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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제야 Sep 01. 2023

선택  

면접교섭에 대한 생각들

 

 이혼 조정성립 이후 지금까지 총 4번의 면접교섭 기회가 지났다. 그리고 그는 단 한 번의 연락조차 없이 오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그다지 궁금하진 않지만 굳이 그 이유를 추측하자면 아마도 그의 아버지 사건의 여파 때문이 아닐까.

 그 어떠한 해명도 우스워질 사건을 두고 우리 모두는 입을 다물었다. 당사자와 그 가족은 물론이며 나까지. 사실 나야 처음엔 그들 스스로 자멸한 것에 대해 통쾌해했지만, 솔직히 아이를 생각하면 이 역시도 문제다. 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여자들에게 빠져 가정을 등졌다는 것을, 그 가족의 역사를 나는 결코 쉽게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얼마 전 변호사와 이 문제에 대해 상의했다. 언젠가 미래에 갑자기 면접교섭권을 요구할 것을 대비해서였다. 지금에야 무슨 이유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내게는 다행이지만, 갑자기 다짜고짜 등장하면 내겐 큰 골칫거리가 된다.


 다행히 아이는 그를 전혀 찾지 않는다. 새롭게 배우고 채워가는 것이 더 많은 아주 어린 나이이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이의 사전에 '아빠'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여태껏 단 한 번도 그 단어를 내뱉은 적이 없다. 그림책에 가끔 아빠라는 말이 나오면 나도 모르게 아이 표정을 살핀다. '성인 남자'로 이해되는 그림을 보면 아이는 '하부지(할아버지)'라 하며 좋아한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이 되었음에 나는 웃을 수가 없다.


  한 여자로서의 나는 그와의 완벽한 단절을 원한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그의 소식이 바람처럼 흐트러져 내게 닿지 않길, 또한 나에 관련한 그 어떠한 것도 그에게 도달하지 않길 바란다. 그러나 엄마로서의 나는 조금 복잡하다. 그와 그의 가족이 아이에게 가할 심리적 압박이나 잘못된 교육 등을 원천봉쇄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관계의 단절에 있어 아이에게 일말의 선택권조차 없다는 것이 못내 속상한 것이다.

 

 사실 내 경우에는 면접교섭을 아예 하지 않는 것이 낫다는 입장이다. 변호사가 이야기해 준 수많은 사람들의 사례나, 하다못해 주변의 몇몇 경우에도 면접교섭은 때론 득 보다 실이 많을 수도 있다. 물론 당사자간의 관계와 별개로 부모로서의 책임과 의무에 성실한 사람도 있겠지만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것도 아주 좋은 관계로 꾸준히 이어지는 경우가 꽤나 드문가 보다. 무엇보다 그를 아는 사람으로서, 나는 그의 끈기와 책임감을 결코 믿지 못한다.


 일종의 선입견일까. 나는 그래서인지 면접교섭에 꽤나 부정적이었다. 그가 나타나지 않아 자연스레 다른 고민이 생겨났지만 말이다. 결국 아이가 자라면서 궁금해할 자신의 뿌리와, 이름 모를 그리움에 대한 현명한 답을 찾는 것은 나의 과제가 되었다.

 숱한 고민을 통해 답안을 찾는다 해도, 정말 솔직하게, 나는 혹여나 아이가 자신이 거부당했다고 느낄까 봐 걱정이 된다.



누구를 위한 만남인가


 법은 아이의 '복리'와 '권리'를 위해 면접교섭을 반드시 하게끔 독려한다. 양육자가 일방적으로 이를 거부하거나 방해할 경우 법령에 의거하여 이행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가끔 의구심이 든다. 과연 진짜 아이를 위한 것은 무엇일까? 모든 케이스가 면밀히 검토되지 않는 한, 단지 아이에게 양쪽 부모가 모두 필요하다는 전제만으로 그것아이의 '필수 권리'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일까?

 

 이혼하는 부부에게 자녀 양육에 대한 교과서적인 교육을 진행하는 그 법은, 모든 가정에 완벽한 해결책이 되지는 못한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의무를 강제하는 이 만남이,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진지하게 돌이켜보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쩌면 부모의 이혼 사실보다 부모와의 관계 속에서 더욱 상처받는다. 그래서인지 면접교섭의 양면을 아무리 곰곰이 생각해 보아도, 나는 무엇이 진짜 아이를 위한 것인지 쉽게 답을 내놓을 수 없다. 나름 평탄한 가정에서 자란 나로서는 직접 경험해보지 않았으므로 결코 함부로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제 이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나는 아이의 양육자이자, 원치 않은 상처를 준 가해자이자, 그 슬픔의 목격자가 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모든 것은 지난 시간에 켜켜이 쌓인 그와 나의 선택으로 인해 생겨났다. 나나 그나 이혼에 대해서는 결코 후회하지 않을지언정, 최소한 나는 아이에 대해 어떠한 죄책감이 늘 자리할 것만 같다. 내겐 최선이었지만 아이에겐 칼이 될 수도 있는 선택. 아이에 관해서는 그 어떠한 것을 선택해도 텁텁한 뒤끝이 남는다.



