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누하동
내가 어렸을 때 아빠는 종종 본인은 어렸을 때부터 사대문 안에서 살았다고 말씀하시곤 하셨다. 사대문 안에서 사는 아이를 확인하는 방법은 신발을 보면 되는데, 신발이 깨끗하면 사대문 안에서 사는 아이이고 그렇지 않으면 아니라고 하셨다.
또 지금은 없어졌지만 서울종로국민학교 출신이었으며, 지금 정독도서관에 위치했던 경기고를 나왔다고 하시면서, 사대문 안에서의 무용담을 자주 들려주셨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는 마지막에 나의 본적도 종로의 어딘가라고 하셨었는데... 이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그로부터 20년 후쯤인 30살에 전세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에 제출할 등본에서 처음으로 내 본적을 확인하였다. 명칭이 너무 생소해서 여기가 종로가 맞나? 싶었다.
'종로구 누하동 158번지'
내 본적이란다. 호적법 폐지 후 등록기준지로 대체되면서, 누구든지 본적을 자유롭게 변경할 수 있는 지금 본적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다만, 내 등본에 그것도 가장 상단에 내가 한 번도 가본 적도, 살아본 적도 없는 동네 이름이 적혀 있으니 신경이 쓰일 따름이다.
종로에 머문 시간이 10년이 넘는데 누하동을 가보지 않았을 리 없다. 다만, '여기가 누하동이었어?'라고 깨달은 건 정말 최근이다. 누하동은 매력이 넘치는 동네다. 북쪽으로는 옥인동, 동쪽으로는 체부동·통인동, 서쪽으로는 누상동, 남쪽으로는 필운동과 접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서촌마을의 정중앙에 위치한 동네로, 서촌 하면 떠오르는 모든 이미지를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무엇보다 여기에는 배화여자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가 모여 있는데, 그것 때문인지 다양한 종류의 음식점, 이쁜 카페, 분위기 좋은 Pub이 즐비하다.
'누하동 158번지'를 찾아간 건 정말 최근이다. 이렇게 자주 오는데 한 번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낮은 빌라와 한옥 건물을 양옆에 끼고 좁은 길을 따라 올라가면 배화여자대학교 후문 바로 앞에 위치한 곳이 내 본적이었다. 차가 들어가기 힘든 좁은 골목이었다.
아... 여기가 내 본적이구나... 너무나 평범한 단층 주택... 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학교 후문에 집이 있어서 아빠가 공부를 잘한 건가? 아~! 여긴 여학교지? (아빠는 4형제다) 그럼 여길 왜 온 거지? 골목 가장 끝에 위치한 거 보니, 저렴해서 들어온 건가? 겨울에 눈썰매 타기는 좋겠는데?
인류 문명의 발상지는 항상 물이 존재하는 강 유역이었다. 인류의 선물이자 젖줄이 되는 강의 발원은 한 방울의 물로 시작된다. 그 한 방울이 모이고, 흐르고 스며들어 연못이 되고 계곡이 되어 큰 강줄기로 이어진다.
그리고 그 한 방울이 이제 나에게까지 이어졌다. 정말 특별한 것이 전혀 없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여기가 우리 식구들 모두가 각자의 삶을 치열하게 살아가며 만들어 나가는 물줄기의 발원지라고 생각하니 의아하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였다. 나에게까지 이어진 물방울을 다시 큰 강줄기로 이어 나가는 것, 의무감이나 부담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물과 같이 자연스럽게 막힘 없이 연결하는 것, 그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신기한 장소였다.
작년에 딸 출생신고를 위해 주민센터에 방문하였다.
담당자는 요즘엔 아버지 본적을 따르지 않고 출생한 장소를 기념하기 위해 현 주소지를 본적으로 설정할 수 있다고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물론 귀에 들어오진 않았다.
'아 그런가요? 그럼 그냥 제 본적으로 등록해 주세요. 종로구 누하동 158번지요'
물은 계속 흐른다. 위에서 아래로 굽이굽이 흘러가는 물줄기는 이어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