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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엘 Feb 02. 2024

할아버지의 선물상자

할머니집


외할머니, 외할아버지가 사시는 집은 우리 집의 바로 앞집이었다. 한 동네에서 집을 얻어도 어떻게 그런 집을 얻었을까 싶은데, 문자 그대로 대문을 열면 차 두 대가 지나갈 수 있는 골목길을 마주하고 바로 앞 집이 할머니 집이었다. (두 분이 같이 사셨지만 글자 수가 적어서 그런지, 할아버지집이라는 말보다는 할머니집이라는 말이 입에 붙었다.)


할머니집은 건축가인 외삼촌이 직접 설계하고 지으신 집이었고, 우리 가족이 살았던 집은 그냥 집장사가 지은 집이었는데, 아마도 이미 할머니집이 있는 상태에서 육아에 도움을 받고자 부모님이 외조부모님 가까이 살려고 하다가 운 좋게 발견한 게 그 집이었을 것이다. 


나에게는 그 이전에 살았던 다른 집의 기억이 별로 남아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여기에서 대여섯 살 정도부터 살았던 것 같은데, 내가 중3 직전 다른 곳으로 이사 갈 때까지 지냈으니까 10여 년을 외할머니, 외할아버지와 가깝게 지낸 것이다. 


우리 집이 슬라브 단층집인 것과 대비하여 할머니집은 동쪽으로 앉은 안방과 건넌방 위쪽으로 2층이 있었는데, 밖에서 보면 오른쪽이 높고 왼쪽으로 급한 경사를 보이는 기와지붕이 독특한 외경을 이루고 있었다. 게다가 한옥처럼 바깥 마루가 따로 있었고, 댓돌이 놓여서 운치도 있고, 너른 자리가 필요한 집은 일을 하기에 아주 요긴했다. 또 안마루에서는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두꺼운 돌느낌인데, 서로 연결되지 않고 벽에만 붙어있는 구조여서, 손잡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르내릴 때 짜릿한 재미가 있었다. 


할머니 집에는 집을 설계하신 큰삼촌 가족이 아들 둘을 데리고 같이 사셨고, 작은 삼촌과 이모도 있었다. 방 개수가 많지 않았고 크기도 작았던 것을 생각하면 거주하는 사람 수가 좀 많았다. 당시에는 나무를 때거나 연탄보일러를 썼기 때문에 밤마다 누군가는 일어나서 연탄을 갈아야 했고, 화장실도 하나여서 일곱 명이 사용하기에는 불편함이 많았으리라.


결국 큰삼촌 가족은 아이들이 초등학교 들아가기 전에 이사를 나갔다. 그것도 차로 두 시간 이상 걸리는 먼 곳에 있는 아파트로 갔다. 아마도 자주 오지 않으려는 의지를 담아서 집을 찾은 게 아닐까 하는 것이 당시 어린 나에게도 들었던 생각이었다.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사촌 동생들과 친하게 지냈었는데, 갑자기 둘이 없어지니 나는 많이 심심해졌다. 동네 친구도 많지 않은 나는 할머니집 마당에서 흙이랑 돌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는데, 때로는 할머니와 막내이모가 부엌일 하시는 것을 들여다보다가 서툰 손으로 거든다고 하거나 할아버지가 땔나무를 들이시거나 집안 건사하시는 것에 참견을 하곤 했다. 


할머니


할머니는 학교를 다닌 적이 없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민한 분이셨다. 셈은 어느 시장의 장사치를 데려다 놔도 경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고 정확했고, 띄엄띄엄 TV로 보시는 뉴스로도 웬만한 시사 이슈는 꿰고 계셨다. 또 배구를 좋아하셔서 큰 배구 경기가 있을 때에는 가능하면 챙겨 보셨는데, 규칙도 알고 선수들 이름도 알고 계셨고, 슛이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패스가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감탄을 하시면서, 정말 즐기면서 경기를 보셨다. 


영근 밤톨처럼 실속 있다는 뜻으로, '용산 밤부잣집' 막내 따님으로 불린, 부족함 없이 지낸 시간도 있으셨지만, 일제강점기와 전쟁을 겪고, 또 외할아버지가 사기를 당해서 모아놓은 돈을 잃으시면서 극심한 가난도 겪으셨던 터라, 할머니는 검소함이 몸에 배이셨다. 


집안에는 쓸데없는 물건을 찾아볼 수 없었고 항상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옷도 몇 벌 없었는데, 현대화가 진행되는 시대에 나름 센스 있게 치마저고리나 원피스를 해 입으셨다. 매일 찢은 일력을 깔끔하게 모아 두었다가 다 제 쓰임이 다하도록 하셨고, 음식도 남아 버리는 일 없이 알뜰하고 야무지게 관리하셨다.


그러면서도 명절이 되어 인사 오는 친척들에게 대접할 떡국과 반찬은 부족하지 않게 준비하셨다. 이번에는 어느 집에 무슨 일이 있으니, 누구는 올 수 있고 누구는 오기 어려울 것이다,라며 손님 수도 예측하시고, 그에 따라 음식의 양과 종류를 정하셨는데, 메모도 안 하면서 그 음식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재료를 정하고 각각의 재료를 얼마큼씩 하면 되는지 암산을 척척 하셨다.


쉬려고 방에 누우셨다가 이런 계산을 하신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옆에 누워서 할머니가 무척 멋있는 분이라고 생각했다. 체격이 자그마하셨던 할머니는 나에게는 어려운 시기를 모두 극복하고 항상 희망을 놓지 않으면서 현실을 하루하루 살아내신 강인한 거인같은 분이셨다. 


