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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사리 Nov 08. 2023

나만의 정원


<세이지 우주의 중심>



주말에 서는 장에 가서 빵을 두 덩어리 사 왔다. 사 온 것 중 펜넬과 포피씨드가 들어있는 빵 한 덩어리는 전부 아보카도 토스트가 되어 사라졌다. 펜넬의 풍미와 포피씨드의 고소함이 서로 그렇게 잘 어울릴 수 없었다. 아보카도 토스트를 맛있게 먹는 방법이라면 곁들일 수 있는 토핑의 수만큼 다양할 테지만, 내가 생각할 때 가장 맛있는 아보카도 토스트는 따로 있다. 맛있는 빵, 잘 익은 제철 아보카도, 맛있는 소금. 이 세 가지면 더할 것도 덜어낼 것도 없는 완벽한 맛의 아보카도 토스트를 만들 수 있다. 그래서인지 펜넬과 포피씨드로 맛을 낸 커다란 빵 한 덩어리가 유난히 금방 사라진 듯한 기분이다.


묵혔다 먹을 빵은 호밀빵이다. 호밀빵은 구운 날은 속이 아직 무르기 때문에 이삼일 정도 묵혀 굳히고 나서 먹으면 더 맛있다는 빵집 주인의 설명을 듣고 처음 사 본 것이다. 빵은 신선할 때 사서 다 먹고 다음 장날까지 기다리곤 하는데, 묵힐 빵을 산 이유는 집에 반가운 손님이 오기로 했기 때문이다. 멀리 다른 마을에 사는 친구가 잠시 시간을 내 집에 놀러 오기로 한 것이다. 요즘 대학 공부에 바쁜 친구는 세 아이를 키우는 엄마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바쁠지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인데, 그런 친구가 멀리서 와준다니 그것보다 고마운 일이 또 있을까.


친구가 오는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날이 으슬으슬 흐리다. 같이 호밀빵에 아보카도로 늦은 아침을 먹으려고 했는데 이런 날씨에 아보카도를 먹는 생각만 해도 몸이 덜덜 떨리는 것 같았다. 메뉴를 바꾸었다. 텃밭에 나가 이런저런 허브를 따모으고 케일을 좀 떼어다가 소박한 렌틸콩 수프를 끓였다. 묵은 호밀빵을 토스트 했다. 친구는 짙은 호밀의 색깔에 감탄했다. 렌틸콩 수프를 나누어 먹으며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은 일들에 감탄하고, 작은 일들을 고민했다. 그리고 정말 많은 작은 것들에 우리는 크게 웃었다.


친구가 나눠주고 간 들깨와 쑥 모종을 텃밭에 심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에 읽었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느 책에서 인간관계를 정원 가꾸는 일에 비유한 걸 본 적이 있다. 해로운 인간관계를 끊어내는 일을 정원의 잡초를 뽑는 일에 비유했던 것 같다. 표지며, 이름이며, 읽었던 시기마저, 그 책에 대한 모든 걸 잊었지만 그 비유만큼은 아직도 기억한다는 걸 보면 정말 절묘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잡초라는 건 해가 되는 특정한 식물을 말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내 정원에서 자라길 원하지 않는 모든 식물’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한 원예 고수가 말한 적 있다. 그 말에 의하면 아무리 아름다운 장미 덤불이라도 내 정원에서 자라길 원하지 않는다면 뽑아내야 할 잡초라는 것이다. 물론 뽑다가 가시에 찔릴 수도 있고, 죄책감이 들 수도 있다. 만일 유난히 뿌리가 깊이 내렸다면 뽑아내는 작업을 마치고 나서 며칠 근육통을 앓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뽑지 않고 정원을 크게 가꾸면 되지 않느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이쪽에는 장미 정원을 만들고, 다른 쪽에는 젠 가든을 만들고, 또 다른 한쪽에는 허브 정원을 만들 수도 있지 않느냐고. 그런 정원들이 있긴 있다. 주로 정원 사이로 작은 강이 흐르고, 온실도 있고, 거기서는 온갖 희귀한 선인장과 잎이 넓은 열대식물들이 자란다. 거대하고 아름답고 완벽하게 가꿔진 정원.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런 이상적인 정원은 여러 명의 전문 정원사들이 가꾸곤 한다.   


