곱창돼지 오영오-16
사람들이 흔히들 학연/지연 등 인맥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뜻에 대해 안 좋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사회에서 능력보다는 친분이나 인맥으로 누군가와의 경쟁에서 불이익을 받는 일들이 계속된다면 아마도 노력조차 하기 싫어지는 사회 현상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주원은 속한 회사에서 말단이라(앞으로도 그럴 것이지만) 아직은 불이익을 본적도, 아니면 누군가가 인맥으로 이득을 본 것을 많이 목격하진 못했지만, 회사에서 같은 대학을 나온 사람들끼리 회식자리를 갖는 것을 종종 본 적이 있다. 나는 고등학교/대학교를 외국에서 나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학연/지연 등으로 덕을 볼일은 없겠지만 나는 딱히 이것에 대해 안 좋은 시선을 가지진 않는다. 이유야 어찌 되었건 자라나는 후배들을 챙겨준다는 것 자체가 의도를 차치하고서라도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맥을 늘린다는 명목으로 무리하게 주변에 능력 있는 사람들만 쫓아다니며 친분을 쌓으려는 사람들을 보는 게 달갑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누군가와 친해지려고 애쓰기보다는 본인만의 장점을 극대화하여 능력을 키우면 알아서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다.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숟가락 얹어서 이뤄낼 성공보다 몇 배는 큰 성과를 자생적으로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맥을 통해 작은 이득이라도 보게 된다면 작게나마 보답하는 습관을 가지는 게 좋다.
잘 나가는 사람들을 추종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주원이지만, 그래도 주변에 꼭 지인으로 삼기를 추천하는 두 전문직이 있다. 바로 의사와 변호사다. 필자의 엄마는 잔병이 많은 편인데, 몇 가지를 뽑자면 관절, 심장질환, 당뇨, 비만, 혈압, 낭비벽 등이 있다. 그중 몇 년 전에 혈압이 심하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엄마가 다니는 대학병원에 내원해서 계속 혈압약을 바꿔달라고 의사에게 요청했지만, 당시 심장내과 의사는 스트레스가 문제라며 검사를 해보지도 않고 약을 바꿔주지 않으며 정신과를 가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그런 돌팔이 때문에 몸 더 상하기 전에 다른 대학병원 가라고 권했지만 엄마는 거기가 가장 가깝다며 고집을 부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한번 혈압이 올라 내가 회사에 있는 동안 구급차를 타고 응급실에 간 적이 있다. 엄마한테서 들어서 검증이 되지 않은 사항이지만, 대학병원은 소속 의사들의 권력이 엄청나게 강하기 때문에 환자가 원한다고 해도 담당의사를 바꿔주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서, 의사와 면담 시간이 분 단위로 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날 진료가 일찍 당겨져 환자가 없으면 계속해서 간호사들이 예약시간보다 빨리 내원하라고 여러 번 전화하는 통에 정신없이 운전하다가 사고가 날뻔한 적도 있었다고 했다.
엄마의 학창 시절 때는 중/고등학교도 시험을 보고 입학하던 시기였는데, 엄마는 나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지금으로 치면 외고와 수준이 비슷한 경기여고를 나왔다. 그 당시 시대적인 배경 때문에 많은 동창들이 전업주부가 되었지만 사회생활을 계속하신 분들 중에는 엄마 나이가 됐을 때 속한 조직의 장이 된 사람들이 종종 있었다. 그런 친구들 중의 한 명이 앞서 말한 대학병원의 당시 병원장이었는데 엄마가 응급실 침상에 누워 분을 삭이지 못하고 그 친구한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하며 담당의를 변경해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통화가 끝나고 잠시뒤 다른 심장외과 과장이 뛰어내려와 내려와 친절하게 상담을 해주었고, 혈압약도 즉시 바꾸어주어 그 후로부턴 혈압이 비정상적으로 잡히지 않는 일은 없었다. 엄마의 진료카드 비고란에 무엇이 적혔는지 모르겠지만, 그 후로부턴 병원에서 내진을 빨리 오라는 전화도 없었고 다른 과의 의사들도 전보다 친절하게 엄마를 대했다고 한다. 검증되지 않고 엄마한테서 들은 이야기니 다소 주관적인 이야기 일 수 있다.
