뜨거워서 임신한 상태로 시위 현장을 찾기도 했다. 엄마가 위원장 직에서 내려오자, 회사에서는 노조에 가입한 사람들을 해고시켰다고 한다. 참을 수 없는 분노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는 개탄스러움은 엄마의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떨리게 했다. 그 스트레스가 자신의 뱃속에서 수영하는 나와 언니에게도 닿은 것인지, 당시 엄마는 배에서 뻐근함을 느꼈다고 한다. 엄마는 나지막이 “쌍둥아, 미안해”라며 속삭였다.


노조위원장이었던 엄마의 돌봄으로 자란 나는 그녀처럼 불의를 보면 절대 참지 못하는 사람으로 성장했다. 상식 밖의 사건들이 일파만파로 퍼진 세상에서 나는 연대할 사람들과 손을 보태서 나아갔다. 그럼에도 세상은 일말의 변화도 없었고, 자주 절망에 빠지기 일쑤였다. 엄마는 한때 사회의 맹점으로 정면돌파했던 사람으로서 그런 나를 대견스럽게 여기다가도, 지나친 스트레스로 울먹이면 ‘마음 편하게 먹고 적당히 하라’며 다독였지만, 나는 불가항력처럼 그 ‘편한’과 ’적당히‘를 몸에 저장할 수 없었다. 내가 편한 마음을 먹으면 다른 사람들이 저승사자에게 잡혀갈 것만 같아서였다.


수많은 민중가요의 멜로디와 가사를 외우고, 아직도 그 노래를 부르는 엄마에게서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나’가 투명하게 보였다가 불투명하게 지워지곤 한다. 나는 엄마를 통해서 나를 보다가도 보지 못하거나, 미래의 나를 잠시 그려나갔다가 멈춘다. 왜냐하면 나는 엄마만큼 투지를 불태우지 않기 때문이다. 착잡하고 울분이 가득한 마음을 표출하다가도 종국에는 용기가 부족해서 망설이는 경우가 잦다. 적어도 나의 기준에서 내가 하는 행위들은 소극적이다.


나는 평화주의자다. 적당히가 아니라 대부분 친절하고 유쾌하고 뭉쳐 사는 사람 관계를, 절박하게 소원한다. 내가 몸 담은 사회는 이상과는 판이하게 다르기에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면돌파를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가 필요하다. 무언가를 새로 조립하거나 건설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천장을 산산조각내야 한다. 이 정도 했으면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 하나 정도는 부순 것 같은데, 여전히 고리타분한 기존 체제는 번쩍거리며 나를 비웃었다. 나름의 ‘애매하고 소극적인 최선’은 씨알도 먹히지 않은 셈이다. 무언가를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대견하다는데 결과는 늘 이딴 식이었다. 이런 세상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챙길 수 있을까?’라는 의문만 커져갔다.


엄마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몸으로 변화를 촉구했지만, 본인이 바란 세상과 지금 서 있는 곳은 완벽하게 달랐다. 하지만 적어도 엄마는 세상의 쓰레기들이 태워지지 않았다고 해서 과거의 노력이 무산되었다는 식의 자기 연민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나간 시대와 청춘을 떠올리면서도 자신이 오늘, 당장, 그리고 앞으로 할 일에 집중한다. 그 일들이라 함은, 사랑하는 딸들에게 매일 응원과 위로의 메시지를 보내는 행위, 핸드폰으로 옷을 구경하는 아이쇼핑, 빠른 시일 내에 가고 싶은 후쿠오카 여행 계획 세우기, 또는 언제 갈지 모르지만 미리 저축하고 있는 스위스 여행 자금이 해당된다.


열렬히 사랑했던 과거의 노래를 잊지 않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지지 않았음을, 엄마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최선을 다한 본인을 자랑스럽게 여기되, 악착같이 들이대도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음을 인정하는 태도는 지금 자기 옆에 놓인 가치를 더욱 아껴줄 수 있도록 에너지를 부여한다. 그래서 현재 엄마의 에너지는 오랫동안 좋아한 지브리 스튜디오의 작품과 사랑하는 쌍둥이, 살얼음이 낀 시원한 맥주에 담겨있다. 이들만 있다면 살아갈 가치는 충분하다고, 그리고 나름 유쾌하게 살아갈 수 있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젊은 시절 불렀던 민중가요를 마음껏 다시 부를 수 있는 이유도 그러하다. 너무나도 좋아했지만 나를 아프게 만든 것들 중 절대 회상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래서 나는 글로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가 가진 삶의 태도 덕에, 나는 과거를 직면할 수 있게 되었다. 부끄럽고 촌스럽긴 해도 지나간 것은 이미 지나간 것. 그 상처를 응시하면서 동시에 웃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엄마로부터 배웠다.


언젠가 인기 드라마 <응답하라 1988>가 방영할 때, 극 중 서울대에 다니는 '성보라'가 <동지>를 부르는 모습을 보면서 엄마는 박장대소하며 반가워했다. 당시에는 단순히 익숙한 장면을 만나서 그러려니 싶었는데,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니 80년대에 받았던 상처나 아픔을 깔끔하게 인정하기에 가능했던 제스처였던 것임을 깨달았다.


얼마 전에도 나는 스스로 엄청난 문장을 창조했다는 오해에 잠식되었다가 이건 누군가의 말을 빌렸다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고는 자괴감에 빠졌었다. 그럼에도 묵묵히 글을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은 기존의 문장을 읽고 쓰고 배우지 않았다면, 빌린 문장조차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란 사실이었다. 나의 편협함을 인정했다. 나는 세상을 바꿀 인재는 아니지만 적어도 무엇이 중요하고 소중한지 확실한 기준이 있으며, 거센 사회에서도 놓지 않을 가치를 지킬 것이란 믿음이 있다.


사람을 좋아해서, 누구보다 좋아해서 다 같이 잘 살고 싶다는 마음은 이기심에 기인한다. 그러니 휘몰아치는 거센 바람에도 마주 보고자, 그 바람 속에 일부러 침입하는 것일 테다. 대신 나의 시도가 생각과는 다르게 흘러가도 마냥 슬픔과 회의감을 느끼진 않을 것이다. 물론 당장은 ‘이 개 같은 세상!’하며 한탄스러워하겠지만, 그다음에는 천천히 내 마음을 돌보기로 결심하겠다. 적어도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연인들이, 사람들이, 영화와 책 그리고 음악이 있다는 것에 안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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