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낭만 Aug 27. 2023

불투명한 사랑을 상상하며



뒤척이는 밤, 잠 못 이루는 밤, 잡념만 가득한 밤.


사랑 서사에서 ‘밤’은 빼놓을 수 없는 단어로 등장한다. 이때 밤을 수식하는 말들은 수면을 방해한다. 푹 자고 개운한 아침을 맞이해야 하지만, 절대 그럴 수 없는 감정의 진폭이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사랑은 왜 필수적인 단잠과 대척점에 있는 걸까. 그리고 그 속성은 왜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걸까. 야밤에 갑자기 사랑에 대한 고민에 빠져버렸다.


나는 내가 관통해 온 시대를 대표하는 노래들을 꾸준히 듣는다. 우스갯소리로 ‘누구 하나 죽어야 한다’는 극단적인 댓글이 말해주듯, 가사에서는 만나고 싶어도 절대 볼 수 없고, 한번 건너면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수백 번 건너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화자는 매번 울부짖고 가슴을 찢고 땅바닥에 주저앉아 처량한 비를 맞곤 한다. 심각하게 들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꽤나 엄청난 사랑을 했나 보군’하며 넘긴다.


일명 ‘보편적인 감정’이라 일컬어지는 사랑, 그와 관련된 개인적 연애 서사는 나에게 별로 없는 편이다. 대개 설렘과 불안을 동반하는 사랑에서 나는 항상 저울질을 했다. 영화 <라라랜드>에서 이미 말했지만, 사랑과 무게를 같이 하는 존재는 꿈과 연결된 문제다. 그리고 매번 일, 성공, 커리어가 승리의 깃발을 차지했다. 내 인생에서 연애 감정이 제 일을 해낸 적은 거의 없다.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너는 왜 연애 안 해?”, “너는 언제 연애할래?”, “누구 좀 만나” 등 오랜 공백을 둔 나의 연애 칸과 관련된 질문들이다. 듣는 것만큼 여기에 쓰는 것도 지치고 짜증 난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연애는 필수가 아니라 선택이며, 내가 하고 싶다고 해서 완성된 연애 라이프가 펼쳐지는 것도 아니다. 나에게 사랑은 단일한 형태가 아니라 액체처럼 어느 용기에 담느냐에 따라 달라지기에, 우정이건 가족애건 따지지 않고 그 감정을 공유하는 사람들을 연인이라 칭한다. 이런 마음도 모르고 연애를 강요하는 타인들의 지적은 피곤함만 가중시켜서 더더욱 연애를 기피하게 한다.


연애적 측면에서 정확한 과녁에 들어가지 못하고 빗나가는 화살을 쏜 적은 꽤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재미난 일은 공감 능력을 통해 직접 경험하지 않고도 연애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을 총동원해서 연애 소설을 몇 편 쓴 적도 있다. 반응도 은근히 좋아서 더욱 신나게 썼던 기억이 있다. 특히 내밀한 감정을 다룰 때 연애 소설만큼 적격인 것도 없다.


“이런 사랑을 겪어보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쓸 수가 있어?“ 라는 질문을 받은 적 있다. 다시 곱씹어봐도 흥미로운 질문이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다면 좀비 아포칼립스를 겪지 않은 사람들이 어떻게 <새벽의 저주>를 제작할 수 있을까?” 아마 제작진은 상상력을 최대치로 끌어 모은 다음,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서 영화를 제작했을 것이다. 연애 소설도 다를 바 없다. 현실과 비슷하거나 아예 현실과 동떨어진 상황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인물을 배치한 다음 물음표를 달면 된다. ‘나라면 여기서 어떤 말을 내뱉고,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라는 전제를 확실히 깔아 둔다는 뜻이다.


우리는 타인의 상상력에 자주 감탄한다. 앞에는 ‘역대급’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박수를 치며 탄성을 지르고 수많은 ‘주접 댓글’을 단다. 이런 경우가 연애에서 적용되는 경우가 드물다는 건 조금 아쉬운 일이다. 직접 경험을 바탕으로 소설을 쓰고 가사를 쓰고 노래를 부르면 실감 나서 좋겠지만, 우리에게 할당된 경험은 극히 제한적이다. 즉, 언제나 땅바닥을 구르며 죽네 사네 하는 연애를 꾸준히 할 수가 없다는 말이다. 이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지독한 연애를 해보지 않은 상태에서 연애 소설을 쓴다는 타인의 의심은 쓸데없는 종류가 된다.


나는 가슴 절절한 사랑을 겪어봐야만 진중한 사랑에 대해 논하고 쓸 수 있다는 말에 반대한다. 어느 시절에는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서 수면을 방해하는 수식어로 점철된 여러 밤을 보냈지만, 정작 그때의 나는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오히려 그 사람 생각에 사로잡혀 눈앞에 놓인 일을 제때 수행하지 못하는 절망에 빠졌다. 시간이 지나서도 당시의 일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분노가 치밀어서, 관련된 글을 절대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어느 일이나 그렇듯, 예술도 멘탈 싸움이다. 피폐한 정신과 퉁퉁 부은 눈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차라리 다른 상념으로 인해 몸을 뒤척이는 밤이 찾아오면, 그때의 나 자신을 사랑에 목숨 거는 사람으로 변장시킨다. 그러면 상상하기 쉬워진다. 메모장을 켜서 상상의 나래를 펼친 순간을 마구 휘갈겨 쓰고 나중에 확인했을 때, 괜찮다 싶으면 수정한다. 생각보다 대부분의 일들은 그동안의 사유와 상상을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밥 잘 먹고 잠 잘 자는 일, 정말 중요하다. 마음 아픈 일이 벌어지면 저 두 가지 일을 최우선으로 두어야 할 만큼 말이다. 나는 맨 정신으로 상상하고 글을 쓰고 싶다. 마감에 시달리는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적어도 평소에는 온전한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싶다. 꼭 스펙터클한 사건만이 사람들을 사로잡는 건 아니다. 나에게 그런 사건이 간절할 정도로 필요한 것도 아니다. 현재의 나는, 다른 감정으로도 벅차서 일부러 심장을 걸레짝처럼 찢어발기고 싶지 않다.


진절머리 나는 사랑, 구질구질한 사랑이 내 생에 다시 찾아올 수도 있다. 확실한 건 멍든 가슴을 부여잡은 내가 제대로 글을 쓸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그 사람과의 관계가 지나칠 정도로 중요해서 사랑하는 글이고 나발이고 다 제쳐둘 테니 말이다.


사랑을 말하는 건 즐겁고 고통스럽고 기쁘고 짜증 나고 암담해서, 사랑에게 다가가다가 멈추다가 달려가기를 징그럽게 반복한다. 현재 나는 어느 누구와도 연애 감정을 나누고 있지 않고, 짝사랑도 하고 있지않지만, 사랑을 상상하는 행위에 마침표를 찍은 적은 없다. 디스토피아에서도, 미지의 우주에서도 인류는 사랑을 버리지 않는다. 사랑을 외면한 사람은 대체적으로 영화나 책에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에 안도한다. 그러면 상상 속 사랑은 아무리 혼돈이어도 조금은 달콤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반려의 세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