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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엘 Apr 14. 2024

새치기한 자의 아량

또는 사람의 이중성


새치기한 자의 아량


삼십 년 만의 백화점 쇼핑이었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백화점이 있지만, 지하 식품매장이나 들렀지, 그 위층들은 구경도 거의 하지 않았었다. 이번에는 아이가 특정 운동화를 사고 싶다고 하는데, 가장 가까운 그 브랜드 매장이 백화점에 있어서 가게 되었다. 


다행히 찾는 모델이 있었고, 점원에게서 받아 든 신발 상자를 들고 계산을 하기 위해 카운터에 줄을 섰다. 내 앞에는 한 사람이 계산을 하고 있었는데, 금방 내 뒤로 여러 명이 줄을 만들었다.


잠시 후 점원이 한 명 더 카운터에 오더니, 옆에 있는 계산대에 섰다. 

"다음 분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서도 계산해 드립니다."


내가 움직이려던 순간, 내 뒤에 있던 남자가 냉큼 그쪽으로 갔다. 이게 무슨 경우인가, 싶어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 사람이 원하는 제품을 새로 갖고 올 테니 잠시 옆에서 기다리라고 점원이 말을 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내 뒷사람에게 손짓을 하며 "다음 분 이쪽으로 오세요. 여기서도 계산을 해 준답니다." 한다.


이건 또 무슨 경우인가 싶었다. 내 차례를 새치기한 것도 모자라서 내 뒷사람을 오라고 선심 쓰듯 말하다니!


내 앞에서 계산하던 사람은 시간이 좀 걸리는 모양이었다.


순간 참지 못하고 그 남자에게 시비를 걸었다.


"아니, 이거 보세요. 순서도 몰라요? 한 줄 서기를 하다가 옆에서 다음 사람 오라고 하면, 앞에서부터 가는 거 아니에요? 중간에서 아무나 가요?"


그 남자는 지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그럼 이쪽에서 계산하세요." 한다.


아니, 내가 그쪽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싶다고 했나? 왜 내 차례를 새치기했냐고 문제제기를 한 거였는데! 


미안하다고 한 마디 하면 끝날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른 사람이 그 카운터에서 계산을 하고 있는 중이고, 그 남자는 옆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태여서 자기 차례를 양보하거나 하는 상황도 아니었다. 도대체 뭘 하라 마라 하는 건지...


내가 어이없어서 한 마디 더 했다.

"아니, 내가 그쪽에서 여기 와라 마라 할 상황이 아니잖아요. 새치기를 했으면 미안하다고 해야지, 이게 무슨 경우예요?"


그 남자는 미안하다는 말을 할 생각이 없었다. 그냥 나와 시비가 걸린 게 민망할 뿐이었다.

"그냥 계산하고 가세요."라고 한다.


"내가 계산을 하고 가든 쇼핑을 계속하든 그쪽에서 상관할 게 아니죠. 한 줄 서기가 뭔지도 모르고 다음 사람 오라고 하는데 누가 가야 하는지도 모르고 중간에서 새치기했으면 부끄러운 줄 아세요."


나도 지지 않고 바득바득 따졌다. 


그사이 내 차례가 되었다. 계산을 했고, 매장에서 나왔다. 


나오면서도 기분이 안 좋았다. 그 남자가 새치기한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니었다. 


돈 좀 있어 보이는 옷차림을 하고 거만하게 사람을 대하면서, 본인에게 있지도 않은 권한을 행사하려 하는 태도가 문제였다. 


새치기하고도 잘못한 줄 모르고 내 뒤에 있는 사람에게 굉장한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오라고 했다. 그리고 나한테는 미안하다, 한 마디만 하면 지나갔을 일을 그 말을 안 하기 위해,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그럼 네가 여기로 와라, 아니면 빨리 계산하고 가라, 하는 거만한 태도가 매우 거슬렸다. 


우리 사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남자처럼 돈이든 권력이든 인맥이든, 제가 갖고 있는 무엇에 기대어 남들보다 우위에 있다고 믿고 행동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 때문에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는 것을 알지도 못하는지, 그러면서 다른 쪽에서는 뭔가를 베푸는 선량한 행위나 표정을 만드는지...



교회 신도의 손찌검


십수 년 전에 교회 유아방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아이가 어릴 때라 교회 유아방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유아방은 아이들과 그 부모들로 바글바글 했다. 서로 인사는 안 해도 매주 보던 사람들이 많아서 각자 의례히 차지하던 자리에서 아이들과 함께 예배를 보고 아이들을 챙기고 하였다.


그날은 처음 보는 가족이 왔는데, 삼십 대 중반으로 보이는 부부가 네댓 살 돼 보이는 여자 아이와 돌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왔다. 예배와 상관없이 유아방은 아이들의 수와 상태에 따라 도떼기시장 같기 일쑤인데, 그때 이 부부의 딸이 자꾸 울고 보채며 그 정신없는 공간을 더 시끄럽게 만들었다. 


유아방에 오는 사람들은 그게 일상이라 그러려니 했다. 나도 아마도 처음 온 공간이라 낯설어서 그런가 보다 하고 생각했다.


아이들의 엄마는 갓난아기를 챙기느라 남편에게 딸 좀 달래주라고 했다. 하지만 딱 봐도 아이들 아빠는 평소에 아이들을 봐준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고, 사람들이 자꾸 그쪽을 쳐다보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나 보다. 


