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빛나는늘보 May 06. 2023

두 자매이야기

첫째 딸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지만...

내가 10살 되던 해 갑작스러운 사고로 우리 가족은 아빠를 잃었다. 부족함 없던 한 집안이 가장의 죽음으로 어떻게 무너지지 여과 없이 경험한 우리 두 자매였다.



딸 넷 중 막내는 아빠가 떠나던 해 하늘나라라로 갔고 셋째 동생은 아빠의 기억이 거의 없다. 40대 초반에 아빠의 인품과 온전한 모습을 유일하게 간직하고 있는 나와 내 동생

10살 소심하고 겁이 많은 나는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두 눈으로 차마 보지 못했다. 지금까지도 살면서 가장 후회하는 일 중 하나다. 그러나 동생은 달랐다.

당차고 겁이 없는  동생은 염이 끝나  잠자듯 누워있는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기 위해 애쓰며 그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때 동생나이가 7살이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대범함과 사교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아빠가 유난히 아꼈던 동생이었다. 아들이 없던 우리 집에 아들 노릇 할 거라며 판사를 시키겠다고 아빠는 늘 입버릇처럼 이야기했다. 커 갈수록 웃는 모습이 아빠를 닮아서 주변사람들이 깜짝 놀란다는 내 동생이었다.


아빠를 잃고 막내 동생도 잃었던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는 나는 혹시 엄마도 갑자기 우리를 떠날까 봐 늘 불한해 했다. 나는 소심함 속에 잠재된 또 하나의 불안함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늘 까칠했고 모났다. 그런 나를 감추기 위해 까칠함을 동생을 향한 협박으로 무장하고  당찬 성격에 동생을 앞세 자주  많은 일을 벌이곤 했다. 가기 싫다는 동생을 잡아끌고 협박해서 시골 정류장에서 둘이서 손잡고 밤늦게 까지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려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걱정시켜 함께 혼이나기도 했었다. 어디서나 자신의 의사 분명한 동생은 남동생처럼 든든하고 사람을 웃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 아빠의 말처럼 우리 가족은  크게  될 아이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의미 없는 협박을 당하는 줄 알면서도  성격 좋은 동생은 늘 나를 잘 따랐다. 우리가 사춘기가 돼 가면서  힘든 시간을 버티고 온 자매답게  3살 차이를 극복하며 피 터지게 싸우면서도 어느새 우리 둘은 말 못 할 고민도 나누는 끈끈한 동지애 같은 게 생겼다. 


대학시절 방학을 보내고 있는데 집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거기 학생 집이죠?

"네~ 그런데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였다. 이 밝은 대낮에 낯선 중년의 남자가 집으로 전화를 한다는 건 연례행사가 맞을 거라는 나의 불길한 예감은 올해도 맞아떨어졌다.

"저.. 담임인데 어머니 계시나요?"

"아뇨 지금 집에 안 계신데요 "

" 어머니하고 통화 가능할까요?

"엄마 일하시는 중이라 저한테 말씀해 주시면 전달해 드리게요."

"아 네 그럼 전화받으시는 분은 누구신가요? "

"언니예요 "

"아~ 네 실은.. 가 가발을 쓰고 학교에 왔어요."

"? 뭐라고요? 뭐를 했다고요? 가발이요?

순간 멈칫

순간이지만 스쳐 지나가는 생각은 수만 가지였다.

'하~미친 거 아냐? 이제 별짓을 다하네.'

졸업장이 코 앞인데 해마다 얼굴도 모르는 담임과 실랑이를 벌여야 하다니...


고 3 수능을 앞두고 있어서 선생님들의 단속이 허술한 틈을 타서 1년을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수능 가까이 왔을 무렵 갑자기 학교에서 내린 단발령

신의 인기 있는 외모 중 유난히 찰랑거리는 머릿발이 한몫한다는 것을 잘 알았던 동생은 그 시절 인기 있던 견우의 여자친구 전지현을 꿈꾸고 있었다. 지금까지 기른 머리가 너무 억울하다는 동생의 하소연을 전해 들은 기억을 되짚었다. 그래도 정말 나의 성격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동생이지만 참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고 늘 상상이상의  그런 과감한 행동이 부럽기도 했다.

'죄송하다고 할까?' '뭐라 얘기할까?'' 주의를 시키겠다고 할까?'이 걸 알면  엄마가 얼마나 걱정할까? 엄마가 바쁘니까 이것도 내 선에서.. 마무리 지어야겠다. 그리고 그냥 동생의 편을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선생님 그런데요 ~졸업하는 아이들 단속한다고 단발령을 내린 건 아닌 것 같아 말씀드려요."

 "저도 졸업한 지 얼마 안 됐지만 그런 단속은 전혀 도움이 안 돼요." 그래서 제가 그냥 쓰고 가라고 했습니다."

언니가 쓰고 가라고 했다는데 무슨 말이 필요할까 전화 밖 담임의 표정은 아마 어이가 없었을 것이다.

훗날 동생에게 전해 들은 말은 동생이 원서에 쓴 대학 붙으면 손에 장을 지진다 했다고 하셨단다.

그리고 동생은 버젓이 대학에 합격했다. 


