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현재 하는 일이 비전공자이기에 부족함이 많다는 친구와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오랫동안 하던 공부를 그만두고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문학을 사랑하는 친구와 나는 둘 다 국어국문학과를 전공했고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자 했다. 밥 벌어먹고 살기 힘들다는 소리를 따갑도록 들었지만 우리는 꾸준히 책을 읽고 글을 썼다. 졸업 후 친구는 신문 기자가 되었고 나는 전공을 이어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리고 약 2년 뒤, 우리는 거의 동시에 하던 일을 관뒀다.
친구의 직장은 인간 대우를 해주지 않았다. 자주 월급을 밀려서 주거나 심한 말을 일삼던 악덕 회사였다. 때문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고 마음이 난도질 당해 너덜너덜해졌다. 한편 나는 공부를 하면서 강박증과 우울증에 시달렸고, 억지로 약을 먹으며 버티다가 공황 발작까지 생겨 응급실에 연속으로 실려갔다. 우리는 각자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대학원을 자퇴했고 친구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다. 둘 다 살기 위한 선택을 한 셈이다.
나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소수의 사람들과 연락을 나눴고 친구는 휴식을 취하다가 취업준비를 다시 시작했다. 뱉어도 줄지 않는 한숨만 쉬는 나날이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와 친구 모두 또 다른 앞날의 시작점에 무사히 도착했다. 우리는 술 한 잔을 걸치면서 지난날을 회상했다. 꿈만 같지는 않겠지만 안정권에 들어섰다는 기쁨이 주위를 맴돌았다.
평소 친구는 클래식에 관심이 많았고 그만큼 지식이 풍부했다. 이후 그는 클래식 잡지사에 취직해서 편집부 기자로 일을 시작했다. 나는 자격증을 취득한 뒤 정식 바리스타의 삶을 시작했고 시간이 남으면 글을 썼다. 되도록 완만한 일상이 되기를 바랐고 어느 순간까지는 그렇게 흘러갔다.
그러나 고민은 끊이질 않았다. 어느 날, 친구는 비전공자라서 남들보다 상대적으로 부족한 점이 슬프다고 토로했다. 직장에서는 석사 학위를 가진 고학력자 또는 작곡과 같이 음악을 전공한 사람들이 대개였다. 그중 유일하게 국문학을 전공한 친구는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대학 시절부터 학보사에서 기자 생활을 하면서 어엿하게 신문사까지 들어간 친구에게 취재와 원고 작성은 매우 익숙했다. 하지만 음악을 다룬다는 점에 있어서는 상대적으로 낯섦과 부족함이 크게 다가왔던 것이다. 친구는 지식의 양이 증가하길 바랐고 매번 공연을 보고 수첩에 그날 느꼈던 감상을 적었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대학원에 진학해서 심도 깊은 공부까지 하려고 했다. 그의 속내를 듣자 비슷한 생각이 떠올랐고 나도 고민을 털어놓았다.
석사 수료 두 달을 남기고 학업을 그만둔 나는 읽고 쓰는 일 외에 다른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다가 우연히, 매우 좋은 기회로 새로운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것이 바리스타였다. 자격증을 따는 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서비스업이 처음이었던 지라 입 밖으로 내뱉는 말을 전부 수정해야만 했다. 게다가 나의 화법은 거칠고 투박한 편인데 이와 전혀 다른 화법을 구사해야 한다는 점이 생경하기만 했다. 또한 세팅값을 맞춰서 그날 커피의 맛을 결정하는 일도 아리송했다. 커피머신에 문제가 생기면 뚝딱 해결하는 여유도, 새로운 메뉴를 만들어내는 참신함도, 컴플레인에 능수능란하게 해결하는 유연함도 부재했다. 나는 처음부터 다시 배워야만 했고 이러한 부족함 때문에 잔잔하게 스트레스를 받았다.
누구나 그렇듯 우리도 불안을 밥처럼 먹는 사람들이었다. 불완전하다는 생각에 무언가를 억지로 채우려고 해도 포만감이 들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만난 친구와 나는 어서 이 불안이 사라지길 간절히 바랐다. 그렇게 나눠마신 술이, 주고받은 대화가 누적되었다. 빨리 ‘진정한 어른’이 되고 싶었다. 마침내 어른의 궤도에 들어섰지만 불안은 잠식되지 않았다. 왜 우리는 매번 부족하고 어려울까. 자기 연민이 늘어만 갔고 그럴 때마다 서로를 다독였다.
다독임의 방법 중 하나는 글쓰기에 대해 각자의 생각을 자유롭게 열거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공통점은 '쓰기'였다. 친구와 나는 서로가 읽은 책을 추천해 줬고 언제나 글쓰기에 대해 고민했다. 이 행위가 우리에게는 해방구나 다름없었다. 친구에게 글은 ‘치울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치우고 싶은 잔’이었고, 나에게는 ‘고통과 사랑을 번갈아가며 줬던 오래된 연인’이었다. 뭐가 되었건 공통적으로 꾸준히 해온 글쓰기가 있기에, 이 어려움과 지루함을 공유하는 서로가 있기에, 나와 친구는 덜 외로울 수 있었다.
이 공간에서 내가 쓴 글을 발행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은 날, 친구는 본인의 일처럼 기뻐했다. 꽃다발과 편지를 가져온 친구는 나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이건 쓰는 일을 꾸준히 한 사람의 연대다. 나는 눈을 꼭 감고 그 품을 온전히 받아먹었다. 친구는 글을 쓸 때 느꼈던 고민을 나누는 친구가 나여서, 그리고 이런 내가 작가가 되었다는 게 기쁘다고 편지에 썼다. 그 문장을 읽으며 얇은 눈물 줄기를 흘렸다.
우리는 중간에 좌절했어도 그건 패배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한 우물만 파지 않고 여러 우물을 파 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시야가 있다고 한다. 나와 친구는 이미 두 번째 우물을 팠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눈과 쉽게 겪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 생긴 셈이다. 진득하게 일을 끝내지 못한다는 비난을 들어도 괜찮다. 인생은 한 가지 방법만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결이 비슷한 고민을 나눈 뒤, 문득 나는 그에게 소박한 행복을 전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무작정 친구의 회사로 프리지아를 보냈다. 당신이 얼마나 화사하고 소중한 사람인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꼭 말해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외근을 나갔다가 돌아온 친구는 노란색의 프리지아 꽃다발을 보자마자 함박웃음을 지었고 그날 회사에서 친구는 주인공이 되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친구의 목소리는 들떠있었다. 그 목소리를 듣자 따뜻한 물이 몸속으로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또 다른 일을 시작한 친구가 좋다. 사실 무언가가 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친구를 사랑한다. 그가 하는 모든 일에 조건 없는 응원을 보낸다. 치열한 위로와 탁월한 센스를 쉼없이 반복할 줄 아는 친구의 다른 우물도 환영한다. 그것이 비록 또 다른 고민을 야기할지라도 최종적으로는 웃으며 넘길 수 있을 것이다.
불안을 잘근잘근 씹어 먹으며 살아보자. 무한한 안정이 없는 것처럼 무한한 불안도 없다. 혼자일 때가 많지만 계속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뭉치고 흩어지고 다시 뭉치며 뜨거운 마음을 주고받았으면 좋겠다.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지난한 과정이 마냥 지난하지만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