딸을 달래주려고 몇 번 어르고 말을 하다가 아이가 말을 듣지 않고 자꾸 제 고집을 부리며 생떼를 부리고 울고 하니까 씩씩거리고 얼굴이 벌게지더니 아이의 뺨을 제법 세게 때렸다. 


난 너무 놀라고 흥분해서 벌떡 일어났다. 생각해 보니 나도 내 아이를 아기띠를 하고 안고 있었는데, 그래서 더 다가가지는 못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맞은 것도 아닌데,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리고 (이때에도) 참지 못하고 외쳤다. "아니, 아이를 때리면 어떻게요!"


사람들이 다 나와 그 남자를 쳐다봤다. 


둘째 아기를 돌보느라 딸 쪽을 보지 못했던 아이들 엄마가 의아한 듯이 나와 자기 남편을 번갈아 쳐다봤다. 남자는 당황해서 얼굴이 빨개졌고, 딸아이는 그 상황에 놀라서 생떼를 멈추었다. 그리고 제 아빠와 내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가 다시 말했다. "아니, 아이가 아무리 말을 안 들어도 그렇지, 어떻게 뺨을 때려요? 어떻게 어린애 따구를 그렇게 세게 때릴 수가 있어요?" 


남자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어쩔 줄을 몰라했다. 의외였던 건 아이들의 엄마였다. 남편에게 못 믿겠다는 투로 "여보, 당신이 아무개 뺨을 때렸어?" 하더니 남편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나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제가 못 보긴 했지만, 제 남편이 무슨 따구를 때려요. 아이가 말을 안 들으니까, 이렇게 가볍게 뺨을 건드렸겠죠."라고  딸아이 뺨을 살짝 건드리며, 보지도 못한 남편의 행동을 미화해서 얘기한다.


본인이 믿을 수 없다는 생각도 들고 사람들이 쳐다보니 민망해서 얼른 이 상황을 무마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그랬을 것 같기도 했다. 


이 상황에서도 남자가 한 마디 했으면 끝났을 일이었다. "제가 좀 흥분했습니다. 아무개야, 미안하다." 그리고 이제는 조용해진 딸아이를 안아주면 그만인 일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딸아이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끝까지 하지 않았고, 부끄러움 반, 당황 반,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냥 앉아있었다. 


"나중에 물어보세요. 남편 분한테. 아이한테 어떻게 했는지. 그리고 아무리 자기 딸이라도 그렇게 때리시면 안 되죠." 


나도 너무 놀라고 흥분해서 부들부들 떨렸다. 이런 말을 해서 이 사람들이 나나 내 아이한테 해코지 하면 어쩌지? 내가 잘못하는 걸 지적질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난 뭘 그렇게 잘한다고... 


한창 육아 관련 프로그램들을 챙겨보던 때여서 체벌에 대해서 더 민감했는지 모르겠는데, 누군가가 공공장소에서 어린아이 뺨을 그렇게 대차게 갈긴다는 것은 상상해 본 적이 없는 일이어서 나도 너무나 당황했다. 그것도 교회에서.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기도 했지만, 누구라도 개입하지 않으면 그 아이가 아빠에게 맞는 일이 반복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순간 들어서 오지랖을 부렸다.


그 부부나 내가 다르게 대처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만약 그 아이들 엄마가 "어머, 여보, 왜 그랬어요. 그렇게까지 하면 안 되지."하고 남편에게 주의를 주고, 나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사람이 당황해서 그랬나 봐요. 우리 딸이 낯선 곳에 와서 좀 예민하게 굴었네요." 했다면 어땠을까.


그다음 내가 그 남자의 폭력에 집중해서 지적질을 하지 않고, "그러게요. 제가 주제넘게 너무 흥분했어요. 여기는 아이들이 울거나 떼를 써도 누가 뭐라고 하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달래주세요."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그다음 주부터 그 가족은 유아방에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쫓아낸 건가 싶어 마음이 불편하기도 했지만, 그날 일 때문에 그 남자가 아이들에게 쉽게 손찌검을 하지는 않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가져본다. 



사람의 이중성에 대한 우리의 태도


매체나 SNS를 통해 우리는 어느 한 단면만을 보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사람들의 그러한 이중성을 알게 되었을 때 때론 혼란스럽고 부정하려고까지 한다. 내가 좋게 생각하는 것이 그 사람의 전체이기를 바라는 마음이 너무 큰 것이다. 


누구나 실수를 한다. 잘못을 저지른다.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미안하다고 말하고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돈이 있어 보이거나, 높은 지위에 있거나, 외모가 훌륭하거나, 매너가 좋으면, 그 사람의 의도나 행위가 좋은 것으로 포장되기도 하고, 종교가 있으면 잘못된 행동을 할 리가 없다고 부정하기도 한다. 그럴 리가 없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무조건 잘못할 리가 없다고 미화하는 것보다, 잘못이 있다면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은 것 아닐까. 누가 잘못을 저지른다고 그 사람 전체를 부정하거나 그 사람과 척을 지고 살 필요는 없다.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고 무조건 좋게 생각하는 것보다, 실수할 수 있다고 받아들여줄 때, 잘못을 저지른 사람도 쉽게 인정하고 사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발전하는 것 아닐까. 



ps. 나야, 근데 오지랖은 좀 그만 부리지,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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