모범생이 아니었던 동생인지라  선생님은 말이 안 통한다는 식으로 말을 전하고 어머니께 주의를 부탁드린다고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내 선에서 모두 해결한 문제를 엄마께 전하지 않았다. 그전에도 해마다 얼굴도 모르는 동생의 담임선생님들과 언쟁을 했지만 그게 내가 동생을 지킬 수 있는 최선이라 생각했고 절대 동생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꼭 관가 시켰다. 지금 생각하면 나이 얼마차이도 안나는 언니가 뭐 대단한 거라고 담임선생님께  부모처럼 무례하게  행동했는지 웃음만 난다. 변명을 하자면  엉켜 붙어 떨어지지 않는 우리의 어린 시절 깊은 상처를  같이 공유하면서도 각자의 인생을 다르게 살아가는 동생을 위한 최선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라면 감히 가지 못했을 길을 가고 있는 부러움이기도 했을 것이다.

판사가 될 거라는 아빠의 말은 사춘기와 함께 사라지고 공부 빼고 다 잘하는 동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환경이 만들어 놓은 내면에 잠재된  성격은 각자의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무언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데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다. 결혼 후 제부가 직장 때문에 방황할 때 서울로 가겠다는 동생을 이 도시로 방향을 틀도록 설득했다.  남편의 지인을 통해서  조선경기 호황기던 때 회사를 옮겨 신생회사의 창업 멤버로 영입시켰다. 지금 뒤 돌아 생각해 보니 30이 넘은  동생부부였음에도 낯선 도시에서 잘못될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때도 동생을 연고도 없는 대 도시로 보내고 무슨 일이 생길까 염려스러움에 좌불안석이었다.


맏딸들은 엄마 무릎에서부터 리더 역할을 배운다.
어린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안전하게 이끌고 가는 일은 어느 맏딸이 나 하게 된다.
그러다가 어린 동생이 건널목에서 손을 뿌리치면 화들짝 놀라곤 한다. 고집 센 동생을 어떻게 설득해야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게 될까?
.
.
맏딸은 안내책자 하나 없이 어린 나이부터 리더십 자질을 닦는다. 그리하여 어른이 된 이후에도 먼저 나서길 좋아한다. 그게 익숙하기 때문이다.

['첫째 딸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중 저자: 리세터 스하위테마커르, 비스 멘트호번 지음]

제부와 동생은 낯선 도시건 아니건 힘들었던 시기에 남편 덕분에 새로운 직장에서 안정된 자리에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어서 늘 고마워하고 있었다. 그리고 S.. 로고가 새겨진 회사에 옷을 입고 출근하는 날 제부는 그 옷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고 동생은 전했다. 그런데 사람 마음이 늘 처음 같지 않듯이 제부는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과 회사를 위한 발전보다는 전형적인  안정된 삶을 취했다. 안정된 삶 속에는 야망보다는 적은 월급도 있을 것이고 회사에 대한 심심치 않는 불만도 있었을 것이다. 동생은 한결같이 남편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혼자서 자신의 남편을 지켜보며 염려하기도 했고 발전하지 못하는 부분을 때로는 외부에서 찾기도 했었다. 형부에 대한 고마움과 믿음이 밑바탕에 깔려있던 동생은 형부의 사업 제안에 그 자리에서 바로 행동으로 옮기며 자신의 남편을 설득하기에 이르렀다.  잔업 없이 늘 정시 퇴근이 대다수였던 제부의 부족한 월급이  설득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제부는 주변 다수의 설득에 마지못해 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해야 하는 때 제부는 우리에게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 이름을 걸고 낸 사업자이다. 그런데 나는 제부의 영입을 반대했음에도 제대로 된 내 의사를 밝힌 기억이 없다. 참 아이러니 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첫아이를 나보다 더 아끼던 동생이었다. 안 돼라는 엄마가 있다면 이모의 오케이 성격 덕분에 아이가 이모를 더 많이 따라서 엄마와 딸이 아니냐고 할 정도로 이모를 좋아했고 늘 같이 살다시피 했다. 주변에서도 부러워할 만큼 좋은 자매사이였다. 그런데 서로 잘 살아보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 우리가 마음먹었던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서 두 자매도 어느새 남편의 의견이 자신들의 의견이 되어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 싹은  두 집의 왕래도 없어지게 했고, 가족모임조차 어색하게 만들었다. 갈등 속에서도  주변의 도움으로 일이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그 해 혼자서 힘들어하는 제부를 위해 아르바이트하는 직원까지 우리가 고용한 직원이 4명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신혼시절 동생부부를 서울로 가지 못하게 잡은 나 자신을 자책하게 되었다.


세상 중심에 서 있는 많은 리더들 중에는 다양한 책 읽기와 글쓰기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야기한다. 그것은 선택해야 할 일이 많은 리더의 중심에 온전한 나 자신부터 들여다보기 위함이고 그리고 난 후 객관적 입장에서 사실 판단의 오류를 잡기 위함인 것 같다. 나의 장사 이야기를 과거부터 되짚어 적어가면서 과거에 읽었던 책들까지 다시 펼치게 되는 나를 발견한다. 그러면서 내면에서 외면하고 싶지만 결코 외면할 수 없는 맏딸로서 역할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었지만 지금 들여다보니 최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내가 편하기 위해 했던 선택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지금 내가 어디에 서있고 내가 왜 그런 선택을 하고 있는지부터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최소한의 리스크라도 줄일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준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
사실은 어느 것 하나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 없다.
모든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가끔 삶이 무겁게 느껴지는 이유는 
어느 것 하나 내가 선택한 것도 아니고 
선택한 적도 없는 것 같은 
그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작은 것 하나부터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내가 왜 이것을 선택했지?
이 세상 흐릇듯이 산다고 해서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
.
.
"당신의 삶이 그저 떠밀려 온 삶이 아니기를..."
                                        [어쩌다 어른 중 지은이:이진이]


작가의 이전글 벌거벗은 부부(장)사-가족경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