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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Oct 31. 2023

하늘 끝까지, 토마토


종종 주말에 서는 장에 간다. 너른 잔디밭에 천막과 테이블 따위로 만든 가게들이 세워지면 지난 엿새동안 조용했던 공원은 활기로 가득 찬다. 부지런한 사람들은 벌써 장바구니를 가득 채워 빠른 걸음으로 장을 나서고 있다. 입구 근처에는 파이, 만두, 피자나 젤라또 같은 먹거리를 파는 푸드 트럭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몇 걸음 걷다 보면 유난히 줄이 긴 트럭이 있는데 주말 아침 일찍부터 장터에 나온 사람들이 커피를 기다리는 줄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젊은 뮤지션이 천막 아래 앉아 기타를 치며 날아갈 것 같은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다.


아침부터 장에 가는 목적은 빵이다. 빵은 나 말고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일찍 가지 않으면 동이 나는 경우가 많다. 올리브와 로즈메리가 들어있는 빵이 있어서 하나 산다. 갈색 종이로 만든 큼직한 빵 봉투를 받아 든다. 다음은 어디로 향할까? 봄이 왔으니 텃밭에 심을 모종을 구해야 한다. 모종 역시 나 말고도 필요한 사람들이 많아서 일찍 가지 않으면 헛걸음을 할 수도 있다. 부지런한 텃밭 농부들이 아침 일찍 다녀간 자리는 이미 여기저기 휑하게 비어있다. 다행히 마지막 남은 빨간 토마토 모종과 상추, 허브 몇 가지 등 필요한 것들을 구했다. 나오는 길에 보니 커다란 아보카도를 좋은 값에 팔길래 그것도 하나 사서 장터를 떠난다.


어제는 장에서 사 온 모종을 심었다. 대나무 막대를 땅에 꽂고 그 옆에 토마토를 심었더니 가지가 양쪽으로 갈라진 부분을 막대에 폭 기대는 모습이 꼭 의지하고 쉬는 것 같아 귀엽다. 토마토는 가지가 너무 많아지지 않도록 자라는 동안 곁순을 계속 떼어내야 한단다. 어느 정도 자라거든 더 이상 키를 키우지 않기 위해 성장순을 잘라내야 하는데, 미안한 마음이 들어도 그렇게 하는 이유는 몸집을 키우는 데 기운을 모두 써버리게 되면 나중에 열매를 만들 힘이 남지 않기 때문이다. 소담하게 열릴 토마토를 상상하면서 앞으로 열심히 곁순을 떼어주겠다고 다짐하는데……. 그러다가 오래된 이름 하나에 기억이 다다른다. 톰. 뉴질랜드 웰링턴의 한 카페에서 만난 이름이다.


몇년 전(2021) 웰링턴에 살던 때 자주 가던 카페가 있었다. 카운터를 마주 본 공간에는 여섯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높고 커다란 나무 테이블이 놓여 있었는데, 종종 거기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탁 트인 창 너머 다채로운 도시의 풍경을 바라보곤 했다. 해가 잘 드는 창가에는 토마토 화분이 놓여 있었다. 유리창에 붙은 마스킹 테이프에 ‘Tom’이라고 써있는 걸 보니 토마토 이름이 톰인 듯했다. 톰의 왼편에는 껑충한 간격을 두고 열 개쯤 되는 짧은 줄이 그어 있었고, 줄마다 날짜가 표시된 걸로 보아서 누군가가 때마다 톰의 키를 재는 모양이었다. 톰은 정말 길게 자라났다. 머지않아 유리창의 끝까지 닿을 것 같았다. 창가의 톰은 말없이 창밖을 내다보며 매일 조금씩 자랐다.   


텃밭에 토마토를 심으며 생각해 보니, 톰이 그렇게나 크게 자라난 건 아무도 그의 성장순을 떼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바깥에서 해를 쬐고 바람을 맞으며 자라야 하는 토마토가 실내의 화분에 들어앉아 있었던 것도 몇 가지 복합적인 이유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기다란 몸에 변변치 않은 열매가 한두 개 밖에 열리지 않은 걸 보면 길게 자라는 데 톰은 에너지를 다 써버린 게 분명했다. 토마토가 열리지 않는 토마토라는 건 곧 토마토로서는 실격이라는 뜻이 아닌가. 그런데도 카페에서는 톰을 내다 버리지 않고 때마다 물을 주고, 또 때마다 키를 재주며, 해가 가장 잘 드는 곳에서 자라도록 놓아두었다.


제멋대로 자라는 모양을 보면 애초부터 토마토를 얻으려고 심은 것 같지는 않아 보인다. 어쩌면 누군가 떨어뜨린 토마토 조각이 창가의 화분 속으로 들어갔던 건 아닐까. 부러 심지도 않았는데 빈 화분에서 혼자 자라난 토마토 싹은, 바쁜 카페에서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는 사이에 쑥쑥 키를 늘려갔으리라. 그리고 어느 날 누군가 처음으로 톰을 알아봤을 때, 그의 눈에는 어디까지 자라나는지 스스로의 한계를 시험하는 톰이 숭고하게 보였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웃자란 가지를 그대로 둔 채, ‘네가 살고 싶은 만큼 여기서 살아라.’ 하고 해 드는 자리에 화분 하나를 내어 준 것일지도 모른다. 상상일 뿐이지만, 톰에게 자리를 내 준 그 마음이 다정하다.


해가 잘 드는 창가에서 제가 자라고 싶은 만큼 마음대로 자라는 톰은 열매 하나 제대로 열리지 않았대도 신경 쓰지 않는다. 오히려 열매 걱정을 하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 같다. 탐스러운 열매는 인간에게 필요한 것 아니냐고. 나는 그렇게까지 많은 열매 필요 없다고. 크고 대단한 열매가 아니래도 괜찮다고. 얼마나 자랄 수 있는지, 어디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지, 내 한계를 시험하는 편이 나로서는 열매를 맺는 것보다 재미있다고.


자라는 동안 우리는 자주 잊는 것만 같다. 인간으로 태어나 살아가는 이유가 멋진 열매를 맺기 위해서라고 자주 오해하는 것만 같다. 그래서 열매가 열리지 않는 토마토를 뽑아 버리고, 열매가 달리지 않은 스스로를 실격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톰이 내 삶에 찾아온 건 그래서인지도 모르겠다. 정말 중요한 건 한 철뿐인 열매 알이 아니라는 걸 알려주기 위해. 삶과 죽음의 시간 속에서 영원히 변하지 않는 가치가 이미 우리 속에 존재한다는 걸 알려주기 위해.


이제 그 도시의 카페에 다시 가더라도 톰은 없을 테지만, 도시를 떠난 나는 봄이 올 때마다 여기에서 토마토를 심을 것이다. 일 년에 한 번씩 토마토 모종을 심는 날마다 잊고 있던 톰이 찾아와 말을 걸어올지도 모른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가 정말 살아있는지, 내 삶을 살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할 수밖에 없으리라.


대나무 막대에 기댄 어린 토마토 모종을 보면서 생각한다. 곁순을 떼려고 너무 빡빡하게 굴지 않겠다고.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라나는 토마토를 순수한 놀라움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좋겠다. 그런 눈으로 토마토를 바라보다 보면 나를 향하는 눈도 바뀌어 있을 테다. 그래서 이건 당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며 나 자신에게 해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누구나 탐낼만한 열매를 달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를 살아있게 하는 일을 하며 살면 된다. 그렇게 빛을 향해 우리는 쭉쭉 자라나가면 된다.



<나무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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