유일하게 사치를 하셨던 것이 하루에 하나 배달시켜 드시는 야쿠르트였다. 야쿠르트의 단맛이 할머니의 고단한 하루를 녹이기라도 하는 듯, 야쿠르트 오는 시간을 기다리셨고, 냉장고에 들어갈 사이 없이 맛있게 천천히 드셨다. 


할아버지


오랜 무직 생활로 할아버지는 집안에서 목소리가 크지 않았다. 집안에서 모두가 아는 비밀로 할아버지가 사기를 당한 이야기를 하곤 했는데, 문제는 사기를 한번 당한 이후에 경제적으로 제대로 재기하지 못하셨던 거였다.  


어렸을 때 한학을 공부하셨고 젊었을 때에는 꽤나 큰 회사에서 일을 하셨었기 때문에 그다지 꿀릴 것도 없는 스펙을 가지셨다. 아마 지금 같은 효율적인 사회에서라면, 할아버지는 나이에 상관없이 다른 자리를 찾으셨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한자도 일본어도 잘 아셨는데, 엄마가 취미로 배우는 서예를 옆에서 보다가 한자 뜻이나 유래를 설명해 주시기도 했고, 붓글씨도 나름의 서체로 슥슥 쓰셨다. 아빠가 일본어로 된 책일 읽다가 질문을 하면 그것도 척척 답을 해 주셨다. 엄마는 어렸을 때 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소학을 배운 기억이 있다고 했는데, 내가 모르는 세계에 대한 지식이 있고 그걸 수월하게 알려주시는 모습이 엄청 멋졌다. 


게다가 엄마도 몰랐던 대박 사건은 내가 조르고 졸라서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하고 나서 있었는데, 한번 만져보자며 크기도 작은 내 바이올린을 집어드신 할아버지는 유모레스크를 멋들어지게 연주하셨다. 어, 이거 뭐지? 도대체 어느 시절에 누구한테서 배우신 건지 몰라도 나의 음악적 감성은 엄마가 아니라 할아버지에서부터 이미 시작된 거라고 생각하기에 충분한 실력이셨다. 활을 끊어가며 붓점을 살리시는 연주를 듣고 있으니, 여기에 맞춰 춤을 춰야 할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시대가 변할 때 크게 한방 먹은 것 때문에 어려운 생활을 하시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노는 것 좋아하는 한량이 아니라 다재다능하고 성실한 공무원 스타일이셨다. 비록 운때가 맞지 않아서 어려움을 많이 겪으셨지만, 그 시대 인텔리이고 로맨티시스트가 아니셨나.


이런 할아버지가 나를 '조박사'라고 부르셨다. 열심히 공부하라고 그리 부르셨겠지만, 나는 할아버지가 그리 불러주시는 게 싫지 않았고 나름 으쓱해지기까지 했다. 할아버지가 나를 특별하다고 인정해 주시는 건가 싶기도 했고, 뭔가 할아버지와 나 사이에 특별한 끈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러주시는 거라고 믿기도 했던 것 같다.


할머니, 할아버지의 손주 사랑


당시에는 남존여비 사상이 여태 강했고, 언니와 내게 어떻게 부모님이 아들을 안 보시고 딸 둘만 낳고 그만이시냐고 묻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혹시 외할머니, 할아버지도 그런 생각이 있으신가 궁금하여 여쭤본 적이 있다. 


남자아이들인 사촌동생들이 더 좋은지 나와 언니가 더 좋은지. 따로 여쭤봤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모두 너희들 똑같이 좋아한다고 대답하셨다. 


하지만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딸보다는 아들들에게 더 의지하는 마음을 갖고 계신 것 같으니, 손주들 중에서도 사내 녀석들을 더 편애하지 않겠냐고 하셨다. 그러면서 일 년에 몇 번 안 오는 내 사촌동생들이 올 때마다, 할아버지가 부족한 용돈으로 슈퍼마켓에 '종합선물세트'를 사다 주시지 않냐고 증거를 대셨다.


물론 할아버지는 뭐라도 하나 주고 싶은 마음에 내 사촌동생들에게 여러 가지 과자가 들은 종합선물세트나 조립해서 만드는 플라스틱 로봇 같은 것을 사 주시곤 했다. 하지만 아이들의 반응도 뜨뜻미지근했고, 시댁이라서 그런지 거의 말이 없는 외숙모는 "뭘 그런 걸 사주세요. 애들 사주지 마세요. 버릇돼요." 하면서 무표정하게 바라봤다.


그걸 보는 내 입장에서는 사촌동생들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지내는 시간이 너무 없으니까 그 정도는 받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가 나를 위해서 지갑을 여신 적이 없어서 서운하다는 생각보다는 할아버지가 이렇게 애정 표현을 하시는데 제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 같아서 어린 마음에도 할아버지가 안 돼 보이기까지 했다. 


오히려 다른 한편으로는 사촌동생들이 안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좋은 할머니, 할아버지와 나는 많은 시간을 같이 하는데, 얘네들은 일 년에 며칠 보지도 못하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진수를 알아볼 기회도 별로 없으니 손해가 아닌가. 


비록 무슨 때가 되었다고 나에게 물건으로 선물을 해 주신 적은 없지만, 할머니, 할아버지는 10여 년의 시간 동안 내가 심심할 때 놀 수 있는 공간을 주시고, 마음이 힘들 때 털어놓을 수 있는 귀가 되어 주시고, 현명하게 사는 모습을 직접 보여주시고, 자존감을 쌓아갈 수 있도록 토대를 만들어주셨다. 그분들이 함께 해 주셨던 시간, 그것이 나에게는 누구도 뺏어갈 수 없고 대신 줄 수도 없는, 내 할머니, 할아버지의 선물상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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