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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본희 Jun 04. 2023

벼랑끝에서 최고를 꿈꾸는 그대에게

- 최악의 상황이 나를 자극했다 -

1. 최악의 상황이 나를 일깨웠다 : 내신 14등급이 고시 합격한 스토리     


가. 암울하던 시기에 락밴드 기타리스트를 꿈꾸다      


필자는 전라남도 보성에서 1남 4녀의 첫째로 태어났다. 보성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다 5학년이 되자 자식의 공부 성공을 바라는 부모님의 열정에 힘입어 광주 산수초등학교로 전학하였다. 부모님의 지인 집에 하숙을 하게 되었고 중학교는 광주 충장중학교를 다녔다. 중학교 시절에는 자취를 하게 되었고 가족과 떨어져 혼자 살면서 학업에 집중하지 못했다.      


고등학교는 광주 서석고등학교를 다녔는데 2학년 때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발생했다. 학교가 휴교되고 시내에 공수부대원들이 몽둥이를 들고 돌아 다녔다. 광주 충장로를 중심으로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가 있었다. 시내에 나가보니 학교 선생님들도 시위대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과 같다. 시민이 독재에 저항해 일어선 것이다”라는 선생님들 끼리의 대화를 들었던 것이 아직도 기억난다. 당시 유신독재가 종식되고 민주화 열망이 끓어오르자 새로운 군부독재세력이 이를 차단하고 나서니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호남사람에 대한 차별도 극심해서 소위 출세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시민군이 군부에 의해 진압되고 학교가 다시 개교되었으나 학교를 다니는 것이 재미없었다. 한 학급에 70명이 넘었고 암기 주입식 교육에 대한 반항심도 생겼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친구들과 그룹사운드 “태풍”을 만들었다. 집 앞에 기타 학원이 생겨 호기심에 몇 개월 다녔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어 퍼스트기타를 맡았다. 지하실을 임대하여 당시 유행하던 대학가요제 노래, 하드락 밴드의 노래를 카피해서 연주했다. 대학생 밴드와 같이 지하실을 사용하면서 대학생 선배로부터 기타를 배워 기타실력을 키웠다. 1982년에는 광주 남도예술회관에서 태풍 콘서트를 열었다. 대학가요제 출신 그룹 ‘휘버스’의 ‘그대로 그렇게’, 당시 최고의 그룹 중 하나인 ‘Deep Purple’의 ‘Highway Star’ 등을 공연했다. 별 이름없는 밴드인데도 당시 그룹사운드의 인기가 치솟고 있던 탓에 2천명 이상의 관객이 왔다.                       


나. 내신 14등급으로 힘들게 대학을 진학하다     


학교공부에 소홀하여 고등학교 내신이 15등급 중 14등급으로 결정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학력고사에 응시했더니 340점 만점에 180점을 받았다. 최하위의 내신등급과 낮은 학력고사 점수로 인해 진학할 수 있는 4년제 대학은 없었다. 차라리 학교를 중퇴했으면 내신등급의 불이익이 없었을텐데 당시 자식의 장래를 걱정하던 어머니의 당부에 따라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면서 내신 불이익이 대학진학에 있어 커다란 장벽이 되었다.      

문과생이었으나 학교 진학을 위해 2년제 전문대 토목과에 응시하였고 응시인원 미달로 합격하였다. 전문대 시절에도 그룹사운드 활동을 하면서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문과생이 이과 전공을 계속 다니기 어려워서 국영수를 제외한 암기과목을 공부해서 4년제 대학인 목포대 경제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목포대 시절에도 그룹사운드 활동을 하면서 학업은 게을리하여 두 번 연속 학사경고를 받았다. 세 번의 학사경고를 받으면 퇴학처리가 되므로 군대에 입대하였다.         