의사 말고 변호사 지인이 있는 것도 개인에게는 굉장히 큰 복이라 할 수 있다. 보통 개인적인 일로 변호사에게 일을 수임하면 적게는 300만원 부터 몇천만원까지 수임 비용이 산정된다. 변호사에게 일을 수임한 개인 입장에서는 적지 않은 비용이라고 생각하고 변호사가 일을 잘 처리해 줄 것이라 기대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아마 사건을 맡아준 변호사는 300~1000만원 사이의 소송을 수십 개 이상 동시에 수임한 상태일 것이고, 이러한 사유로 생각보다는 작은 건들은 크게 신경을 써주지 않는다. 언제 법원 근처인 교대역이나 서초역에 평일 낮에 들릴 일이 있다면 근처의 공원을 가보자. 거기에서 소송을 진행 중인 사람들이 변호사에게 전화를 하며 불만을 토로하고 있는 장면을 쉽게 볼 수 있을 것이다. 변호사가 수임을 한 순간부터는 변호사와 새로운 싸움이 시작된 것이라 봐도 무방 한 것이다. 그렇기에 본인의 사건을 변호사가 세심하게 신경 써주길 바란다면, 지인인 변호사에게 부탁하거나, 아니면 지인 소개를 받는 것이 훨씬 유리하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참고로 위의 전제는 주머니 사정이 넉넉하다면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위에 사례만 놓고 본다면, 대학병원에서도 기부를 받아주는데, 일정 이상 금액을 기부하면 수술을 잡거나 입원해 있을 때 알게 모르게 특혜를 준다고 한다. 굳이 의사 인맥이 없었어도 엄마가 거액의 액수를 병원에 기부했더라면 더 좋은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아니면 그냥 다른 병원으로 옮기던지..) 변호사도 마찬가지다. 소송의 스케일이 적더라도 대형 로펌에 사건을 위탁하면 교대역 공원에서 비둘기와 새우깡을 나눠먹으면서 변호사 음성사서함에 구구절절하게 전화를 받아달라는 메시지를 남기지 않아도 된다.
아무튼 주원은 같은 사유로, 주원의 중학교 시절 과외선생님에게 전화를 드렸다. 과외선생님은 고려대를 나오고 경영학을 전공하였는데, 대학교 졸업 후 군대를 다녀와서 갑자기 진로를 전향해 사법고시를 붙었다고 한다. 선생님은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자비심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그래서인지 개인적인 민/형사 사건보다는 주로 기업의 무역 업무를 전담으로 다룬다. 그래도 엄마가 관리하는 부동산의 문제가 있을 때마다 법률 자문을 해주거나 적은 금액으로 수임을 맡아준 적도 더러 있었다. 나는 세입자와 분쟁이 생겨도 그냥 손해를 보고 넘어가기만 했기 때문에, 이런 소송건으로는 처음으로 선생님한테 연락을 한 것이었다.
내가 선생님에게 연락한 시점은 재석이가 영오와 손절한 사실을 알린 뒤 한 달 정도가 지난 후였다. 사실 귀찮아서 고소를 하지 않을 생각이 컸지만, 두 가지 이유로 고소를 결심하였다. 첫 번째는 내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곱창돼지 오영오는 본인의 잘못이 다 밝혀진 후에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본인이 사기꾼임을 친구들한테 알렸다는 이유로 재석이에게 욕설을 하고 아무런 논리 없이 약속한 금액을 주지 않겠다는 뻔뻔함을 보여주었다. 두 번째는 양반의 후손으로 태어난 나의 사명감 때문이다. 주원의 할아버지는 일제강점기 때 힘들게 독립운동을 한 이력이 있다.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최악의 테러리스트 중 한 명이었겠지만, 한국에서는 돌아가셨을 때 나라에서 지정해 준 무덤의 토지도 몇백 평이 넘고 아직도 후손들에게 연금을 줄 정도로 공로를 치하받았다. 그렇기에 후손인 나도 귀찮다는 이유로 돼지인간이 나라를 혼잡하게 하며 사기 친 돈으로 맛있는 걸 사 먹고 점점 심해지는 여유증을 통해 미인계를 쓰는 것을 두고 볼 수많은 없는 상황이었다.
선생님은 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침샘이 자극돼서인지, 요*요에서 족발을 시키며 선생님의 의견을 말해주었다.
"주원아 너가 열받는 건 알겠지만 일단 형사 고소로 처벌은 어려울 거 같아. 생각보다 한국에서 사기죄를 성립하는 게 쉽지 않아. 우리 그냥 민사 소송만 걸자."
나는 선생님에게 민사로 돈을 돌려받는 것보다는 형사고소를 통해 전과이력을 남겨주고 싶다고 말했다. 액수가 크지 않아 실형은 힘들더라도, 사회적으로 표식을 하나 해놓고 싶었기 때문이다. 사기 전과만 있다면, 혹시라도 영오가 사기를 계속 치다가 큰 일을 할 때 범죄 기록 때문에 발목을 잡힐 수 있다고 생각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새로운 사기를 치려고 할 때 예전보다는 막무가내로 하지 못하도록 제어 장치를 걸어두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선생님은 계속 형사 고소를 만류하셨다.
"선생님 지더라도 싸우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원치 않으시면 다른사람과 하겠습니다. 그리고 돈은 필요 없으니 민사는 걸지 않겠습니다."
전쟁에 나가기 전에 가족을 다 죽이고 나간 계백처럼, 나의 결의를 강하게 하기 위해 민사를 걸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끈질긴 설득 끝에, 결국 형사 소송을 걸기로 하고 선생님과 만날 약속을 잡았다.
-17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