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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낭만 Jul 05. 2023

소설책과 탈주하는 여인



“지구상 사람들의 65퍼센트가 환생을 믿는단다. 누가 그러는데, 살아생전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는구나. 그러니까, 지금의 얼굴은 전생에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인 거야.“

”피... 거짓말. 아무도 사랑하지 않으면요?“

”그러면 다시 안 태어나지...“

 - 전경린,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


싸이월드 미니홈피가 성행할 때는 다이어리에 감성 가득한 문장을 걸어 놓는 것이 유행했었다. 그 시대에서 유행하던 건 무조건 했던 쌍둥이 언니도, 나도 읽은 적 없는 책의 구절을 무작정 달아놓았다. 그때 내가 언니의 미니홈피에서 접한 구절이 바로 위에 있다. 참으로 이상도 하지. 나는 저 몇 마디로 구성된 구절을 보고 전경린의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을 구매해서 읽게 되었다.


스무 살 ‘우수련’은 흥미 없는 일상, 답답한 집안 풍경, 우연히 접한 연극, 마음을 사로잡은 유부남, 처음으로 아찔함을 선사한 또래 남성 등으로 자신의 1년을 지난다. 어쩐지 그녀는 맨 얼굴에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러면서도 어디론가 가고 싶어 한다. 종착지는 정해지지 않았다. 이 지긋지긋함을 떨치기 위해, 우수련은 작은 몸짓을 시작한다.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들었던 느낌은 ‘짜릿함’이었다. 명명할 수 없는 감정, 쉽지 않은 친구 관계, 왜 배우는지 알 수 없는 공부 등 나의 일상도 우수련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는 소설에서 우수련이 벌이는 이탈적 행위가 참 좋았다. 일종의 대리만족이라고 할까. 애써 강렬한 연애감정을 참고, 순수하고 바보 같은 웃음을 짓던 십 대 초반의 나는 ‘천사’같은 여자를 벗어난 우수련처럼 반항하고 싶었다. 그 반항의 모양새가 밋밋할지라도 말이다. 아마 그 순간이 앞으로 내가 장착할 사유들의 물꼬였을 것이다.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졸업을 앞둔 시기에 나는 이 책을 또다시 읽었다. 우연이었다. 약 2-3년의 텀을 두고 이 작품을 마주하는 건 의지가 아니었다. 커가면서 작가 전경린의 다른 소설을 읽으면서도 느낀 것이지만, ‘축축한 장미꽃을 입에 씹는 느낌’이 온 문장에 배어있다. 이러한 연유로 나는 그녀의 책을 떠올려도 막상 독서를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아프지 않지만 거슬리게 찌르는 감각이, 항상 전경린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데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은 그 감각이 유독 강했다.


마치 생택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읽는 것마냥, 나는 일정 나이가 되면 이 책을 찾았다. 마음에 닿는 문장이나 구절이 달라졌고, 우수련이 만난 동료들, 남자들을 대하는 개인적인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 이를 테면, 연극을 준비하면서 나이 많은 남자와 관계를 맺고선 사라져 버린 ‘마리’가 그렇다. 십 대의 나는 마리를 절대 이해할 수도,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건 상식 밖의 행동이었고 나라면 절대 비슷한 일을 만들지도 않을 것이란 확신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하도 여러 사람과 살을 부대꼈다가 뜯어버렸다가를 반복해서 그런지, 마리의 선택을 일정 부분 존중하게 되었다. 짧게 말하자면, 그녀는 ‘이해받지 못할 사랑’을 영원으로 가져가고 싶다는 욕망을 최우선으로 둔 셈이다. 그 사랑이 없으면 껍데기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도 동반한 채. 내가 이해하는 마리는 여기까지다. 사실 아직도 그녀를 유쾌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걸 보니, 나는 쭉 마리를 탐탁지 않게 여기겠다. 덧붙여서 불행한 유부남 ‘해경’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처음 만난 해경은 은밀한 매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내 눈에는 그저 ‘겁 많은 회피형 인간’으로 변질되었다. 아무튼 이런 작은 변화가 긴 시간,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눈에 띄었다. 오직 우수련의 무수한 감정에 공감하는 것만이 변치 않았다. 이 점은 여전히 의문이자 흥미 유발 포인트다.