후회 없는 선택?


 과연 진정 '후회 없는 선택'이란 존재할까?

 이 부분을 설명하자면 그 '후회 없음'을 규정하는 정확한 조건과 기준이 필요할 것이다. 그것이 개인의 심리적 만족일 수도 있고, 때로는 돈이나 시간, 기타 보상이 될 수도 있다. 이 기준이 무형의 것이라면 만족도를 평가하는 것이 더욱 어려울 것이다. 정확히 수치로 규정할 수 없는 척도를 정립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특히나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그 가치관이 충돌하며 선택의 기로에 놓일 때, 어떤 것을 기준으로 해야 할지 더욱 아리송해진다. 도덕이나 윤리, 개인의 득과 실, 미래에 올 나비효과까지.

 어떤 선택을 하든 책임이 뒤따른다는 불변의 진리 앞에, 앞으로 닥쳐올 여러 상황을 비교분석해 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결정장애'와는 거리가 먼 나의 경우에도 이혼이라는 중대한 결정을 하기까지는 단계적인 자기 합의를 거치며 최종 선택지를 고정하기까지 꽤 시간이 필요했다. 어떤 쪽을 택해도 마이너스를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혼 과정에서 이야기를 나눈 사람들은 내게 '가장 후회 없는 방향으로' 결정하라고 했다. 결국 나의 인생이고 내가 겪는 일이니 가장 합당한 조언이다. 

 그러나 내가 결정한 방향으로 인생을 이끌어 나가는 것은 꽤 두렵고 외롭다. 그것이 물건을 사는 것처럼, 반품이나 환불이 불가능한, 가보지 않은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고르는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어느 길을 가든 미처 가지 못한 다른 길에 대한 아쉬움이 남을 테니 말이다.

 

 일단 내린 선택에 충분히 만족할 수 있다면 참 좋겠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것이 늘 그렇게 되진 않는다. 

 선택에 관한 배리 슈워츠의 이론이 떠오른다. 그의 저서 <선택의 심리학>에서 선택의 순간, 그리고 그 이후의 만족감의 차이에 대해 '극대화자'와 '만족자'로 양분하여 설명한다. 극대화자란 모든 선택지를 살펴보고 비교하여 완벽한 선택을 하기 위해 고심한다. 반면 만족자란 말 그대로 '이 정도면 최선'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이 원하는 조건에 일부 부합하면 빠른 결정을 내린다. 저자는 선택의 결과는 극대화자가 나을지언정 만족도는 만족자가 더 높다고 설명하며 선택지를 줄이는 것이 심리적으로도 이롭다고 말한다.


 어차피 이러나저러나 골칫거리가 존재한다면, 고민할 에너지를 아껴 선택에 따를 후폭풍을 감당하는 것이 나을 수도 있다. 또한 모든 경우의 수를 따지는 것 자체가 쓸데없는 망상과 추측으로 스트레스만 잔뜩 가중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이와 같은 이유로 빠른 이혼을 택했으니 나는 만족자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수많은 대안에 따른 부정적인 측면들로 인한 과부하는 오히려 현재를 망치는 주된 요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삶의 큰 방향성을 결정하는 일이라면, 선택의 이면에 휩쓸려 갈등이 심화되어 심한 경우 무기력이나 우울감이 함께 동반되지 않는가. 


  결국 슈워츠는, 선택에 대한 후회를 최소화하고 이에 동반되는 각종 심리적 마이너스 효과에 대한 대안을 이렇게 제시한다. '이런 것에서 벗어나는 길은 더 만족하고 감사하는 태도이다.(234)'.

 어쩌면 누구나 이미 알고 있는, 조금은 김 빠지는 결론일 수도 있지만 사실 이것보다 더 근본적인 마인드셋이 있을까 싶다. 


 이미 결정한 방향으로 시간은 흘러간다. 또한 그 선택에 따른 결과는 모두 각자의 몫이다

 면접 교섭을 하고 말고는 사실 그의 선택이 아니다. 부모에 평가와 면접에 대한 선택은 아이에게 있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훗날 아이가 치우치지 않는 현명함으로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삶을 선택해 나가길 응원할 뿐이다. 가장 합당한 기준을 두고, 보다 멀리 내다볼 안목을 키워나가길 바라면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선택에 따른 얻는 것들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이 시간이 쓸데없는 걱정들에 묻혀 사라지지 않도록 정신을 똑바로 차린 채 나와 아이 앞에 놓인 지금을 본다. 오직 현재에만 존재하는 아이의 눈부신 시간을 홀로 만끽하며 오늘도 더 나은 몫을 택하도록 마음을 기울인다. 이론으로 절대로 가르칠 수 없는, 선택에 따른 책임을 삶으로 가르칠 수 있길 바라며...




 

타이틀 이미지

ⓒ Pelle Sten , 출처 lenscultur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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