물론 원한다면 혼자서도 큰 정원을 마련할 수 있다. 혼자 그걸 해낸다는 게 완전히 불가능하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아마 하루 종일, 매일매일 정원일만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은 잡초가 무성한 메마른 땅으로 변하고 말 것이다. 그게 실제 정원이든, 비유적인 의미로서든, 내 능력보다 큰 정원을 관리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지금 나의 정원은 꽤 단순하다. 정원 한 구석의 네모진 작은 텃밭만 돌본다. 내가 얼마큼의 식물을 책임질 수 있는지, 얼마 이상 넘어가면 관리하기를 포기해버리고 마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정말로 실패의 경험을 통해 인간은 배우는 모양이다. 온갖 식물들을 있는 대로 관리하겠다고 의욕적으로 달려들었다가 지쳐 포기하고 결국 아끼는 식물까지 메말라 죽게 했었으니. 가시에 찔렸던 일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날들도, 더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꼭 지나야 했던 시간이었을는지 모른다.


꾸준히 나만의 작은 정원을 가꾸는 동안 모인 작은 성취감이 우리의 하루를 충만하게 만든다. 매일매일 조금씩의 충만함을 경험하다가 어느 날 때가 되면 정원의 크기를 조금 늘려도 되는 일이다. 단, 정원에 살고 있는 존재들이 놀라지 않을 정도로 아주 천천히. 느릿느릿 잎사귀를 갉아먹는 달팽이처럼,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속도로 자라나는 식물들처럼. 텃밭의 시간이다. 텃밭의 시간에서 가장 놀라운 점이라면, 그건 순식간에 잎사귀에 생겨버린 커다란 구멍. 비 온 다음날 훌쩍 커버린 식물들의 키. 꾸준하고 느린 모든 순간들이 모여 만들어 낸 순식간의 변화. 바로 그것이리라.


텃밭에 들깨와 쑥을 심고 들어오니 친구가 들었던 자리에 그의 기운이 그대로 남아있다. 공간을 채우고 있는 응집된 에너지에 혼자 있는데도 웃음이 난다. 오래전 내 텃밭을 모두 갈아엎었던 날, 나는 오늘의 텃밭이 이렇게나 마음에 꼭 들게 변해 있을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의 작은 텃밭에서 자라는 다정한 얼굴들을 떠올린다. 물기 맺힌 흙 속에 슬몃 뿌리를 내려준 그 마음들이 너무나 감사하다. 귀하게 여길 것이다. 그리고 텃밭 세계의 규칙이 그러하듯, 내가 그 얼굴들을 얼마나 사랑하든 스스로 자라도록 내 마음대로 손대지 않겠다고 약속한다.


내가 세상에 묻히고 다니는 나의 에너지는 어떤 것이지 문득 궁금해진다. 이른 아침의 차갑고 축축한 흙냄새, 그런 것이 떠오르는 기운이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지 방법을 몰라, 나는 그저 때마다 텃밭으로 나가서 흙을 들여다 보고, 오리가미 모양으로 피어난 콩 싹을 바라보며 감탄한다. 그러다가 비가 너무 많이 온 탓에 낮게 달린 잎 몇 장이 누렇게 변한 세이지 앞에 멈춰 선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세이지 우주의 중심으로부터 회복하려는 의지가 솟아나고 있는 게 보인다. 그렇게나 강한 모습을 보면서 잎사귀를 한 번 쓸어주는 것이다. 세이지 잎을 만진 손가락에 세이지 향기가 스며든다. 나에게 묻은 너의 향기가 이제는 꼭 내 것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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