<검은 설탕이 녹는 동안>을 관통하는 문장은 “스무 살을 삶으로 끌고 가지는 마라”이다. 작가가 집필하면서 염두에 둔 문장이라고 한다. 재밌게도 저 문장과는 아예 반대로 서사가 요동친다. 스무 살 수련은 상처로 그득그득한 시절을, 나이가 들어서도 간직하고 있다. 환멸나는 가정, 내 것 같지 않은 진심, 징그럽도록 매끈해 보이지만, 실은 자잘한 균열로 점철된 세상. 이들은 풀지 못한 숙제처럼 잔존해 있다. 즉, 우수련의 ’스무 살‘은 단순히 나이를 의미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살기 위한 탈주가 시작되는 지점, 즉 욕망을 말하고 있기도 한 셈이다. 이 욕망은 세상 돌아가는 법을 알게 된 중년 언저리에서도 남아서, 문득 고개를 들곤 한다. 인상적인 부분은 그녀가 과거의 행동에 후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점이 바로 내가 우수련을 오랜 시간 소중히 여긴 인물로 간직한 이유가 된다.


한때 나는 타인과 지나칠 정도로 다툼이 잦았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내 말이, 내가 추구하는 바가 정답에 가까운데 사회는 자꾸 역행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회가 지금도 싫지만, 그때는 너무나도 혐오스러웠다. 할퀴기를 좋아하는 사회의 그 엿같은 성정 때문에, 나의 반항심은 최고점을 찍고 말았다. 그때 나는 기존 체제가 싫어할 만한 행동을 골라서 했는데, (물론 나의 반항은 전부 내가 추구하던 바에 기인한다) 그래서인지 이해받지 못하는 ‘나쁜 년’이 되기도 했다. 자꾸만 탈주하고 싶은 욕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고, 나를 건드리면 천 배로 갚아줄 것이라며 칼을 갈았다.


대변인으로 점찍어 놓은 것처럼, 혼란스러운 어린 시절을 지나 과도기에 다다랐을 때, 나는 우수련에게 많이 의지했다. 어느 날은 펑펑 울면서 소설책을 집어든 적도 있었고, 또 어느 날은 악에 받쳐서 문장을 빠른 속도로 읽어 내려가기도 했다. 왠지 먼저 이탈해 본 적 있는 우수련만큼은 나를 잘 이해해 줄 것 같았다. 그 예상은 정확히 맞았다. 그리고 현재, 나는 과거를 반추하는 우수련처럼 예전 일을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그때의 일탈이 없었다면, 생각의 폭이 지금보다 현저히 줄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아물지 못한 상처가 다수 존재하는 시기였어도 말이다.


사람들은 저마다 끌어안고 사는 상처가 하나씩 존재한다. 뼛가루가 되기 전까지 지워지지 않을 상흔과 완전히 떨칠 수 없는 불안함이 족쇄처럼 채워져 있다. 적어도 나는 꽃밭으로 가득한 머리보다 피딱지가 여러 군데 퍼진 사유가 더 가치 있다고 믿는다. 내면에 문신처럼 새겨진 지난날의 흔들림이 부재한다면, 죽은 몸과 다름없다.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시도’, 우수련의 일탈과 나의 개싸움으로 일궈낸 각자의 상처는 스스로가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뭐라도 한 게 어디야’라는 말과 상통하는 셈이라고 할까.


이 글을 쓰기 전 내가 세운 문장은 딱 하나였다. ’나를 살리기 위한 탈주가 화살처럼 돌아올지라도.‘ 모두가 상처를 딛고 일어서는 건 아니지만, 한 번씩은 흉터 정도로 남은 상처는 가지고 있는 법이다. 삶은 모순덩어리다. 내 발로 걸어온 자취가 늘 아름답지 않더라도, 자신의 생명력을 느낀 순간이 을씨년스럽더라도 어차피 살아야 한다. 캄캄한 저승보다 이미 겪은 이승이 낫다. 나는 제발 사람들이 살았으면 좋겠다. 내 자신을 살리기 위한 방법이 잘못된 행동이라며 핀잔을 받아도, 그냥 자신의 목숨줄을 잡았으면 하고 바란다. 그리고 생각보다 그리 나쁜 행동도 아닐 것이라고, 짧은 위로의 말을 전한다.


나를 옭아매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길, 오늘도 간절히 기도한다. 나에게 또 다른 탈주가, 상처가 기다리고 있다. 제 발로 찾아갈 때까지 기다려주길 바란다. 이번에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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