다. 제대 후 현실을 직시하다          


1987년 10월 강원도 고성에서 전방 포병생활을 마치고 제대하였다. 진로를 모색하던 중 필자의 향후 인생진로가 무척 궁금했다. 이런 부분에 관심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것이 사주팔자다. 그래서 사주명리학 책을 구입하여 읽었다. 부모님이 평소에 말씀하시길 필자가 태어날 때쯤 사주를 잘 보는 사람에게 몇일 몇시에 태어나는 것이 좋겠냐고 물었는데 필자가 그날 그시에 태어났다고 했다. 만일 좋은 팔자를 타고 났다면 잘되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필자의 사주팔자가 더욱 궁금했다. 사주책을 독학으로 연구해서 보니 필자의 사주에 소위 관성이 있었다. 당시에는 고시합격이 젊은 사람들의 최고 성공징표였는데 고시에 도전해도 될 것 같았다. 고시에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소위 고시병에 걸린 사람들은 관록이 없기 때문이라는 말을 들을 적이 있었다. 그런데 필자의 사주에 관성이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냉철하게 필자 자신을 돌아보니 음악에는 재능이 부족해 비전이 없었다. 또한 기타연주로 돈을 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늦었지만 공부를 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판단했다. 그간의 상황에 비추어 좋은 회사에 들어가기는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실력으로 당락을 결정하는 고시가 마음에 끌렸다. 고시시험제도는 당시 부정부패가 상당했던 시절이지만 철저하게 공정성과 객관성이 보장되고 실력만으로 당락이 결정된다는 국가적 믿음이 있었다. 국가유공 가점과 같은 가점시스템도 7급시험까지만 적용되고 고등고시에는 이런 실력 이외의 요인은 적용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때 공부를 하지 않아 학업실력으로 보자면 9급 공무원시험도 어려웠다. 공부하는 습관도 없었고 시험요령도 없었다.      


공무원 시험이 어렵고 게다가 고등고시는 정말 공부를 잘하는 명문대 수재들도 소수만이 합격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소위 ‘하늘의 별따기’였다. 또 주변에 수재라는 평가를 받고 열심히 고시공부를 하고 있으나 시험에 계속 낙방하면서도 눈이 높아 다른 직장은 찾지도 못해 부모님을 애타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기 학업실력에 맞는 시험을 택하여 도전해야지 무모한 도전은 고생의 지름길이라는 생각이 통념이었다.        


“모르는게 약이다”라는 말이 있다. 필자는 통상 인생에서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해야하는 대학입시를 위한 공부를 하지 않아서인지 공부가 어렵다는 생각조차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공부를 하지 않아 걱정을 많이 되었던 사람이 공부를 한다고 하니 고시를 준비하던 뭐든간에 합격 가능성 여부를 떠나 부모님이 좋아했다. 마치 탕자가 집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기초 학업실력도 없고 어느덧 나이도 20대 중반이 되어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성공확률이 낮았다. 그럼에도 필자는 고시합격이라는 꿈을 생각하니 기분이 좋았고, 부모님도 일단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적극 지원해 주셨다.       


한편으로 필자의 입장에서는 그 동안 놀다가 공부를 열심히 하려면 스스로에게 명분이 필요했다. 공부하는 습관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단순 암기를 지겨워 하는 성격상 학업목표가 낮으면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공부를 시작하기로 결정했다면 남들이 최고로 인정해 주는 고등고시합격이 매력적이었다. 10대 때에는 사춘기를 지나면서 락스타와 같은 연애인이 되고 싶은 성향이 있는데 이를 추구하여 기타를 배우고 공연도 했다. 20대 중반이 되니 남들이 부러워 하는 직장이나 자격이 필요했다. 그러나 10대 시절에 하고 싶은 화려한 락스타를 꿈꾸며 공부를 하지 않았었던 과거가 20대에 들어서는 최악의 상황으로 작용했다.      

공부하기 위해 책상에 오랫동안 않아있는 것 자체가 힘든데 목표가 강력해야 이를 극복할 수 있다. 우선 제대 후 8개월 후인 1988년 6월에 실시된되는 행정고시 1차 합격을 목표로 세웠다. 주변에 고시에 합격한 선배나 아는 사람도 없고 행정고시에 관한 정보 자체가 없어 고시 합격기를 모아놓은 “다시 태어나도 이 길을”이라는 책을 사보았다. 경제학과에 적합한 고등고시는 행정고시 재경직이었다. 합격 스토리를 읽어 보니 감동의 인간승리의 모습이 있었다. 잠을 4∼6시간만 자고 공부에 몰입하고 떨어지면 오뚜기처럼 일어난 실제 사례를 알게되니 비장한 마음이 생겼다. 행정고등고시 재경직 1차 합격을 목표로 정하고 하루 14시간 이상 공부한다는 세부목표도 수립했다. 하루 공부목표를 달성하면 수면을 취하는 방식으로 하루하루 세부목표를 달성하였다. 필자의 일생 중 가장 열심히 집중해서 공부하던 시절이었다.   


라. 운명처럼 고시 1차에 합격하다     


고시 1차 준비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기초실력이 약한 영어였다. 문법 기초실력이 전혀 없었는데 마침 혼자서도 영어를 쉽게 독학할 수 있도록 설명이 자세히 기술된 ‘맨투맨’ 책이 출간되었다. 이 책을 꼼꼼히 읽고 영어구문과 관련된 문법을 중점 공부했다. 단어는 시간부족으로 많이 암기하기 어려웠다. 다행인 점은 고시영어시험은 시험난이도가 높아 단어를 많이 암기해도 정확한 뉘앙스를 모르면 정답을 맞추기 어려웠다. 그래서 정확한 구문파악을 통해 출제자가 의도한 함정에 빠지지 않는 데에 초점을 두고 공부했다. 어려운 시험이므로 기본문제를 맞추는데에 초점을 두고 어려운 문제는 상황판단에 맡기기로 하였다. 


영어 외에도 경제학, 헌법, 민법, 국사 등의 과목이 있었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경제학의 경우 수학에 적성이 없는 사람들은 그래프나 미분과 같은 수학적 요소가 있어 이해에 어려움이 있다. 필자의 경우 수학지식이 거의 맹탕이어서 생소했다. 그런데 수학책과 달리 현실경제를 설명하기 위한 도구로 그래프나 미분을 적용하고 있어 이해가 쉽게 되고 오히려 수학적인 간결한 설명이 더 좋았다. 


당시 행정고시 재경직 최종 합격인원이 20명이고 1차에는 100여명이 합격하는 구조였다. 주위의 아는 사람들과 대화하다보면 고시에 도전한다는 필자에 대해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너무 목표가 허왕한 것 아니냐는 느낌을 풍겼다. 대학 도서관에서 고시공부를 했는데 명문대 졸업생들 몇 명도 고시일정에 맞추어 공부하고 있었다. 공부하는 책을 보면 고시준비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서로 알게 되었다. 공부하던 중 어느덧 시험날짜가 다가왔고 무난하게 시험을 치루었다. 처음 응시하는 시험이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합격자 발표날을 기다렸다. 


합격자 발표날이 되어 합격자 명단을 보게 되었는데 1차 시험 합격자 명단에 필자의 이름이 있었다. 점수를 확인해 보니 합격커트라인 점수가 86점이었는데 86점으로 합격하였다. 같은 도서관에서 고시 공부를 하던 명문대 졸업생들은 다 떨어지고 처음 공부를 시작한 필자는 합격하는 묘한 상황이 연출되었다. 어찌되었건 필자에게는 기적같은 일이었다. 처음 시도에 그 어렵다는 시험의 1차 관문을 통과하게 되었으니 자신감이 충만되고 무척 기뻣다. 주변 사람들도 충격을 받았다. “공부를 안해서 그랬지 원래 머리가 좋은 애야”, “1차 시험은 합격하고 2차 시험에 계속 낙방하는 사람도 많아” 등등의 다양한 평가가 들려왔다. 고시 1차 합격은 인생의 목표를 완전히 고시합격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이렇게 쉽게 1차 합격이 되는 것을 보면 고시합격 팔자가 맞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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